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iefing
국립경주박물관 신라천년서고
지난해 12월 15일 국립경주박물관 신라천년서고(이하 신라천년서고)가 문을 열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이어서 두 번째로 일반인에게 공개된 박물관 도서관이다. 무엇보다 신라천년서고가 특별한 건 ‘학습 공간’이 아닌 ‘휴식 공간’이라는 기능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편하게 누워서 책을 읽는다는 뜻의 ‘눕독’을 권하는 도서관. 바로 신라천년서고만의 공간 콘셉트이다.
돌이켜보면 박물관에서 편히 앉아서 쉬어 본 적이 없다. 한정된 시간 내 전시실을 훑고 다니느라 늘 숨이 가빴다. 눈 앞에 던져진 유물을 공부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마음도 바빴다.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왜 박물관에는 휴식 공간이 없는 걸까?”. 신라천년서고는 이러한 박물관의 공간 환경에 의문을 내비친 이들을 위한 대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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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치된 수장고의 재탄생
국립경주박물관에는 오랜 기간 방치된 수장고 건물이 하나 있었다. 바로 1979년 지어진 서별관이다. 이 건물을 누가 처음 건축했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그 시기만이 전해질 뿐이다. 흥미로운 건 서별관의 외관이 박물관 부지 내 ‘신라역사관(1975년 건립)’과 일부 흡사하다는 점이다. 하얀색 콘크리트 건물 위에 전통 기와지붕을 얹은 모습. 이는 한국 현대 건축의 선구자였던 고(故) 이희태 건축가를 붙잡았던 평생의 고민과도 닮아있다. 한국의 전통 건축을 현대 건축 언어로 어떻게 재해석할 수 있을지 고심했던 그처럼 이름 없는 서별관의 건축가도 비슷한 고민을 했던 것은 아닐까 추측만 가능할 뿐이다.
건물의 출처가 불분명하기 때문인지 서별관은 국립경주박물관의 주요 동선으로부터 크게 벗어난 곳에 자리한다. 월지관 뒤 대나무 숲 아래가 바로 서별관의 자리다. 이곳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월지관의 대나무 숲을 가로질러 내려가거나 아니면 박물관 서쪽 부지에 자리한 연못 고청지를 크게 돌고 나서야 비로소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사실 서별관은 수장고이기 이전에 사무동을 목적으로 처음 지어졌다. 하지만 2008년 사무 공간을 헐고 유물을 보관하는 수장고로 개보수했고, 현재는 도서관으로 사용 중이다.
수장고 건축은 유물의 재질별로 공조 환경이 다르다. 종이, 철, 석재, 자기 등 어떤 소재로 만들어진 유물을 보관할 것인지에 따라서 건축물이 달라진다. 서별관의 경우는 처음부터 수장고를 목적으로 설계한 것은 아니었기에 기본 외부 환경을 차단하는데 주력했다. 빛, 온도, 습도 등으로부터 영향을 적게 받는 유물만을 보관할 수 있었다. 2019년 국립경주박물관은 영남권 최초의 개방형 수장고 ‘신라천년보고’를 개관했다. 이때 서별관 수장고의 모든 유물도 신라천년보고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박물관은 더 이상 유물을 보관하지 않게 된 수장고의 용도를 두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관내 관람객의 휴식 공간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휴식이 가능한 도서관 건립이 추진되었다.
도서관 건축과 설계는 김현대 이화여자대학교 건축학과 교수와 텍토닉스랩 건축사사무소 김수경 건축가가 맡았다. 이들은 1970년대 전통 한옥 구조와 현대 건축이 혼재된 외관은 그대로 유지했다. 대신 실내 공간 디자인을 도서관 기능에 최적화하는 것에 주력했다. 하지만 시작부터 장애물에 부딪혔다. 서별관 건물은 정면(가로) 5칸과 측면(세로) 3칸으로 전체 15칸의 한옥 집 형식을 갖췄다. 하지만 북측(정면 기준에서는 왼쪽 면)의 3칸을 사용할 수 없어 남은 12칸 안에서 공간을 구획해야 했다. 총 면적 510㎡ 안에서 도서관의 기본 기능을 갖추는 동시에 큐레이터와 사서의 역할과 활동이 보장되어야 하는 디자인을 만드는 것이 숙제였다. 좁은 공간이라는 인상을 탈피하기 위해 실내외를 연결하는 창을 늘렸고, 거울을 붙여 공간의 이미지를 확장시켰다. 건축가에게 유일하게 자유도가 주어진 영역은 바로 천장 구조였는데, 경남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의 서가 구조와 기둥, 보, 도리로 구성된 한옥 목가구조를 참조해 현대적 미감으로 재해석했다.
사무동에서 수장고로, 그리고 다시 도서관으로 재탄생한 서별관에는 새로운 이름이 부여됐다. 신라천년서고. 국립경주박물관의 새로운 수장고 신라천년보고와 이름의 결을 맞췄다. 천년 서고라는 이름처럼 이곳에는 경주와 신라 그리고 신라 천년의 토대가 된 불교문화에 대한 서적부터 박물관 전시 도록 자료, 유물 기록 그리고 관사 자료까지 보관한다. 신라천년서고는 도서관으로서의 기능뿐만 아니라 휴식 공간의 기능도 겸한다. “박물관에서 유물의 정보를 얻는 것도 물론 중요하죠.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박물관이라는 공간 그 자체가 관객에게 영감의 촉매제가 될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휴식 공간은 필수예요. 신라천년서고는 도서관이지만 대화도 나눌 수 있고, 커피도 마실 수 있어요. 기존의 박물관에서는 볼 수 없었던 영감과 몰입을 위한 공간이죠.” 이번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진행해 온 국립경주박물관 김대환 큐레이터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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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딩에 진심인 도서관
신라천년서고를 표현하는 키워드 중에는 ‘눕독’이라는 말이 있다. 누워서 책을 읽는다는 뜻이다. 그만큼 이곳에서는 자유로운 자세로 책을 읽을 수 있다. 누워서 책을 읽어도, 음료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눠도 누구도 제재를 가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주변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 실제로 신라천년서고의 이용규칙에는 ‘대화 가능’, ‘음료 섭취 가능’ 등의 문구가 기재되어 있다. 덕분에 이용객들은 공간을 보다 자유롭고 적극적으로 공간을 즐기고 경험할 수 있다.
“
신라천년서고는 수동적인 도서관이 아니라 능동적인 도서관입니다
”
‘눕독’이라는 말에는 신라천년서고 공간을 독자적인 브랜드로 소개하고자 하는 김대환 큐레이터의 의지도 엿보인다. 그는 신라천년서고가 단순히 도서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브랜딩이 잘 된 문화공간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비전을 정립했다. 이를 위한 롤 모델로 서울의 최인아 책방 북클럽과 일본 카도가와 무사시노 뮤지엄 그리고 츠타야 서점을 참고했다. 특히 무사시노 뮤지엄은 일본 건축가 구마 겐고가 설계하고, 내부 콘텐츠를 일본 출판사 카도가와 쇼텐이 채웠다는 점을 주목했다. 사람들의 기억에 오래도록 남는 브랜드가 되기 위해서는 공간과 콘텐츠의 경험이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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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석등의 비밀
신라천년서고의 이미지에 한몫하는 존재가 하나 있다. 바로 석등이다.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정면에 우두커니 서 있어 단번에 눈길을 끈다. 사실 처음에 석등을 놓을 계획은 없었다. 수장고 철거 공사를 진행하며 현재 석등이 놓인 곳 뒤로 창문이 발견된 덕분이다. 더욱이 창문 너머로 보이는 대나무 숲과 월지관에서 서별관을 이은 돌계단은 고즈넉한 정취를 자아냈다. 앞으로는 월정교가, 뒤로는 대나무 숲이 이어지는 정경 가운데 서가를 두기에는 아쉽고, 그렇다고 비워두기에는 어딘가 허전한 상황. 최선주 전 국립경주박물관 관장이 아이디어를 냈다. 관장실에서 보이는 고선사탑 옆에 덩그러니 놓인 석등을 두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
석등이 지닌 힘이 굉장하더라고요. 고선사탑 옆에서는 그저 왜소해 보일 따름이었는데 석등이 공간 안에 들어오니 그 존재감이 달라졌어요. 30여 년 넘게 전시를 기획하고, 유물을 다뤄오신 관장님의 탁월한 안목과 감각이라고 생각합니다.
”
신라 천년의 지식을 담은 도서관 안에 자리한 석등은 진리를 밝히는 빛이라는 상징성도 내포한다. 한 가지 비밀이 있다면 이 석등이 유물로서는 가치가 뛰어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각기 다른 시대의 출토품으로 조합된 석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등이 공간을 지배하는 힘은 상당하다. 신라천년서고의 석등에 관한 또 다른 흥미로운 해석도 있다. “한 번은 일본 츠타야 서점의 매니저로부터 메일을 받았어요. 신라천년서고 개관 소식을 듣고 가족들과 직접 찾아왔더라고요. 처음에는 건물 외관을 보고서 아무 말도 없더라고요. 어딘가 실망한 듯한 느낌이었어요. 하지만 도서관 안을 들어서자마자 깜짝 놀라더군요. 안과 밖이 다른 반전의 디자인은 혹시 일부러 의도한 거냐는 질문에 이어서 석등도 유심히 살펴보더라고요. 1970년대 건축가 미상의 건물, 용도가 두 번이나 바뀐 건축사 등 애매한 역사성이 석등이 들어오며 전부 무마되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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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다 한 신라의 이야기
석등을 기준으로 왼편에는 큐레이터와 사서가 제안하는 서적을 만날 수 있는 ‘북큐레이션’이 자리한다. 신라천년서고에의 하이라이트 공간이다. 이곳에는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최근 진행한 특별전의 주제를 다룬 책을 살펴볼 수 있다. 각 분야의 큐레이터가 엄선한 책은 전시에서 미처 다 보여주지 못한 사료와 유물 사진을 보여준다. 지난 2023년 5월 4일부터 7월 16일까지 진행한 <천마, 다시 만나다>전에서 다룬 주제 ‘천마총’이 일례이다. 특별전이 끝날 때면 새롭게 큐레이션 한 책을 선보이는데 현재는 특별전 준비 기간이기에 최근에 종료된 전시의 주제를 소개하는 도록으로 채웠다. 반대편에는 사서의 도서 큐레이션을 만날 수 있다. 도서 대출 데이터를 기반으로 현재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 도서와 주제 그리고 사서가 추천하는 도서 목록으로 서가를 채운다.
큐레이터와 사서의 제안을 둘러봤다면 자연스레 가운데 놓인 책상이 궁금해질 터. 이는 박물관의 역사를 대표하는 관사 유물이다. 신라천년서고는 관장직을 역임한 지난 관장들의 책상부터 서랍, 탁자, 의자, 필기구, 도장 그리고 저서까지 관사의 한 장면을 장식하는 물건들을 수집하고 보관한다. 무엇보다 관사의 흔적을 볼 수 있는 별도의 공간이 없기에 북큐레이션 공간은 의미가 남다르다. 세월의 풍파가 버젓이 드러난 책상을 바라보면 천년의 고도 경주의 역사와 신라 문화를 보듬은 이들이 지녔던 책임의 무게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프로젝트 캐비닛은 참신한 기획과 브랜딩, 디자인으로 트렌드를 이끄는 프로젝트를 소개하는 헤이팝 오리지널 시리즈입니다. 매주 목요일, 영감을 주는 프로젝트들을 꺼내 보세요.
[Project Cabinet] ‘눕독’ 권하는 도서관, 국립경주박물관 신라천년서고
: file no.1 : 건축가 미상의 낡은 수장고가 도서관으로?
글 이정훈 기자
사진 공정현
취재 협조 및 자료 제공 국립경주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