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에는 흥미가 없다”고 말하는 디자이너는, 올해 가을/겨울 컬렉션의 테마로 ‘유행의 미묘함(Voguish Subtlety)’이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 트렌드를 좇을 줄 알아야 살아남기 수월한 패션 시장에서 더 센토르다운 정체성과 색채를 지켜가는 방법을 함께 고민하는 가운데 도출한 주제다. 무작정 유행에 편승하기보다, 언젠가 뒤돌아보아도 브랜드의 정체성이 보이는 길을 걸으려 한다.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힘은, “끝없이 자신을 인지하고 독려하며 계속해서 나아가는 힘에서 비롯된다.”
Interview with 더 센토르
예린지 대표
— 인간과 말의 형상을 모두 가진 켄타우로스를 칭하는 ‘더 센토르’는 디자이너 예란지의 ‘자아’와 같다고요.
패션을 전공하면서도 늘 관심은 ‘나의 본질’을 찾는 데 있었어요. 센토르는 인간도 아니고 신도 아니고 완전한 동물도 아니지요. 센토르에 대한 노래 가운데 인간 여자를 사랑했으나 대화가 불가능해 사랑을 할 수 없었다는 가사가 있어요.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고 온전히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인 센토르는 종족끼리 모여 살았다고 해요. 어디에도 속하지 않지만 또 어느 곳에나 있는, 교집합적인 존재가 저와 닮았다고 느꼈어요. 인간과 신의 세계 중간에 살며,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외로운 중간자이지만 이 둘을 포괄하는 ‘유일한 존재’이기도 해요. 이렇게 정의를 내리고부터 저만의 내러티브를 만들어왔어요.
— ‘외롭지만 행복하며, 두렵지만 매력적’이라는 정의처럼 더 센토르 컬렉션을 통해 다양한 ‘역설’을 중의적인 테마로 다뤄왔어요. “패션 디자이너가 꿈은 아니었다”고 했는데, 어떻게 브랜드를 열게 되었나요?
학교를 졸업하고 어느 날 이태원 제일기획 뒤편 상가 1층에 있는 빈자리를 보고 곧바로 계약을 했어요. 자유롭게 아트워크를 하는 작업실로 사용할 요량으로요. 그곳에서 제가 입고 싶은 옷 몇 벌을 만들었는데, 어떤 분이 “컬렉션을 한번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한 것이 더 센토르의 시작이 됐어요. 서울컬렉션에서 신진 디자이너들을 소개하는 ‘제너레이션 넥스트 서울’ 1회 무대에 서게 되었죠. 그 쇼를 계기로 SM엔터테인먼트 민희진 아트디렉터를 만나 가수 보아의 ‘게임’, ‘허리케인비너스’ 작업에 참여하게 되었고요. 놀랍게도 정말 많은 분들이 저를 찾아왔어요. 이후 5년을 정신없이 일했는데, 제가 가진 에너지를 모두 썼다고 느껴지는 상태에 다다랐어요. 무작정 가방을 싸 들고 LA로 떠나 1년 반을 보냈어요.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어느 날부터인가 자연스럽게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마음이 일렁이더라고요.
— 최고 매출을 찍던 2012년 봄/여름 컬렉션 이후였지요. 그리고 2015년 서울패션위크 가을/겨울 컬렉션으로 복귀했고요. 다시 패션계에 복귀하면서 ‘나라를 세우는 색을 가진 여자들’이라는 개념의 ‘건국지색建國之色’을 테마로 멋진 컬렉션을 보여줬죠.
공백기의 트렌드를 읽어볼 시간도 없이 바로 컬렉션을 하게 되었는데, 패션계를 떠나 있던 2년 동안 시장이 온라인 플랫폼 유통 환경으로 완전히 변했더라고요. 두려웠죠. 하지만 ‘다시 놓지는 못하겠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나아갈 밖에요.(웃음) 그래서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었던가?’ 곱씹어봤어요. 누군가에게 힘이 되는 사람이기를 바랐더군요. 회사를 이끌어가는 대표로서, 이름을 건 대표 디자이너로서 함께하는 직원들과 ‘비전’을 나눌 이유를 거기에서 찾았어요. 건국지색은 그런 생각을 함께 담은 주제였어요.
— 현재의 패션 환경을 어떻게 읽고 있나요?
마케팅적인 시각으로 봤을 때는 한마디로 ‘인플루언서의 시대’예요. 지금은 퍼포먼스 마케팅이라든가 타깃 마케팅의 효율이 높지 않은 환경이에요. 디자이너 브랜드는 취향을 공유하는 사람들을 모으는 작업을 해야 하는데, 현재적인 시점에서 단점은 타기팅이 무색한 환경에 서 있다는 점이에요. 요즘은 스트리트 브랜드가 강세를 이루면서, 어느 선까지 디자이너 브랜드인가 하는 경계선도 모호해진 것 같아요. 무엇보다 브랜드를 점프업시키려면 유통 측면에서, 관건은 물량이에요. 그래서 더 센토르의 제2막을 열고부터는 아이템 가운데 50% 정도를 유통 아이템으로 갈아입었어요. 나머지는 저희의 강점인 니트라든가 브랜드 콘셉트가 확실히 드러나는 우븐 쪽으로 계속해서 풀어가고요. 스타일링을 했을 때 더 센토르의 무드를 담보하는 동시에 손쉽게 구매 가능한 유통 아이템을 섞을 수 있도록요.
— 블랙핑크 제니가 입은 회색 니트 조끼와 플리츠 스커트, 아이브 장원영이 입은 골지 니트 카디건 등으로 화제가 되었죠. 또한 다양한 셀러브리티가 ‘#내돈내산’을 인증하는 한국 디자이너 브랜드이고요.
더 센토르는 인플루언서 마케팅을 하지 않을 때도 먼저 선택받는 브랜드였지요. 운도 따랐다고 생각해요.
— 사실 ‘격동기’를 풀어내는 관점은 시작부터 갖추고 있었어요. ‘1960~70년대 한국 패션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오리엔탈 무드에 철학적이고 예술적인 감각을 더한 패션 브랜드 더 센토르의 디자이너 예란지’라는 소개글에도 담겨 있잖아요. 1960년대는 전통적인 패션 의식에 대변화가 일어난 시기였고, 1970년대는 역사상 가장 많은 유행이 거쳐간 시기였지요. 남녀 구별이 모호해진 유니섹스 룩도 등장하기 시작했고요. 디자이너 예란지가 내세운 ‘코리아 판타지’는 그야말로 예술과 패션의 경계를 포괄하는 강렬한 콘셉트로 선보여졌어요.
격동기라는 점은 비슷하지만, 어떻게 보면 그때는 ‘낭만’이 있었어요. 패션이 문화로 여겨진 시대였지요. 지금 패션 시장이 겪는 혼란은 낭만과는 거리가 멀어요. 그냥 산업인 것 같아요. 한동안 옷 입기를 멀리했는데, 지금은 스스로를 꾸미면서 ‘낭만’을 찾아요.
— 2022년 가을/겨울 컬렉션의 테마는 ‘Voguish Subtlety’예요. 2019 봄/여름 컬렉션은 ‘공산주의적 감수성과 프로페셔널리즘의 꽃망울’을 타이틀로 누군가의 표준이 되지 않는 프로페셔널리즘의 모습을 더 센토르만의 스타일로 표현했고요. 주제에 대한 영감은 어떻게 얻나요?
“나중에 내 쇼가 일기처럼 차곡차곡 남겨졌으면 좋겠다.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어서 내 옷을 봤을 때 아무런 설명 없이도 예란지라는 사람이 그 당시 어떤 생각을 갖고 살았는지 느꼈으면 좋겠다”고 말해왔듯, 제가 하는 이 일의 의미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오래 고민했거든요. 1년에 두 번씩 컬렉션을 진행하다 보면 당시 제가 어떤 모습으로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살았는지 알 수 있잖아요. 그 시즌에 제가 집중하고 있던 이야기로부터 스토리 라인을 만들어가요. 스토리텔링 주제가 정해지면 그와 부합하는 ‘현재적인 요즘 이야기’에 덮어씌워요. 트렌드를 취합한 패션 아이템들이라도 이런 유기적인 방식으로 작업하면 색다른 관점으로 승화되거든요.
— 유행을 뜻하는 ‘voguish’와 미묘함, 절묘함을 뜻하는 ‘subtlety’는 역시나 배치되는 이야기를 붙였어요.
근래 누군가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봐야지만 보이는 미묘한 것들에 대해 생각하면서 ‘subtlety’라는 단어에 집중했어요. 못생겼어도 관심을 기울이면 알게 되는 ‘소중함’에 대해서요. 지금 이 시점에서 더 센토르가 가져가야 될 모습이라고 생각됐어요. 잘 팔리는 ‘subtlety’가 되겠다고요.
— 컬렉션에 기반한 디자이너 브랜드로 패션 산업 현장에 뛰어들었는데, 창작자로서 브랜드를 성공적으로 이끌어가는 데 도움이 되는 조언을 해주신다면요.
유통 아이템을 50%로 전환한 이후 요즘 옷을 만들면 마지막에 꼭 짚어봐요. ‘내가 입고 싶은 옷인가?’ 옷을 작업의 형태로만 접근하다 보면 ‘디자이너의 테이스트’를 간과할 때가 있어요. 그저 작업적으로 스토리텔링에만 맞춰진 옷을 만들어서는 안 돼요. 지금처럼 마케팅이 중요한 시대에서는 예전에 컬렉션을 하는 것처럼 그룹화된 아이템을 늘려서만은 안 돼요. 집중과 선택이 필요하죠.
— 대표로서 궁극적으로 어떤 목표를 갖고 있나요?
어렸을 때는 샤넬 같은 하우스 브랜드를 만들고 싶었어요. 현재는 더 센토르를 통해 2~3개 브랜드를 내보자는 목표가 있어요. 저와 함께 오래 일하며 청춘을 보낸 친구들에게 나눠주고 싶어요. 저 혼자서는 할 수 없었던 일들을 백업해준 직원들과 ‘팀’이 되어온 시간이 제일 기뻤거든요.
글 장남미 객원 필자
사진 강현욱
자료 제공 더 센토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