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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02

한국 문화와 디자인의 비밀 담은 <우리 문화 박물지>

시대의 지성 故 이어령의 통찰…
한국을 대표하는 석학 이어령 이화여자대학교 명예석좌교수가 지난 26일 별세했다. 초대 문화부장관, 문화평론가, 기호학자… 수많은 직함으로 불리는 이어령의 이름 앞에는 언제나 ‘시대의 지성’이라는 수식이 따라붙는다. 그는 평생에 걸쳐 영성과 지혜, 정신과 육체를 탐구하는 한편, 인간을 둘러싼 문화와 예술을 자신만의 언어로 풀어냈다.

 

이어령 교수는 일생 동안 한국의 문화 원형 연구에 힘썼다. <인문학과 미학을 넘나드는 이어령의 시선 63: 우리 문화 박물지>(이하 <우리 문화 박물지>)는 우리 문화에 대한 그의 지극한 사랑이 담긴 책이다. 2007년 초판 발행 후 수많은 독자에게 한국 문화의 길잡이가 되어 준 이 책이 매무새를 단장해 출간됐다.

 

보자기. 사진 제공: 디자인하우스

 

태초에 사람들은 하늘에 흩어져 있는 별들을 그냥 바라보지는 않았다. 북두칠성처럼 별과 별을 이어서 하나의 별자리를 만들어냈다. 별을 만들어낸 것은 하늘이지만 별자리를 만들어낸 것은 사람의 마음이다. 자기로부터 몇천 광년 떨어진 별빛을 가지고도 별자리를 그려낸 사람들이 어떻게 자기와 가장 가까운 물건들, 일상 속에서 자기와 함께 생활해온 물건들에 대해 무관심할 수 있었겠는가. 밥 먹을 때 쓰는 젓가락, 옷 입을 때 매는 옷고름 자락 그리고 누워서 바라보는 대청마루의 서까래… 한국인들이 사용해온 물건들 하나하나에는 한국인의 마음을 그려낸 별자리가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것들은 서명되어 있지 않은 디자인이며 조각이며 책이다. 이 책은 바로 그 한국의 영상과 한국인의 생각의 별자리를 읽으려는 욕망 그리고 그 읽기의 새로운 실험에서 탄생하였다.

– ‘들어가며’ 중에서

 

갓. 사진 제공: 디자인하우스

 

이어령은 가위, 골무, 바구니, 수저 등 생활용품부터 고봉, 윷놀이, 한글 등 무형 문화, 논길, 호랑이, 박과 같은 자연을 골고루 탐색한다. 그리고 너무 익숙해서 잊기 쉬운 대상으로부터 역사와 철학을 길어 올린다. 그는 손때 묻은 물건에서 실용성과 아름다움을 발견할 뿐 아니라, 물건이 품은 상징성, 이데올로기적 메시지, 도덕성을 포착한다.

 

가위. 사진 제공: 디자인하우스

 

가위는 무엇을 자르기 위해 고안된 도구이기 때문에 자연히 악역 노릇을 해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랑 받지 못한 가위의 이미지를 역전시켜 그 일탈의 시적 효과를 만들어낸 것이 바로 한국의 엿장수 가위다. 우선 그 생김새를 보면 끝이 무디고 날이 어긋나 아무것도 잘라낼 수 없게 되어 있다. 그야말로 가위에서 가위의 기능을 가위질해버린 것이 엿장수 가위다. 엿장수 가위는 자르는 것이 아니라 소리를 내는 음향효과에 그 기능을 두었기 때문이다. 절단 작용을 청각 작용으로 전환시킨 순간 가위는 악역에서 정겨운 주역으로 바뀌게 된다. 그래서 엿장수 아저씨의 가위 소리는 늘 현실을 넘어선 꿈결 속에서 들려온다. 그리고 그 가위는 무엇이 잘리는 공포, 프로이트가 말하는 거세 콤플렉스의 불안이 아니라 오히려 듬뿍 덤을 주는 훈훈한 인정을 느끼게 한다.

– ‘가위: 엿장수 가위의 작은 기적’ 중에서

 

사전에서도 역사책에서도 접할 수 없는 독창적인 문화 해석은 한국, 한국인에 대해 깊이 고민해 온 이어령의 시도에서 비롯했다. 도구에 담긴 한국인의 모습과 생각, 혼과 마음을 읽어내려는 시도, 즉 한국인의 문화 유전자 지도를 만들려는 시도에서 탄생한 것. 이 과정에서 동서양을 넘나들며 펼쳐지는 창조적 상상력과 자유로운 사고방식은 무의식에 잠들어 있던 한국인의 마음을 깨운다.

 

초롱. 사진 제공: 디자인하우스

 

청사초롱의 빛은 겸손을 가르쳐준다. 대낮과 경쟁하고 태양빛을 시기하는 빛이 아니라 밤의 어둠을 보기 위해 있는 빛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인들이 밤에 불을 밝히는 것은 밤을 대낮으로 연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밤을 더욱 밤답게 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으스름한 빛, 어렴풋한 빛, 깁 속에서 번져 나오는 청사초롱의 불빛이 그러한 불빛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냥 밝은 달이 아니라 구름 속에 가린 달빛을 더 좋아한 한국인들은 빛을 싼다. 깁으로, 종이로, 그렇지 않으면 창살 같은 나무로. 청사초롱만이 아니라 모든 한국의 조명기구들은 비과학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비과학이 아니라 과학 이상의 것을 추구하려는 마음의 소산이다. 몽롱한 빛, 대낮의 빛과는 다른 밤의 빛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등롱이 있는 것이다.

– ‘초롱: 밤의 빛’ 중에서

 

논길. 사진 제공: 디자인하우스

 

책 속에 담긴 이어령의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한국 문화에 대한 핵심 키워드를 발견할 수 있다. 그 키워드란 바로 융합, 생명, 융통성이다.

 

융합은 대립과 모순을 중화하고 그러한 과정에서 아름다움이 태어난다. 가령 바구니는 노동과 놀이가 결합해 탄생한 도구다. 장독대는 볕과 바람이 드는 한편 비밀스러운 조화의 공간이다. 키는 곡식을 모으는 동시에 쭉정이를 날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모순적인 기능을 융합하는 과정에서 아름다운 모양새가 완성된다.

생명은 투쟁과 정복이 아닌 성심과 포용으로부터 기원한다. 종소리는 중생을 번뇌에서 구원하고 영혼을 씻어주는 생명의 소리다.

융통성은 인공적인 기계성의 대척점에 있다. 넉넉하고 품이 너른 한복은 이 몸에서도 저 몸에서도 편안하게 어우러진다. 보자기는 또 어떤가. 가방이 되기도 두건이나 끈이 되기도 한다.

 

화로. 사진 제공: 디자인하우스


한국의 화로는 역설적이다. 그것은 식기 위해서 있다.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빈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라는 시구에서도 읽을 수 있듯이 화로는 불이 타오르는 것이 아니라 재가 식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데 그 특징이 있다. 뜨거웠던 불덩어리가 싸늘한 재가 되어가는 과정, 화로의 참된 아름다움은 불꽃보다는 그 재 속에 있다. 한국의 화로는 근본적으로 불을 담아도 비어 있는 형태, 재의 형태를 모방하게 된다.

– ‘화로: 불들의 납골당’ 중에서

 

이불과 방석. 사진 제공: 디자인하우스

 

한국의 음악과 영화, 드라마가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시대다. 이러한 때 한국 문화의 원형이자 정체성을 파고드는 일은 각별한 의미를 지닐 것이다. 이어령은 “제 것을 모른 채 살아간다면 새로운 삶과 지식이 열리지 않는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국 문화와 디자인의 뿌리를 더듬다 보면,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풍경. 사진 제공: 디자인하우스

 

우리는 사물을 보지 않는다. 본다기보다 사물 위를 그냥 스쳐 지나간다. 얼음판을 지치듯이 미끄러져 가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사물의 형태나 빛깔 그리고 그것들이 끝없이 우리를 향해 말하고 있는 이야기들을 듣지 못한다. 만약 우리가 시선을 멈추고 어떤 물건이든 단 1분 동안만이라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것들은 어김없이 먼지를 털고 고개를 치켜들 것이다.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난 순간처럼 전연 낯선 얼굴로 우리 앞에 다가설 것이다. 모든 도구들은 필요한 물건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감동을 나누어주는 조형물이 되어 조용히 내 앞에 와 앉는다.

– ‘나오며’ 중에서

 

붓. 사진 제공: 디자인하우스
<인문학과 미학을 넘나드는 이어령의 시선 63: 우리 문화 박물지>
지은이 이어령
펴낸 곳 디자인하우스
판형 170*220
페이지 280쪽
발행일 2022년 3월 2일
정가 16,000원

김유영 기자

김유영
에디터. 이야기를 듣고 기사를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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