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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30

‘미래’ 대신 ‘과거’를 지향했던 이탈리아의 브루탈리즘 건축물들

이탈리아의 오래된 노출 콘크리트 건물들을 기록한 화보집 〈Brutalist Italy〉
잿빛의 노출 콘크리트. 레고 블록을 쌓은 듯 분할된 모듈식 공간들. 직선 사이로 기하학적인 선들이 교차하는 기이한 형태. 20세기 중반부터 후반까지 지어진 브루탈리즘(Brutalism) 건축물들은 거대하고, 삭막하며, 이전 시대의 전통이나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그런 특징에서 나오는 거친 미감과 독특한 분위기가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키기도 한다.
부스토 아르시치오에 있는 공동묘지 기념공원 내 건축물. 건축가 Luigi Ciapparella. 1971년. 이미지|FUEL Publishing/Stefano Perego
토리노에 있는 구세주 성당. 건축가 Nicola Mosso, Leonardo Mosso, Livio Norzi. 1954-1957년. 이미지|FUEL Publishing/Stefano Perego

브루탈리즘은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유럽을 중심으로 확장했다. 전쟁이 끝난 후 빠른 재건이 필요했던 상황은 기능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인 브루탈리즘이 확산하기에 적합했다. 합리적인 디자인이 곧 최고의 디자인이라는 모더니즘 건축 사조의 지향점과 맞물려 확장하기 쉬운 모듈식 건물들이 지어졌다. 철근과 콘크리트, 벽돌은 장식을 더하지 않은 채 구조와 속성을 그대로 노출시켰다. 그래서 브루탈리즘은 한편으로 동구권 국가들이 공동주택, 학교, 도서관, 극장, 교회 등 대형 공공 건물을 짓는 데에도 활발하게 쓰였다. 하지만 1980년대에 이르러 흐름이 변했다. 집단보다 개인을 중시하는 개인주의가 사회의 중심에 자리잡았고, 노후화한 노출 콘크리트 건물들이 보기에 흉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전후 폐허가 된 유럽에서 많은 사람들을 빠르게 수용했던 브루탈리즘 스타일의 건물들은 역설적이게도 다시 빠르게 폐허가 되는 운명을 맞았다. 그리고 21세기에 ‘네오 브루탈리즘(Neo Brutalism)‘ 트렌드가 다시 찾아오기 전까지 주류적인 호응을 얻지 못했다.

시칠리아 이스피카에 있는 미완공 건물. 이미지|FUEL Publishing/Roberto Conte
산투아리노 델라모레 미제리코르디오소 단지 내 광장에 있는 반원형의 거대한 콘크리트 벤치. 움브리아 토디에 있다. 건축가 Julio Lafuente. 1953-1974년. 이미지|FUEL Publishing/Stefano Perego

하지만 시대의 흐름이 변화하는 가운데서도 현대사와 맞물려 독특한 고유의 정체성을 발전시킨 곳도 있다. 파시스트 건축의 잔영이 남아있던 이탈리아다. 디자인 전문 출판사 퓨엘 퍼블리싱(Fuel Publishing)이, 1950년대부터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나름의 방식으로 성숙했던 이탈리아의 브루탈리즘 건축물들을 기록한 사진집 〈브루탈리스트 이탈리아(Brutalist Italy)〉를 공개했다. 퓨엘 퍼블리싱은 20세기 중반 러시아 지역 범죄자들이 몸에 새겼던 상징적인 타투들을 모은 〈러시아 크리미널 타투(Russian Criminal Tattoo​)〉 시리즈, 유럽과 중앙아시아 등지에 남아있는 구 소련 시기에 만들어진 공공 건축물들을 조명한 〈소비에트 메트로 스테이션(Soviet Metro Stations)〉과 〈소비에트 버스 정류장(Soviet Bus Stops)〉, 소련 주민들에게 배급되었던 시골 별장의 역사와 미감을 기록한 〈다챠(Dacha)〉 등의 화보집을 꾸준히 만들며 소련 시대의 미학을 탐구해온 출판사다.

 

〈브루탈리스트 이탈리아〉에 실린 건축물들은 대부분 1960년대에서 1980년대 사이에 지어진 것들이다. 여전히 사람이 살거나 쓰며 유지보수되는 곳들도, 철거 중이거나 폐허로 남은 지 오래된 곳들도 있다. 이탈리아의 건축 사진작가 로베르토 콘테(Roberto Conte)와 스테파노 페레고(Stefano Perego)는 이 프로젝트를 위해 5년 동안 이탈리아 반도 총 2만여 킬로미터를 횡단했다. 그리고 100개가 넘는 건물들을 촬영해 146컷의 사진들을 책에 실었다.

주세페 페루지니(Giuseppe Perugini)와 우가 드 플레산트(Uga de Plaisant)의 실험적인 건물 카사 스페리멘탈레(Casa Sperimentale)는 로마 근교 해변 마을인 프레제네에 있다. 짓는 데 7년이나 걸린 이 기하학적인 형태의 건물은 모듈식으로 확장할 수 있게 설계된 것이 특징이다. 건축가 사망 후 파손되고 낙서로 뒤덮이는 등 폐허가 되었으나, 현재는 과거의 형태를 기록으로 남기기 위한 디지털 복원 작업이 진행 중이다. 1968-1975년. 이미지|FUEL Publishing
브루탈리즘 스타일의 건물들 중에는 이처럼 계단 형태를 적용한 공동주택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제노바에 있는 ‘세탁기(La Lavatrice)’라는 이름의 이 아파트에는 총 500여 가구가 거주할 수 있다. 일부는 공공임대 세대이며 일부는 민간에 분양됐다. 모듈식 구조로, 각 큐브 형태의 공간마다 원형의 창문이 달려 있다. 3개 건물이 하나의 단지로 연결되어 있다. 1980-1990년. 이미지|FUEL Design & Publishing/Stefano Perego

책은 미니멀한 미학을 추구하고 구조적인 요소를 강조하는 브루탈리즘이 이탈리아에서는 역사적인 영향으로 조금 다르게 진화했다고 말한다. 당시 이탈리아 건축계가 모더니즘의 실용주의와 합리주의를 받아들이면서도, 파시스트 시대의 건축과 겹치는 전체주의적 요소와는 거리를 두려 했다는 설명이다. 건축가들은 신뢰할 수 있는 사료들을 바탕으로 브루탈리즘에 전통적인 건축법과 재료를 함께 사용하는 고유의 건축 스타일을 만들어갔다. 발상지인 영국을 비롯해 유럽, 미국, 일본 등지에서는 ‘실용’, ‘합리’, ‘미래’ 등을 상징했던 브루탈리즘 건축이, 이탈리아에서는 ‘과거’를 지향하며 발전한 것이다.

 

건축학자 에이드리언 포티는 책의 서문에서 “20세기에 콘크리트는 일반적으로 미래의 재료로만 여겨졌고, 아직 오지 않은 시대를 의미했다. 콘크리트도 과거를 갖고 있다는 사실은 강하게 부정되었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상황은 건축가들로 하여금 미래만큼이나 과거를 간절히 표현하고 싶도록 만들었다”고 소개한다.

이미지|FUEL Publishing

〈Brutalist Italy〉는 9월 중순 출간되었다. 국내에서는 예스24, 아마존 등에서 해외직구로 구입할 수 있다.

박수진 객원 필자

취재 협조 및 자료 제공 FUEL Design & Publis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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