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장소를 돌아다니는 것도 흥미롭지만 한곳에 진득하게 머물며 그 공간을 속속들이 탐색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잠깐 들르면 지나치기 쉬운 것들을 그러안을 수 있으니, 시간이 지나도 머물렀던 공간에 대한 기억은 선명하게 남을 것이다. 지난주 ‘Destination Stay’시리즈로 소개한 아파트먼트풀 스테이 포룸스가 자리한 건물 ‘에케’는 부산 달맞이길 언덕을 밝히는 복합문화공간이다. 고요한 달맞이 동네에 사람들을 끌어모아 활기를 불어넣는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아파트먼트풀 스테이에서 하룻밤을 지내며 지켜 본 에케는 달맞이길의 다른 스폿에 가지 않고 이곳에서만 하루를 보내더라도 아쉽지 않을 만큼 즐길 거리가 많았다. 상점과 상점 사이를 메우고 있는 조경을 보는 재미도 있다.
에케는 독일어로 ‘모서리’를 뜻한다. 이름처럼 모퉁이 삼각형 부지에 세워진 에케는 평지가 아닌 언덕에 뿌리내렸다. 자칫하면 출입이 번거로울 수 있는 지리적인 특징을 가졌지만 에케 설계를 맡은 라라호호 건축사사무소는 어느 위치에서든 건물에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내 순환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그 덕에 자유롭게 바람이 건물을 가로지른다. 또 건물 1, 2층 상점 문을 투명한 유리로 만든 덕에 ‘복합문화공간’이라는 단어가 지닌 의미처럼 이곳이 모두에게 허락된 공간임을 디자인적으로 잘 보여준다. 지하 1층 지상 5층 규모로 조성되어 현재 9개의 브랜드가 공간에 입주해 에케를 빛내고 있다. 지난 10월 모습을 드러낸 이 건물에는 어떤 공간으로 채워져 있을까? 더 유심히 살펴보면 좋을 네 곳을 꼽았다.
이른 아침 에케에 도착하면 진한 계피향을 맡게 된다. 1층 정문 입구에 자리 잡은 사이에 베이크숍에서 굽는 시나몬롤의 향기다. 사이에는 1인이 운영하는 베이크숍으로, 소소한 빵과 구움과자를 내어준다. 알고 보면 이곳은 해운대에서 익히 이름을 알렸던 모루과자점을 운영한 이력이 있는 대표가 처음으로 혼자서 운영하는 베이크숍이다. 대표는 주로 주방에 머물며 빵 만드는 일에 몰두하지만 손님이 찾으면 금방이곤 마중 나와 카운터를 지키는 직원과 함께 따뜻한 미소로 응대한다. 성인 여섯 명이 들어가면 꽉 찰 정도의 규모로 오래 머무르기에는 협소한 공간이지만 대표의 감성으로 채워진 주방을 감상하는 재미가 있다.
재료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 유기농 밀가루를 고집하는 사이에에서는 레몬 케이크, 파운드케이크, 바나나브레드, 초코샌드쿠키 등을 맛볼 수 있다. 가게가 문을 여는 오전에 방문한다면 갓 나온 시나몬롤과 커피가 함께 나오는 모닝세트를 맛보기를 추천한다. 시중의 시나모롤보다 덜 달아 담백하고 시나몬 향이 진하게 나는 게 이곳만의 특징이다. 오전에만 한정으로 판매되어 시나몬롤을 먹기 위해 아침부터 에케에 방문하는 이도 여럿 볼 수 있었다. 테이크아웃 시 포장되어 나오는 용기에서도 사이에의 센스가 느껴지니 자리가 없다면 포장해 먹어도 좋다. 하루에 딱 적정량만 판매해 매장 마감 시간 전에 문을 닫기도 하니, 되도록 마감 3시간 전에는 가보도록 하자.
낮에는 규동 정식, 밤에는 스키야키 코스를 먹을 수 있는 일식당 오라스키. 김해평야에서 직접 수확한 쌀을 판매하는 브랜드 ‘오라’에서 비롯된 가게다. 에케 1층 중정을 지나 오른쪽 문을 열고 들어오면 최대 여섯 명이 앉을 수 있는 바 테이블을 마주하게 된다. 한국인 아내와 일본인 남편 부부가 운영하는 이곳은 내부에 창이 없어 낮에 방문해도 편안하게 어둡다. 대나무 소쿠리, 대나무 젓가락 받침 등 바라만 봐도 기분이 좋아지는 디테일도 여럿 발견할 수 있다.
부부는 에케에서 오라스키를 선보이기 전 달맞이길에서 와인바를 운영했다. 지금은 저녁에만 코스요리와 함께 셀렉한 와인을 선보이고 있다. 바 테이블 시야에서는 담기지 않는 주방에서 남편이 음식을 만들면 아내는 손님을 맞이하고 완성된 요리를 각종 찬과 함께 내어준다. 오픈 시간인 오후 12시에 맞춰 오라스키를 방문해 규동 정식을 맛 보았다. 이미 두터운 팬층을 보유하고 있는 ‘오라’를 운영한 이들의 노하우인지, 오라의 시그니처이기도 한 아로마라이스와 고기의 조합이 조화로웠다. 쌀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규동이라는 메뉴를 선보이게 됐다는 부부의 이야기가 납득이 가는 맛이다. 산초가루와 일곱 가지 향신료를 블랜딩한 가루를 뿌려서도 먹어보자. 금세 그릇을 비우게 될 테다.
에케 정문과 제일 가까운 곳이자 해가 가장 잘 드는 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이름에도 나와 있듯 에케.we는 에케가 직접 운영하는 팝업 공간이다. 작가의 전시가 열리기도 하고 브랜드 팝업이 진행되기도 한다. 공간 에케가 문 연 지 석 달이 되는 동안 이곳의 콘텐츠도 세 번 변경되었다. 콘텐츠가 빠르게 바뀌는 만큼 다양한 사람을 에케에 불러들이는 역할을 하는 중이다. 아파트먼풀 스테이에 묵는 여행객뿐만 아니라 달맞이 언덕을 방문하는 모든 이들에게 지속적으로 흥미를 주는 팝업 공간이다. 에케에 방문했던 시기 스튜디오 얀의 팝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아침부터 이 팝업을 보기 위해 에케를 찾은 사람들이 상당했다. 스튜디오 얀은 부산에서 출발한 로컬 브랜드이자 독특한 일러스트로 특히 3040 여성들에게 인기가 높은 브랜드라는 것을 현장에서 보지 않았다면 미처 체감하지 못했을 테다. 에케.we에서는 깊이 알지 못했던 작가나 부산 지역에서 유명한 브랜드를 만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불어로 직물의 표백, 염색하지 않은 자연색, 천연 상태를 나타내는 에크루(ecrue). 사물의 순수함을 추구한다는 의미를 담은 이 단어를 이름으로 삼은 가게 에크루는 국내외 공예 작가의 작품과 도자기, 빈티지 오브제를 판매한다. 부산을 대표하는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크리에이터라 불리는 이효진 대표가 운영하는 이곳은 해운대 명소 중 하나인 대림맨션에서 시작한 후 에케로 거처를 옮겼다. 이효진 대표는 에크루를 만들기 전 생활소품 브랜드 ‘코코로박스’를 만들어 이름을 알린 바 있다. 에크루에서는 여행이나 출장을 다니며 모은 빈티지 가구와 소품,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조명한다.
내부에 들어서면 보편적으로 떠올리는 편집숍과는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수집품을 한데 모아 전시한 듯 각기 다른 브랜드임에도 불구하고 관통하는 따뜻한 분위기가 있다. 단정한 소품을 좋아한다면 들러볼 만하다.
운영 시간 12:00 – 17:00(월요일 휴무)
글·사진 김지민 기자
장소
에케(ECKE)
주소
부산 해운대구 달맞이길117번가길 219 ECKE
기획자/디렉터
기획 | 이효진(에크루)
크리에이터
건축 | 라라호호 건축사사무소, 구조 | 플러스구조, 시공 | 대정건설, 조경 | 이대길, 정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