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을 전공한 유수진 대표는 2020년부터 전시 공간 ‘뮤지엄 헤드’와 프리미엄 티 브랜드 ‘델픽’의 쇼룸을 운영해 왔다. 주거 건물에 둘러싸인 2층 규모의 건물로, 1층에서는 다양한 아티스트와 합을 맞추고 2층에서는 찻집을 운영하며 국내 공예 작가를 발굴해 소개하고 있다.
문화와 취향의 중요성에 관해 꾸준히 말해 온 그는 이제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파스닙스’를 선보이며 리빙 큐레이터로 나섰다. 나지막한 한옥이 늘어선 북촌 계동길, 이웃하고 있는 두 건물은 삶을 풍부하게 가꾸는 데 필요한 물품을 소개하는 데서 나아가, 이를 향유하는 방식을 제안한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유수진 대표는 어떤 연유로 갤러리, 찻집에 이어 라이프스타일숍까지 론칭하게 됐을까. 그를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Interview with
유수진 파스닙스·델픽·마녹 대표
ㅡ 미술을 전공했다고 들었습니다. 라이프스타일숍 ‘파스닙스’을 오픈하기 전부터 북촌에서 ‘뮤지엄헤드’와 찻집 ‘델픽’을 운영해 오셨죠.
영국 런던에서 현대미술을 공부하며 유학 생활을 꽤 오래 했는데요. 미술계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물론, 오랜 시간 타지 생활을 하며 다도와 소소한 인테리어 꾸미기로 위안을 얻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국내로 돌아와 내가 누렸던 풍부한 감정과 문화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 브랜드를 론칭하게 됐어요. 직접 거주하던 집을 리모델링해 공간을 만든 거라 입지 선정에 큰 배경은 없고, 이 지역이 익숙했을 뿐입니다. 건물 골조를 최대한 유지하고 공간 동선과 층별 구성에 더 집중했는데요. 건물 자체를 복합 문화 공간으로 기획한 것은 아니고, 개별의 층이 독자적인 정체성을 가지길 바랐거든요. 사실 건물 1층에 있는 갤러리인 뮤지엄헤드를 먼저 기획하고 2층에는 찻집을 곁들여 보자는 생각으로 시작했는데 델픽이 생각보다 많은 사랑을 받게 된 거예요. 전시 공간이 퇴색되지 않으면서도 차를 마시는 경험이 극대화될 수 있도록 층별 마감재를 달리해 공간 분위기를 완전히 다르게 조성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죠.
ㅡ 델픽에서도 다기를 중심으로 한 공예품을 만나볼 수 있었는데, 이제는 파스닙스라는 라이프스타일숍으로 더 다양한 제품군을 소화하게 됐어요. 구상했던 편집숍의 모습이 있나요?
파스닙스에서는 주로 가구, 조명, 패브릭 중심의 크고 작은 생활용품과 소품 전반을 다루는데요. 단순히 제품을 나열하는 방식보다 ‘이 공간이 정말 내 집이라면?’이라고 가정하고 공간을 연출하고자 했어요. 요새 1인 가구가 역대 최대라는 소식과 함께 주거 공간 불안정에 대한 이슈가 들려오잖아요. 내 집이 아닌 이상 벽에 못질하고 입맛대로 시공하는 게 쉽지 않을 텐데요. 저도 유학 생활 내내 이런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오직 소품과 가구만으로 집을 아늑하게 연출하는 방법에 대해 늘 고심했거든요. 파스닙스의 오프라인 공간으로는 온라인에서 판매하는 가구나 조명, 패브릭 등 크고 작은 리빙 제품을 이런 식으로 연출해 보면 어떨까? 활용 방식에 대해 더 효과적으로 보여주려고 노력했어요. 공간 자체를 화려하게 단장하기보다 소품과 가구만으로 공간에 변화를 줄 수 있다는 걸 보여드리고 싶었거든요.
ㅡ 파스닙스의 경우 어떤 타깃을 고려하고 브랜딩했는지 궁금해요.
취향과 미감은 살면서 좀 더 뚜렷해지기 마련이잖아요. 다양한 제품을 소비하고 경험해 보며 본인이 뭘 선호하는지 더 명확히 알게 되는 것 같은데요. 파스닙스는 어떤 취향을 가진 사람을 특정하고 조성한 공간이라기보다, 취향의 가능성을 열어둔 공간이라고 볼 수 있어요. 예전에 미술을 할 때 작업을 하면서 욕심이 나서 많은 걸 보여주고 싶었는데, 그것 때문에 되레 매력이 반감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적정선에 대해 고민하는 습관이 브랜드에도 자연스럽게 묻어난 것 같아요.
ㅡ 총 2층 규모인 건물의 층별 특징과 포인트를 짚어주신다면요?
1층은 작은 리빙 용품과 아기자기한 소품을 다루는 선물숍이고요. 이어지는 2층은 큼직한 가구, 조명, 패브릭 제품 위주로 배치된 쇼룸입니다. 2층은 구획을 두 곳으로 나눠서 기획했는데요. 바닥재로 구분하면 쉬워요. 한 편은 에폭시로 마감한 바닥이고 또 다른 곳은 바닥에 카펫을 깔았거든요. 상상하기 나름이지만, 카펫이 깔린 곳에는 좀 더 오래된 빈티지 가구나 원목 제품을 주로 비치해서 아늑하고 따뜻한 서재 느낌을 연출했다면, 온통 흰 벽체에 둘러싸인 공간에서는 화사한 거실의 분위기를 냈어요.
ㅡ 벽면이 대체로 흰색이라 가구가 더 돋보여요. 오롯이 가구와 소품으로만 채운 곳이라 누군가 실제로 살고 있는 방에 방문한 인상이었고요.
공간이 넓고 제품이 좋으면 뭘 해도 근사할 것으로 어림짐작하기 쉬운데요. 재료가 아무리 좋아도 배치나 배색에 따라 같은 제품이 천차만별로 달리 보일 수 있잖아요. 저희의 방식이 정답은 아니지만, 공간에 별다른 벽체나 구획을 나누는 파티션을 배치하지 않은 것은 군더더기 없이 제품의 강점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쇼룸 안에 자연광이 넉넉히 드는 점도 아늑한 방의 분위기를 배가하는 요소라고 생각해요.
ㅡ 한편, 지난 9월 파스닙스 건물 1층에 디저트 브랜드 ‘마녹(Manok)’까지 연달아 오픈하기도 했어요. 원래 파스닙스의 전시 공간으로 활용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공간의 용도를 바꾼 이유는 무엇인가요?
마녹은 원래부터 그 자리에 오픈할 예정이었는데, 예상보다 파스닙스 오픈 시기가 앞당겨지며 저희와 협력하는 작가님들을 잠시나마 소개할 수 있는 전시 공간으로 꾸몄었어요. 마녹이 오픈하며 이제야 공간 목적을 달성한 셈인데요. 티 브랜드인 델픽을 운영하면서 음용하는 문화에 대해 다뤘다면 이제는 마녹을 통해 한국 식재료로 만든 디저트를 선보이고자 했어요. 브랜드 이름은 스페인어로 ‘손’을 의미하는 ‘마노(mano)’에서 착안했고, 한국적인 재료로 손수 만든 디저트라는 의미를 담았어요.
아예 이전에 없던 메뉴를 만들기보다 친숙한 재료를 어떻게 달리 보여줄 수 있는지를 고민했는데요. 쑥, 유자, 옥수수, 미나리 등을 주재료로 한 마들렌과 커피, 차 등을 함께 즐길 수 있도록 했죠. 패키지 역시 오동나무 소재를 적용해 조금 더 전통적이고, 오래된 멋을 보여주고자 했고요. 공간은 전반적으로 어두운 톤으로 구성했는데, 파스닙스와 같은 건물에 위치하지만 다른 기능을 하는 공간임을 암시했어요.
ㅡ 델픽, 파스닙스, 마녹. 총 세 가지 브랜드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사용성을 배제한 미감은 지향하지 않아요. 우리 브랜드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발맞춰 나갈 수 있는지 가장 고민하고 있습니다. 델픽은 좀 더 쉽고 문턱이 낮은 프리티엄 티 문화를, 파스닙스는 오래도록 사용 가능한 리빙 용품을, 마녹은 우리 것을 조금 더 이색적으로 즐기는 방식을 다룬다는 점에서 사용자에게 방점을 둔 ‘지속 가능성’에 집중한다고 볼 수 있어요.
ㅡ 앞으로 파스닙스가 어떤 편집숍으로 자리매김하길 바라나요?
높은 가격대의 제품이 고품질일 가능성이 크겠지만, 저는 좀 더 합리적인 가격대로 소비자의 구매 리스크를 덜어드리고 싶어요. 파스닙스를 통해 내가 어떤 취향을 가진 사람인지, 뭘 구매하고 이용할 때 기쁨을 누리는지 좀 더 선명하게 느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TPO
유수진 대표가 파스닙스를 준비하며 영감을 얻은 공간
영국 유학 시절 사우스 켄징턴에 위치한 ‘콘란샵’을 굉장히 좋아했는데요. 콘란샵을 세운 콘란경은 ‘좋은 디자인은 사람들 삶의 질을 개선한다’는 믿음을 널리 전파했어요. 저 역시 그의 가치에 공감했고요. 그 당시는 우리나라에 디자인가구가 생소하고 ‘라이프스타일’이라는 단어도 어색하던 시절이었는데요. 언젠가는 우리도 예쁜 찻잔에 차를 마시고 일상적으로 향초를 피우며 취향이 가득 담긴 아름다운 라이프스타일을 누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소망했습니다.
파스닙스
장소 파스닙스
주소 서울 종로구 계동길 84-3
운영 시간 11:00~20:00(월-일)
기획 파스닙스
공간 디자인 히든잼(고건하 건축가)
시공사 히든잼
면적 148㎡
*3편에서 계속됩니다.
글 김세은 객원 기자
사진 강현욱
자료 제공 및 협조 파스닙스
프로젝트 캐비닛은 참신한 기획과 브랜딩, 디자인으로 트렌드를 이끄는 프로젝트를 소개하는 헤이팝 오리지널 시리즈 입니다. 격주 목요일, 영감을 주는 프로젝트들을 꺼내 보세요.
[Project Cabinet] 북촌 한옥 곁에 자리 잡은 라이프스타일숍, 파스닙스
: file no.2 : 삶의 방식을 다지는 길목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