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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27

잘 그리고 싶은 마음, 일러스트레이터 최환욱

부지런한 손길에서 탄생한 섬세함
2023 현대 크리스마스 시즌 키 비주얼 - 해리의 꿈의 상점 © 최환욱

시즌의 분위기를 더해주는 그림이 있다. 최환욱 작가의 그림이 그렇다. 작은 부분까지 정밀하게 묘사한 동판화가 떠오르는 그의 그림은 특히 올해 겨울,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앞둔 사람들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일상의 오브제들이 모여 특유의 환상적인 분위기를 내는 최환욱 작가의 그림은 벽에 붙여 두고 계속 보게 만드는 매력까지 있다. 과연 이런 그림은 어떻게 그리는 걸까? 최환욱 작가를 만나서 대화를 나눴다. 역시나 여러 브랜드의 러브콜을 받고,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그림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더 잘 그리고 싶다는 마음으로 자기 그림을 끊임없이 복기하고 노력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Interview with 최환욱

─ 시각디자인을 전공했다고 들었어요. 디자이너가 아닌 일러스트레이터가 된 이유가 있을까요?

디자인을 잘하고 싶었는데 서체 같은 디자인의 요소를 잘 다루지 못했어요. 그래서 관련 분야 중에 잘할 수 있는 걸 찾아다녔죠.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해서 일러스트레이터를 하면 어떨까 싶었어요. 큰 계획을 세우고 시작한 건 아니에요.

─ 졸업하자마자 뉴욕타임스의 삽화 작업을 했어요. 시작하는 입장에서 큰 프로젝트를 받은 셈이죠.

연락받았을 때, 엄청나게 큰 프로젝트라고 생각해서 망설였어요. 그런데 뉴욕타임스에서 우리도 그저 일간지뿐이고 예산도 넉넉하지 않으니 부담 가지지 말고 편하게 진행하자고 설명하더라고요. 경험이 적은 일러스트레이터와의 작업이라 잠재적인 리스크가 있었을 텐데 오히려 저를 다독이며 진행하는 걸 보며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뉴욕타임스와의 삽화 작업. 첫 상업 프로젝트였다. © 최환욱

─ 작가님의 그림을 보면 옛날 그림이 생각나면서 따뜻한 기분이 들어요. 식물도감에서 본 식물화가 생각나기도 하고요.

대림과 프로젝트를 하면서 제 그림체에 동판화 느낌을 더해서 작업해달라는 요청이 있었어요. 연구해서 시도해 봤는데 생각보다 잘 표현되었어요. 심지어 기존보다 작업 시간이 단축되는 효과가 있어서 그때부터 그림체를 바꿨어요.

2021년 현대백화점 홀리데이 시즌 키 비주얼. 한 편의 동화같은 그림에 크리스마스가 귀엽고 따뜻해졌다. © 최환욱

인스타그램비핸슨에 올라온 작업을 보니 그림체가 꾸준히 변화하더라고요.

두 차례 정도 큰 변화가 있었어요. 초기에는 미국 코믹스 스타일이었고, 그다음엔 텍스처를 살려서 손 그림과 디지털 그림의 중간 느낌을 내고자 했어요. 그런데 생각보다 작업 시간이 오래 걸리고 그리기가 힘들었어요. 그러던 중 동판화 느낌을 더한 지금의 그림체가 훨씬 더 작업하기 수월해서 바꿨어요. 이렇게 변화하는 중에도 오브제를 활용한다는 점은 유지하고 있어요.

─ 제가 작가님의 그림을 보면서 발견한 특징이 있어요. 그중 하나가 그림 한 장에서 이야기가 읽힌다는 점이었어요. 그래서 작은 요소까지 들여다보게 돼요.

프로젝트 의뢰가 들어오면 먼저 전체적인 이야기를 들어보고 거기에 제 나름대로 재미있는 상황을 더하려고 해요. ‘이런 시대와 환경이라면 이런 게 있으면 재미있겠다!’ 하고요. 배경은 자유롭게 그려도 되기에 제가 재밌겠다고 생각하는 요소로 채우려고 해요.

구찌가옥 애플리케이션에 적용된 이미지. 구찌의 제품과 각 도시의 랜드마크를 작가의 시선으로 해석해서 배치했다. © 최환욱

─ 제가 말하고 싶었던 또 다른 특징이 오브제였어요. 뭔가 안 어울리는 오브제들이 묘하게 잘 어우러져 있어서 초현실적인 분위기가 느껴져요.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방향에서 너무 벗어나지 않는다면, 정석대로 하는 것보다 살짝 안 어울리는 오브제를 함께 두는 것이 재미있다고 생각해요. 또, 브랜드와의 협업이라는 작업 특성 덕분에 더 부각되는 것 같아요. 제 그림은 오래된 그림처럼 보이지만, 진짜 주인공은 지금 시대에 탄생한 브랜드잖아요. 이런 시간적 간극이 안 어울리지만, 어울리는 오브제의 조합으로도 전달된다고 생각해요.

─ 그러면 오브제를 조합하는 작가님만의 방법이 있나요?

먼저 클라이언트에게 브랜드 이미지를 위해 활용하는 오브제가 있다면 최대한 많이 달라고 요청드려요. 그리고 클라이언트가 생각하는 스타일, 이미지 등을 참고해서 오브제를 찾아요. 브랜드에 관한 자료가 많을수록 모티브가 명확해져서 오브제를 찾고, 조합하기 수월해요.

히가시노 게이고의 개정판 표지 작업. 각 책에 등장하는 주요 사건과 오브제를 모티프로 아름다우면서도 섬뜩한 이미지를 만들었다. © 최환욱

─ 그림을 그릴 때,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세요?

그림의 주제가 한 번에 보이고 컨셉을 명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러기 위해 작업하는 동안 계속 주제를 되새기고, 작업 순서를 잘 지키려고 해요. 그래야 클라이언트의 요청을 반영하거나, 갑작스러운 수정 요청에도 당황하지 않고 컨셉을 유지할 수 있거든요.

경복궁 교태전에 크리스마스트리가 세워진다면? 이렇게 아름다운 트리가 만들어집니다. © 최환욱

─ 현대백화점 크리스마스 시즌 키 비주얼, 더 히스토리 오브 후의 크리스마스 시즌 그리팅 등. 올겨울에는 많은 곳에서 작가님의 그림을 만날 수 있었어요.

현대백화점은 여름부터 작업을 시작했는데, 정확하게 원하는 분위기가 있으셨어요. 그를 위해서 곳곳에 장식적인 오브제를 많이 추가했죠. 더 히스토리 오브 후는 ‘경복궁 교태전에 동양풍의 크리스마스트리가 있는 풍경’을 원하셨어요. 한국적인 것을 잘 표현한다는 게 제일 어려운 일이라서 이번 작업을 하면서 뭔가 큰 과제를 해결했을 때의 뿌듯함을 느꼈어요.

DL 이엔씨의 드림하우스 키비주얼 작업. 그림체가 변하는 계기가 된 프로젝트다. © 최환욱

─ 지금까지 매우 다양한 브랜드와 협업했는데,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가 있다면요?

대림과의 작업이 기억에 남아요. 지금의 그림체로 변화하는 계기이기도 했고, 클라이언트에게 에너지를 얻는 경험을 처음 해봤거든요. 임직원분께서 직접 디렉팅에 참여하시고, 다 활용할 수 있으니 그림을 많이 그려도 좋다고 할 정도로 열정적이었어요. 덕분에 저 역시 에너지를 얻어서 즐겁게 작업했어요.

─ 그림체가 변한 경험이라고 하니까 궁금해졌어요. 그 어렵다는 그림체 변화를 세 번이나 하셨잖아요? 왜 그림체를 바꾸겠다고 생각하셨나요?

‘이 그림체로는 만족스럽지 않다.’와 ‘사람들이 좋아할 것 같지 않다.’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또, 작업의 효율성도 중요한 문제였어요. 좋아서 그림을 그리지만, 일이기 때문에 더 수월하게 작업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어요. 다행히 지금 그림체는 상대적으로 지난 그림체들보다 작업 시간이 단축된다는 장점이 있어서 작업하기 편해요. 다만, 앞으로 더 나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고민돼요. 작업하고 나면 항상 ‘이번엔 더 잘할 수 있었는데.’라고 생각하거든요.

─ 작업에 관한 성찰이 깊은 편인가 봐요. 하지만 그 태도가 작업과 실력 향상에 도움되었죠?

내 그림을 보면서 더 잘하고 싶다는 마음은 다른 작가의 그림을 보면서 ‘저렇게 그리고 싶다.’고 느끼는 감정이랑 다른 것 같아요. 학생 때는 다른 작가의 그림을 보고 부러워했다면 지금은 제 그림에 집중하고, 더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여러 자료를 보며 새로운 방향을 연구하기도 해요.

책 표지 작업. 마법사가 운영하는 빵집에 우연히 들어간 소년의 이야기를 트럼프 카드에 적용해서 풀어냈다. © 최환욱

─ 사람들의 피드백을 듣고 힘을 얻는 작가도 있는데 작가님은 어떠세요?

책 <위저드 베이커리>의 크리스마스 한정판 표지를 작업할 때 느꼈어요. 마니아층이 두터운 책이라서 저와 출판사 모두 잘하고 싶었거든요. 출간하고 나니까 SNS에 긍정적인 댓글이 엄청나게 달리는 거예요. 일러스트레이터는 대중과 직접 만날 기회가 적어서 잘 몰랐는데, 사람들의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으니까 힘이 나더라고요.

─ 작업에 영향을 준 그림이나 작가, 상황이 있나요?

18~19세기에 실용 목적으로 그린 그림에서 영향을 많이 받아요. 식물을 그려도 정물화가 아닌 도감에 들어가는 표본 같은 그림이 좋아요. 또, 옛날 건축가들이 그린 그림을 모은 화집을 보면서 아이디어를 얻기도 해요. 묘사가 섬세하고 구도가 좋거든요. 저는 인터넷보다 관련 서적이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일반적으로 인터넷에 자료가 많다고 생각하지만, 업로더 몇 명에 의해서 자료의 양과 질이 정해지는 것 같거든요.

아모레퍼시픽 베리떼 패키지 작업. 천일야화가 생각나는 신비한 이미지로 표현했다. © 최환욱

─ 작가님 일상을 물어보려고 해요. 평소 루틴이 어떻게 되나요?

직장인처럼 아침 9시에 강아지 산책을 다녀와서 책상에 커피 한 잔 두고 작업을 시작해요. 저녁 6~7시에는 딱 끝내요. 작업량이 많으면, 밤을 새우는 것보다 다음날 일찍 일어나서 평소보다 빠르게 작업을 시작해요. 저녁엔 녹초가 되기 때문에 효율이 안 나기도 하고, 정해진 루틴을 안 지키고 무리해서 작업하는 건 앞으로 계속 그림을 그려야 하는 사람에겐 오히려 좋지 않다고 생각해서요.

─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한 지 14년이 되었어요. 긴 시간 동안 작업할 수 있었던 비결은 뭘까요?

특별한 노하우가 있었던 건 아니에요. 5~6년 차까지는 걱정하고 헤매면서 그림을 그렸던 것 같아요. 저는 거창한 계획이 있는 편도 아니었고, 그림으로 돈을 버는 게 생각보다 좋아서 버틴 것 같아요. 그럼에도 한 가지 떠오르는 건 자기에게 맞는 생활 루틴을 찾고 지키는 거예요. 혼자 작업하다 보면 이상하게 20분씩 계획이 늦춰지면서 시간이 겉돌게 되는 경험을 하게 돼요. 루틴을 잘 지키면 이런 경우가 생기지 않더라고요.

─ 그렇다면 요즘은 작업할 때, 어떤 생각을 하나요? 10년을 매일 같이 작업해도 생각은 끊이지 않잖아요.

더 잘 그리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요. 한 단계 더 성장하고 싶고, 효율성도 높이고 싶어요. 그래서 지금까지 사용했던 그림 요소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퀄리티를 높이려고 해요. 또, 요즘 다들 말하는 AI를 활용해서 그림 자료를 만들어볼까, 생각 중이에요.

─ 요즘은 일러스트도 유행을 타고, 그 기간도 매우 짧아졌어요.

그래서 아니라고 생각되면 빨리 변화와 진화를 해야 하는 것이 저희 직업의 특성인 것 같아요. 작업이 많이 노출되었다고 걱정하기보단, 가진 재능을 최대한 쏟아낸 후에 빨리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들어요.

2022년 투썸플레이스 크리스마스 시즌 키 비주얼. 최환욱 작가의 그림은 연말을 더 특별한 시간으로 만드는 마법이 있다. © 최환욱

─ 연말이니까 흔한 질문 하나 할게요. 내년 목표는 뭔가요?

앞서 말한 것처럼 지금까지 작업했던 내용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생산성을 높이는 거요. 그래서 반복해서 사용했던 소스들을 업그레이드해서 더 풍성하게 준비하려고 해요. 내년에는 작업하면서 ‘준비를 잘해 놨더니 작업이 수월하고 그림도 좋군’이라고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 그렇다면 저도 질문을 업그레이드할게요. 작가로서 목표는 무엇인가요?

전에는 큰 프로젝트를 해보고 싶었는데, 이젠 프로젝트의 크기보다는 그림을 잘 그리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해요. 지금은 그림을 잘 그리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요.

허영은 객원 기자

취재 협조 및 자료 제공 최환욱 작가

허영은
다양성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든다고 믿는다. 그래서 숨겨진 이야기들을 찾아내서 보고, 듣고, 읽고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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