백년가옥 오초량
초량역을 나와 부산항을 등지고 5분 정도 걸으면 아파트 세 채 사이로 고고한 표정의 오초량이 있다. 오초량은 부산 근대화 과정에서 재산을 축적한 일본 건축업자가 지은 적산가옥이다. 해방 후에는 일식 주거 양식을 유지한 채 배가 넘는 세월을 한국 사람이 돌보았다. 현재는 일맥문화재단에서 계절에 맞춰 전시와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복합문화공간으로 사용 중이다.
오초량은 예약자에 한해 입장이 가능하다. ‘개인의 집’에서 출발한 공간의 정체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철학으로 한정된 인원에게만 주택을 공개하고 있다. 전시는 하루 두 타임(10:30, 14:00)으로 운영하고, 한 시간 반 동안 머무른다. 인원을 12명으로 제한해 어느 때에 찾아가도 그윽한 정서를 향유할 수 있다.
예약한 인원이 모이면 전시 설명과 지도가 적힌 팸플릿을 배부하고, 가옥의 분위기와 어울리는 단정한 톤으로 오초량과 오늘의 전시를 설명한다. 오초량이 이번 가을에 맞춰 준비한 전시는 〈레터하우스 Letter House : 편지감각〉. 서울 연희동과 성수동에서 편지 가게를 운영 중인 글월과 함께했다. 백년가옥이 된 오초량에서 가을바람을 맞으며 편지를 쓰는 시간은 가히 호사스럽다. 하지만 공간을 어떻게 누릴지는 각자의 몫. 마음이 동하지 않으면 펜을 들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편지를 써보고 싶다는 작은 감각만을 얻어도 좋다.
편지의 틈을 만드는 시간
글월에서 오초량을 찾는 이들에게 제공하는 편지 서비스는 두 가지다. ‘펜팔 키트’와 ‘크리스마스에 받는 편지’. 원한다면 모두 경험해도 좋다. 모르는 이와 익명의 편지를 주고받는 펜팔 키트는 글월의 시그니처 서비스다. 아날로그 경험과 느슨한 소통을 찾는 이들로 글월 오프라인 숍을 북적이게 했던 펜팔 서비스를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누릴 수 있도록 키트로 구현했다. 펜팔 편지를 작성해 오초량에 맡기면, 원하는 주소로 타인의 편지도 한 통 받아볼 수 있다.
모르는 이에게 무슨 말을 적을까 싶지만, 막상 편지지를 펼치니 연필이 쉬이 움직인다. 창문 밖으로 솨,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나무도 편지의 소재가 된다. 묵은 고민마저 털어내니 금세 두 장이 채워졌다. 봉투에 나만의 표식을 남기고, 나를 표현하는 형용사를 선택하는 과정도 새로이 즐겁다.
‘크리스마스에 받는 편지’는 올해 고마웠던 이에게, 혹은 미래의 나에게 글을 작성하면 날짜에 맞춰 지정된 장소로 편지가 도착하는 서비스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겨울을 이겨내고 있을 누군가를 떠올리며 오붓한 시간을 보내기에 좋다.
편지 쓰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편지 작성이 버겁거나 편지에 적을 문장을 수집하고 싶다면 서한집이 배열된 책상으로 가자. 여기에는 두고두고 볼만한 편지를 엮어낸 열 권의 책이 있다. 책은 글월이 전시를 위해 준비한 종이 커버로 싸여있다. 독서하며 와닿는 문장이 있다면, 밑줄을 더해도 된다. 다른 이들은 어떤 문장에 매료되는지, 종이를 매개로 거리를 둔 교류를 하는 것도 신비로운 일이다.
예약 금액 안에는 편지 서비스 등 전시 관람비와 함께 차 바구니와 다식도 포함된다. 호박산국차, 녹차, 황차 중에서 미리 선택한 찻잎을 따뜻한 물을 담은 보온병과 함께 담아준다. 치즈가 들어간 곶감란, 금귤을 곁들인 밤 율란 등 차에 곁들일 다식은 자리에 앉으면 직원이 직접 준비해 준다. 차 바구니 안에는 시집도 한 권 꽂혀 있으니 한두 편 음미해도 좋겠다.
종이로 만든 편지 감각
이번 〈레터하우스 Letter House : 편지감각〉 전시는 두 명의 작가가 작품으로 공간을 채웠다. 공간 디자이너 노선현과 공예 작가 유수다. 전시 설명을 들은 장소에서 좌측으로 가면 편지를 둘러싼 도구 뒤편으로 노선현 디자이너의 작품이 있다. 실로 엮은 격자무늬 종이가 바람에 따라 움직이며 그림자를 만든다. 등을 돌리면 크리스마스 편지 도구를 담은 스틸 소재의 레터 박스가 있다. 편지 도구를 수납하는 도구이자, 편지의 과정을 아우르는 이 레터 박스 역시 노선현 디자이너의 작품이다.
오초량이 가져온 계절의 정취를 만끽하려면 나무 계단을 걸어 이층으로 가자. 창으로 들어오는 직선의 빛을 따라 유수 작가가 만든 나비들이 앉아 있다. 실내로 날아든 종이 나비를 감상하고 있으면 마음이 한결 차분해진다. 도드라지지 않는 음악과 주변 학교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웅성거림 정도가 백년가옥의 여백을 채운다. 마침 혼자라면 잠시 머리를 뉘어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겠다.
글·사진 김기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