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은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알량할 뿐 갈고닦아 높이는 무엇이 아니지요. 나는 물냉, 나는 비냉 이상도 이하도 아닌걸요. 어떤 관점으로 보는지, 어떻게 안목을 기르는지, 얼마나 다듬어진 감식안으로 파악하고 표현하는지, 말해야 한다면 그것으로부터 말해야겠죠.”
엠 아이 블루 – 아네모네
나는 가끔 나의 색약에 대해 누가 묻지 않아도 먼저 말한다. “숲속에 꽃이 피었다 쳐요. 숲은 6월의 충청도 숲이라 쳐요. 알잖아요 그때쯤의 공주 녹색, 예산 녹색. 꽃은 화이트, 노랑, 보라, 빨강이 골고루라 쳐요. 제가 제일 먼저 보는 꽃은 흰색이나 노랑이예요. 그다음 보라, 빨강은 어디 있지? 안 보이거나, 아 저기 있긴 있네 긁적긁적 웃어야 보이겠어요.” 그런 내가 초겨울 아네모네 시즌을 맞으며 지난 여름 스카이블루 델피늄으로 연습한 그 블루를 아네모네에서 찾으려 벼른다. 발견 즉시 확신할 것. ‘이건 블루야, 블루진 할 때 바로 그 블루.’ 나는 아네모네를 쳐다보며 블루에 빠진다. 프린스의 ‘퍼플 레인’보다 핑클의 ‘블루 레인’이 오늘따라 입에 붙는 이유도 블루의 속도를 높인다. 나는 블루 아네모네를 방에다 두고 어디까지나 아무렇지 않다. 저 늠름한 블루를 보라. 또한 회고조로 고개를 튼 블루를 보라. 나는 오늘을 기다려 카메라로 블루를 담고 블루로부터 해방된다. 1982년에 처음 학교를 들어간 이유인지, 1981년은 기억나는 일이 없다. 그래서 이 작품의 번호를 81번으로 매긴다. 너대로의 색이거니와 나대로의 삶이다.
준의 핑크
2017년 준의 베를린 집에서 며칠 묵게 되었을 때, 준은 플라이스PLYS 새 시즌 시작을 코앞에 두고 포르투갈 공장장과 독일 회계사와 터키 DHL 배달원과 벨기에 어시스턴트와 한국에서 온 투어리스트를 한꺼번에 치르는 하루를 맞았다. 눈치가 빠삭한 투어리스트로서 나는 그저 조용했는데, 졸다 깨니 머리맡에서 준이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옷을 만드는 건 아니고 가로세로 10cm나 될까 싶은 조각들이었다. “준, 너는 패브릭부터 발명해야 하는구나.” 그러고 보니 준은 원단 시장에 원단을 사러 가는 게 아니라 멀리까지 실을 보러 다녔다. 세인트 마틴에서 패션을 전공하기로 다른 무엇보다 ‘니트’ 혹은 ‘니팅’에 빠진 이유를 묻지 않았지만, 준이 뜨개질한 조각조각이 너무 예뻤음을 두고두고 대답처럼 여긴다.
유학부터 브랜드 론칭까지 준이 20년 타국 생활을 접고 서울로 돌아온다. 마침 서울에서 새로운 일도 생겼다. 전혀 새로운 캐시미어를 내세우는 주느세콰다. 일요일 장충동 태극당 구석자리에서 준이 하는 말을 녹음했다. 온라인스토어에 올릴 제품 설명을 써야 하니 우선 디자이너의 육성을 기록하고자. 그런데 며칠 후 집에서 듣다가 눈물이 났다. 알 것 같아서, 알 수 있어서. 실의 멋과 쓰임, 니팅의 방식과 태도, 디테일을 조합하는 구체적인 까다로움, 수학에 가까운 컬러와 화학에 가까운 선택, 디자인의 한계와 프로덕션의 한숨, 어디까지나 결과로서의 감촉. 눈물 닦고 할 일이 쇼핑 말고 뭐가 있을까. 압구정동 팝업스토어에서 준의 핑크색 니트를 샀다. 뒤집어 입을 수도 있는데, 뒤집으면 그레이가 된다. 나는 이 옷이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응축한 무엇이 놀랍다 여긴다. “어떤 핑크를 고를 것이냐, 그게 한 시즌의 시작이 되긴 해요.” 서울에서의 첫 준. 성까지 하면 이승준. 준은 눈이 땡그랗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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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꽃의 이름은 헬레보러스. ‘크리스마스 로즈’라는 별명도 갖고 있다. 벽에 한 번 문지른 것 같은 색이랄지, 상처가 아무는 자리거나 동지섣달 밖에서 일하고 돌아오신 할머니의 뺨이거나, 헬레보러스를 둘 곳은 유리처럼 차갑지 않고 알루미늄처럼 반사하지 않는 곳이라야 할 것 같다. 아궁이가 있는 은은한 부뚜막이면 좋겠는데, 이화동 원룸에 살면서 아궁이는 웬일이고 부뚜막은 ‘웬열’인가. 나는 사이토 하지메가 만든 푸른 화분에 그걸 두기로 한다. 밑에 배수용 구멍도 없는데 꽃병Vase이 아닌 화분Pot이라 이름 붙인 이유는 무엇일까. 칠하고 굽고를 반복하느라 그의 작업은 복잡하고 세밀한 공정을 필요로 하는데, 결과는 만져지다시피 층층이 쌓인 질감과 시간성이다. 그러니 영원의 크리스마스 로즈, 올해의 헬레보러스여, 너는 꽃이라서 아마도 핑크겠군요. 결코 그레이는 아닐 테지요. 하지만 나의 확신은 크리스마스처럼 돌아오고, 사이 좋은 너희에게 언제든 나의 착각을 말해줄 수 있겠어요. 핑크이즈그레이이즈핑크이즈그레이.
감자와 평면
여기 생긴 대로 빛을 받는 감자가 있다. 실은 이미 오래전 촬영된 사진이라 뿌리를 찾자면 50대조 할아버지 감자쯤 되는 감자다. 사진 위로 둥그스름 마분지 한 장이 들러붙는다. 능청스럽다. 딱풀로 붙였는지 자리를 뜰 기미도 없다. 감자의 둥긂이 감자의 숨막힘으로 변할 판, 그런데 모든 게 귀엽다. 이어서 무구한 붓질이 종이를 채우는데 저 컬러는 무엇인가. 감자의 둥긂이 감춰진 자리에 더 둥근 평면이 생겨난다. 그러니까 버섯처럼. 나는 마음대로 작업의 안팎을 유추하며 좋아라 한다. 이렇게 이미지의 내부와 외곽을 간결히 정리한 작업을 알았던가 하면서. 작가의 이름은 루스 반 빅Ruth Van Beek. 암스테르담 라베스틴 갤러리에서 2021년 1월까지 전시가 이어진다는데, 거기에 가지 못하고 저녁엔 채를 썰어 감자를 볶아볼까 여기에 있다.
오마르 아유소의 인스타그램
그에 대한 정보는 없는 편이다. 넷플릭스에서 <엘리트들>을 보며 구부정한 듯 날랜 몸가짐과 우물처럼 검은 눈빛을 잠깐 느꼈을 뿐. 그러다 어쩌다가 오마르 아유소는 지금 내가 생각하는 젊음의 표상이자 기준이 되었다. 꼰대니 뭐니 마흔 넘어 세상사 덤핑가로 팔리는 건 차라리 이치라지만, 내가 내 눈을 부정할 필요야 있나. “요즘 젊은 사람들이 좋아할지 모르겠지만” 배려를 가장해 이런 말을 버릇처럼 하는 것이야말로 징그럽다. 나는 표상이자 기준이라고 말한다. 나쁘게 해석하건대 그보다 못하다면 쳐다보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시공간을 사는 지구의 아이로서 오마르 아유소가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에 나는 미소가 생긴다. “셀카를 이렇게도 찍는구나/올리는구나.” 어디까지나 나는 거기에 속하지 않음으로써 젊음을 반납한 상태다. 기한 전에 반납한 것 같으니 연체료 따위 물지 않고 다음엔 뭘 빌려볼까 희망에 차 있는 편이다.
별의 별
“별은 별의 자리에 있고, 사마리아님은 신촌로터리에 계시지.” 요즘 친구들에게 자주 하는 말이 이렇다. 별자리를 믿네 안 믿네 그런 얘길 나눌 단계는 애저녁에 지났으니, 지혜를 갖춘 자여 정보를 따르라. 누구든 유튜브에서 ‘사마리아 별자리’로 검색해 나의 우주적 기쁨을 n등분 해갈까 겁나지만 일단 말은 해야 맛이다. 자, 2021년 지구와 목성이 이루는 합의 기운을 느껴도 볼 일 아닌가. 서기로 2천 년을 살고도 지구 밖에서는 1초도 살아보지 못한 우리 지구의 조무래기들.
유성원의 글쓰기
아름답다. 한국 사람이 한국말로 쓴 책 중에 이렇게나 훌륭하다. 생각과 말과 실천이 여지없이. 나는 형용사를 쓰려거든 움직이도록 써야 한다고 믿는데, 유성원의 책 <토요일 외로움 없는 삼십대 모임>을 읽고 어디로든 아름다워 가고 싶다. ‘나는 썼으니 알아서들 하시오’ 표현하는 자가 지닌 최후의 경건함이 이 책에 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오늘도 힘든 하루였네요’ 이러기나 하는 것들을 소각해버리면서. 나는 윤택수와 황인찬과 유성원과 같은 시대를 살고 있다. 미소와 책임을 느낀다.
숲속 유난히 빛나는 한 이파리
中森明菜. 한 글자씩 분해하면 가운데 중, 나무 빽빽이 들어설 삼, 밝을 명, 나물 채. 일본 이름이고 나카모리 아키나라고 읽는다. 누구나 그런 리스트가 있을 텐데, 꿀단지에서 꿀 꺼내듯 온종일 즐길 수 있는 것 말이다. 김연아의 시합들을 ‘노 코멘터리’ 버전으로 다섯 시간 보듯이, 나카모리 아키나가 천구백팔십 몇 년에 이룩한 무대를 얼마든지 볼 수 있다. 닳아지지 않으니 당신은 존재의 별, 사라지길 반복하니 그믐과 보름을 잇는 달. 다시 태어난다면 1986년 도쿄에서 이틀쯤 보내게 해달라 기도해야 하나. 어쩌면 영상에 갇혀 40년이 지난 뒤 ‘칼라 테레비’를 느끼는 것이야말로 완전한 쾌락일까.
제주도의 모르는 길
제주도에 몇 번 갔는지 렌터카 사이트에 접속해 차 빌린 횟수를 검색한다. 서른 번은 넘고 쉰 번은 안 되는구나. 그렇게 갔어도 제주도를 모르니 제주도를 또 가는 것 말고는 답이 없다. 다행이야 제주도, 네가 거기쯤 있어서. 좋아하는 걸 묻는다면 단연 운전이다. 내비게이션이 없을 땐 떨림이 더했다. 종이 지도를 펼치면 나뭇가지처럼 끝나는 길이 숱한데 거기까지 가면 어떻게 되는지 델마도 루이스도 아니면서 절벽으로 달리는 기분을 냈다. 요즘도 일부러 내비게이션을 끈다. 한번은 길 가운데 솟아오른 버섯을 보고 멈췄다. 얘야 여기서 왜 이러고 있니. 나는 윤동혁 PD 가 만든 ‘도른’ 다큐멘터리 <독버섯, 죽음에 이르는 치명적 유혹>을 배가 찢어지게 웃으며 견딘 사람의 지혜로 그것에 손대지 않지만, ‘먹는 버섯’이라는 지나는 아저씨의 말을 믿고 얼른 땅에서 꺼낸 적이 있다. 이제 겨울이니까 제주도에 눈이 내린다. 눈 오는 날 성판악을 넘어가는 1131번 도로는 체인을 두르지 않으면 통제된다. 올해는 기필코 체인을 둘러야지, 이것이 2020년의 마지막 계획이다.
CURATED BY 이소진
헤이팝 콘텐츠&브랜딩팀 리드. 현대미술을 전공하고 라이프스타일, 미술, 디자인 분야의 콘텐츠를 기획하고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