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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29

작가는 어떻게 뮤지엄을 생동하게 하나?

스페이스 씨 개관 20주년 기념 전시
작가라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작품이 훼손되거나 사라지는 것을 목도하는 일이 어려울 테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을 딛고 자신의 일부와도 같은 작품을 장소와 환경, 관람자에게 온전히 내맡기는 작가도 있다. 환경에 따라 쉽게 변화하는 일상적인 소재인 ‘비누’를 활용해 조각 및 오브제 작업을 하는 신미경 작가(b.1967)다.
(총 5점) 전시 전경, 비누, 프레임, 향, 안료, 각 200(h) x 160 x 5cm | 사진: 코리아나미술관 제공, 촬영: 아인아

신미경 작가는 런던 유학 시절에 경험한 이질감과 소외감에서 작업 모티프를 발견하고, 서양 고전 조각상과 동양의 도자기 등 동서양 유산에 ‘번역’을 시도했다. 여기서 번역은 대상이 맥락과 문화, 장소, 환경 등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현상을 결과가 아닌 과정에 입각해 사유한 결과물이다.

국내 최초 박물관·미술관을 관통하는 전시

신미경 작가의 개인전이 스페이스 씨(space c)*에서 열리고 있다. 전시는 스페이스 씨의 개관 20주년 기념으로 기획됐으며, 미술관과 박물관이 공존하는 공간의 특성을 최대한 살리고자 했다. 현대미술과 고미술, 동양과 서양 등 이분법적 요소들을 교차해 자신의 언어로 번역하는 작가의 작업이 공간을 관통하며 어떻게 공명하고 있을까?

*스페이스 씨는 (주)코리아나화장품이 설립한 복합예술공간이다. 한국 화장문화의 역사와 전통 화장 유물을 소개하는 코리아나 화장박물관과 현대미술 국제 기획전 및 소장품 기획전을 80회 이상 선보인 코리아나미술관으로 구성돼 있다.

 

이번 전시를 위해 신미경 작가는 코리아나미술관과 화장박물관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총 120점의 작품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데, 이중 70점은 전시에서 처음 공개되는 신작이다. 작가는 쉽게 마모되고 녹는 재료인 비누가 자신이 탐구하고 있는 ‘시간성’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매체라고 여겨 약 30년이라는 기간 동안 비누를 지속적으로 탐구해 왔다.

 

여기서 비누와 더불어 그가 탐구하는 본질적인 요소인 ‘시간성’은 뮤지엄이라는 공간의 특수성과 결부되며 맥락화와 탈맥락화라는 두 키워드를 이끌어냈다. 작가는 권위를 획득하지 않았던 사물이 뮤지엄 안에서 다른 맥락인 ‘유물’이 되는 과정에 주목했다. 그리고 비누를 섬세한 손길로 매만지며, 비누 본연의 기능을 탈맥락화시켜 작품으로서의 권위를 부여했다. ‘귄위의 전복’이라는 키워드로 수렴되는 작가의 번역 작업은 뮤지엄이라는 특정한 장소를 다시금 돌아보도록 요청한다.

신미경, , 1998, 비누, 178(h) x 65 x 41cm | 사진: 코리아나미술관 제공, 촬영: 아인아

회화처럼 보이는 조각, 유물처럼 보이는 조각

첫 번째 전시실에 전시되고 있는 신작인 <라지 페인팅 시리즈>는 작가가 2014년부터 진행하고 있는 ‘페인팅 시리즈’의 확장판이다. 사각 프레임 안에 배치된 비누의 형식은 회화를 표방하지만 물질성과 더불어 작업 과정을 살피면 그것이 조각 작업에 가깝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나의 작품은 200kg이 넘는 무게를 지녔다. 큰 규모, 다채로운 색들이 섞인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층적인 요소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는 작가가 비누를 녹여 향을 스미게 하고, 굳히는 과정을 거친 뒤, 토치 불로 색을 조정하는 일련의 과정을 거듭한 결과물이다. 물질에 작가의 노동 과정이 결집돼 있다는 점을 형상을 통해서 헤아려볼 수 있다.

 

두 번째 전시실 중앙에는 이른바 ‘유물화된’ 비누 조각이 있다. 신미경 작가의 <번역 시리즈(Translation Series)>의 초창기 작업인 ‘그리스 조각상’은 그가 런던에서 대학원을 졸업한 뒤 헤이워드 갤러리(Hayward Gallery) 기획전에서 처음 선보인 작품이자, 2004년 브리티시 뮤지엄 퍼포먼스에 활용된 작품이다. 세월을 거치며 단단하게 응집된 비누는 고전 조각의 면모를 떠올리게 한다.

(좌측벽) 동경, 고려-조선, 코리아나 화장박물관 소장 (중앙좌대, 우측벽) 신미경, (총 12점), 2018, 비누에 동박 또는 은박, 가변크기 | 사진: 코리아나미술관 제공, 촬영: 아인아

무엇이 유물인가?

전시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는 5-6층에 위치한 화장박물관 섹션이다. 유리 진열장에는 화장박물관의 소장품인 고려, 조선시대에 사용된 청동 거울 ‘동경’이 전시돼 있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작가의 조각 작품들도 어우러져 있다. <화석화된 시간 시리즈>는 비누로 제작된 도자기에 은박과 동박을 입혀 몇 백 년의 시간을 함축하고 있는 것처럼 재현한 작업이다.

 

오랜 시간을 품고 있는 유물 사이에 배치된 작가의 작품은 자연스럽다. 진열장에는 다양한 시간을 지니고 있는 요소들이 서로 어우러지고 있는 모습이다. 모든 게 다 시대의 유물 같다. 작품과 유물을 들여다볼수록 저마다의 시간성이 엉키며 유물을 향한 높은 장벽이 걷힌다.

신미경, (총 19점), 2007~2013, 비누, 바니쉬, 가변크기 | 사진: 코리아나미술관 제공, 촬영: 아인아

특유의 매끈함과 화려한 색감으로 관람객의 이목을 잡아 끄는 작업은 <고스트 시리즈>(2007~2013)다. 이는 투명 비누를 활용해 도자기를 캐스팅한 뒤, 속을 파내 최소한의 형태만 남긴 작업이다. 박물관에서 중시하는 오브제의 역사적 맥락과 정보가 소멸되고,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를 오가는 비누의 속성이 강조된다는 점에서 ‘유령(ghost)’을 떠올리게 한다.

신미경, (총 13점), 2023, 브론즈(청동), 가변크기 | 사진: 코리아나미술관 제공, 촬영: 아인아

매끈하게 하기, 굳히기

지하 1층과 지상 5층에 위치한 화장실에는 신미경 작가의 <화장실 프로젝트> 작업이 있다. 관람자들은 화장실에서 작가가 정성스럽게 조각한 비누로 손을 씻을 수 있다. 해당 프로젝트는 ‘화장실’에 작품을 설치하고, 작품이 아닌 비누라는 ‘용도’에 집중함으로써 작품이 지닌 권위를 뒤바꾸는 과정이다.

신미경, (총 6점), 2022-2023, 비누, 가변크기 | 사진: 코리아나미술관 제공, 촬영: 아인아

6층에 위치한 박물관 전시실에는 환경으로 인해 변화된 <풍화 프로젝트>와 관람자들의 손길로 인해 변화된 <화장실 프로젝트>가 브론즈로 캐스팅된 채 번역돼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연약한 비누의 특성은 사라진 채 단단하게 굳어 시간을 박제했다는 점이다. 특히 <화장실 프로젝트>를 캐스팅한 작업은 공통적인 형태를 지니고 있는데, 여인의 머리 부분이 매끈한 타원형으로 되어있다. 관람자들은 캐스팅된 작업을 보며 현재의 시점이 되기까지 작품이 지닌 과거를 역추적해 볼 수 있다.

신미경, , 2023, 비누, 65(h) x 34 x 24cm | 사진: 코리아나미술관 제공, 촬영: 아인아

예술사에는 작품의 권위와 뮤지엄 권력에 도전하며 그것을 해체하고자 했던 다양한 노력이 있다. 그 노력으로 인해 동시대 예술은 다양성을 허용했고, 시대를 이루는 권력과 권위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움직임 또한 활발해졌다. 그럼에도 예술은 여전히 역사 혹은 공간 안에 쉬이 규정된 채 고정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뮤지엄이라는 공간에서 더욱 잘 포착된다.

 

그 이유는 일단, 뮤지엄의 역할 중 하나가 소장 그리고 보존이기 때문에 그렇다. 소장과 보존의 목적은 유물 혹은 작품이 생성된 시기의 상황과 맥락을 최대한 반영하는 데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은 양면적이다. 당대의 맥락을 효과적으로 드러내 보일 수 있지만, 동시에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유물 및 작품의 삶과 맥락은 제거한 채 고정시키는 위험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맥락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떼어내 보는 일 그리고 그것을 다시 번역하는 과정은 근본적으로 권력, 권위, 이분법이라는 거대 그림자를 다시 보는 과정이다. 그렇게 신미경 작가는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는 선적인 시간성과 더불어 고정된 작품과 뮤지엄이라는 장소까지 뒤흔든다. ‘되어감’이라는 과정과 수행 자체에 방점을 두며 생동감을 부여하는 작가의 행보가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 전시는 오는 6월 10일까지.

 하도경 기자

취재 협조 및 자료 제공 코리아나미술관

장소
스페이스 씨(코리아나 화장박물관, 코리아나미술관)
주소
서울 강남구 언주로 827
일자
2023.03.02 - 2023.06.10
링크
홈페이지
하도경
수집가이자 산책자. “감각만이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현실”이라는 페소아의 문장을 좋아하며, 눈에 들어온 빛나는 것들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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