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셉에 맞게 A부터 Z까지 계획된 결과인 디자인은 생각보다 이성적인 작업이다. 하지만 어지혜, 장준오의 디자인 스튜디오 ‘스팍스 에디션’은 그 반대다. 그들의 디자인도 이성적인 과정을 따라 나온 결과임에 분명한데,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정을 솟구치게 만든다. 어쩌면 이 힘이 10cm, 장범준, 이적, BTS 등 여러 뮤지션이 그들에게 앨범 자켓 디자인을 부탁한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스팍스 에디션의 예리한 감각은 그들의 아트웍에서 더 강해진다. 피어나는 생명력이 느껴지는 어지혜의 그림과 단단한 물성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장준오의 조각은 전혀 다른 것처럼 느껴지지만 보는 이의 감성을 섬세하게 건든다는 점에서 묘하게 비슷하다.
스팍스 에디션처럼 디자인과 아트웍의 비중을 비슷하게 두는 디자인 스튜디오는 많지 않아요. 언제부터 아트웍을 작업하기 시작했나요?
어지혜 몇 년 전, 예술 작업을 하는 친구들과 ‘스펙트럼 오브젝트’라는 그룹을 만들었어요. 2주마다 서로의 작업 결과물을 보여주는 모임인데 꾸준하게 작업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죠. 올해는 동화책을 제작하는 그룹도 만들었어요. 1년마다 동화책이나 아트웍 책을 출간하는 것이 목표예요.
아트웍 분야가 다른데(어지혜는 회화, 장준오는 조소) 작업을 하면서 서로에게 조언을 해줄 때도 있나요?
어지혜 아트웍도 디자인처럼 의견을 나누면서 점진적으로 발전시켜요. 서로의 작업을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작품에 도움이 되는 조언을 해줄 수 있거든요. 아트웍은 각자의 내면에서 시작하는 이야기를 근본으로 하기 때문에 크게 터치하지 않지만 파트너로서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은 확실하게 도와주는 거죠.
Bloomers in dark by A ji-hye
<레이어> 시리즈와 <블루머스> 시리즈를 보고 있으면 어지혜 디자이너가 뭘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아요.
어지혜 예전부터 여성의 몸이 그려내는 선을 좋아했어요. <레이어>는 이런 취향에 색이라는 요소가 만나면서 탄생한 시리즈예요. 이후, 여성의 곡선과 꽃의 선이 닮았다는 걸 발견하면서 자연스럽게 관심사가 꽃이 피어나는 형체, 춤추는 몸의 선, 발산하는 에너지로 연결되었어요.
유형의 물체에서 보이지 않는 움직임으로 연결된 거네요.
어지혜 최근에 움직임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어요. 특히 요가를 시작한 이후로는 피어나는 형상과대기의 흐름, 가벼운 움직임에 관심이 생겼죠. 반복적인 가사와 울림이 있는 요가 음악을 듣고 있으면 확산하는 움직임이 시각적으로 떠올라요.
Particle by Jang joon-oh
반대로 장준오 디자이너의 조형 작품은 움직임이 없고 무겁죠.
장준오 시멘트, 돌, 쇠처럼 단단하고 잘 변하지 않는 소재를 다루는 걸 좋아해서 그런가 봐요.
어지혜 제가 봤을 때, 준오씨는 작업할 때의 노동을 즐기는 사람이에요. 단단하고 무거운 소재를 작업하려면 정말 힘이 많이 들거든요.
장준오 몸을 움직여야 기분이 좋아지는 타입이에요. 그래서 작업할 때 몸을 많이 쓰는 것을 좋아해요. 단점이 한 가지 있다면 에너지를 많이 쏟아야 한다는 걸 아니까 작업을 시작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점이에요. 도구와 재료 등 준비할 것도 많고요. 그런데 막상 작업을 시작하면 몰입해서 엄청 신나게 해요.
Particle by Jang joon-oh
작업에 영감을 주는 조형요소가 있나요?
장준오 물성 자체에서 매력을 느껴 작업할 때도 있지만 주로 동세에서 영감을 받아요. 움직임의 한순간을 포착해서 그걸 조형으로 영원히 남기는 거죠. 예를 들어 손의 어떤 한 동작을 포착해서 조각으로 만들면 사람들은 그 형태를 보고 다양한 이야기를 상상해요. 의도하지 않았는데 저절로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거죠.
어지혜 준오씨는 도구에서도 영감을 받아요. 가위, 칼, 톱… 모든 도구에 관심이 많고 좋아해요. 요리를 좋아하는 이유도 똑같아요. 요리를 하면 칼을 다룰 수 있으니까요.
장준오 심지어 스튜디오에도 포스터 액자처럼 도구를 걸어서 전시해 뒀죠.
어지혜 저는 색에 관심이 있었어요. 색을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 감정을 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설렜거든요. 그래서 <레이어> 시리즈가 탄생할 수 있었어요. 이때까지는 좋아하는 색의 조합에 집중했다면 지금은 색 자체가 주는 에너지를 과감하게 사용하고 싶어요. 그리고 최근에는 선(line)에서도 많은 영감을 받아요. 동세를 표현하는 방법에 관심이 생겼거든요. 리듬감이 느껴지는 선은 보기만 해도 기분 좋고 재미있고 궁금해요.
아트웍은 디자인과 달리 자신만의 목소리를 강하게 담을 수 있죠. 그래서 두 사람이 아트웍으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궁금했어요.
어지혜 무언가가 태어나고 피어나는 이미지를 통해 살아있는 생명력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어요. 꽃이 피어오를 때의 동세, 유연하고 부드러운 움직임… 무언가가 태어남으로써 삶이 피어나는 순간을 보여주고 싶어요.
장준오 하나의 주제를 꾸준히 파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그보다 평소 인상에 남았던 이미지와 감정을 저만의 방식으로 표현하거나, 작업 과정에서 받는 에너지를 표현하려고 하죠. 하지만 최근에는 다른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부정적인 생각을 안 하는 편이라 힘든 상황을 마주해도 남들만큼 괴로워하지 않거든요. 이러한 제 삶의 방식이야말로 저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이지 않을까 싶어요.
아트웍 작업을 하면서 새롭게 발견하거나 얻게 된 것이 있나요?
어지혜 디자인은 이유가 명확해야 해요. 왜 이런 선택을 해야 했는지 타당한 이유를 들어서 클라이언트와 고객을 설득해야 하죠. 하지만 아트웍은 개인 작업이니까 딱히 이유를 설명하지 않아도 돼요. 오히려 작품을 완성하고 나서 왜 이 색을 사용했는지 생각하게 되고, 그러면서 점점 저에 대해서 알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종종 아트웍은 자아성찰의 시간이라고 말해요. 실제로 아트웍 작업을 통해 제가 좋아하는 것들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고 더 깊게 팔 수 있었어요.
작업과 취향에 공통점이나 연결점이 있었나요?
어지혜 음악은 장르에 구분 없이 다양하게 듣는 편이었는데 아트웍 작업을 시작한 이후로는 피아노 연주곡처럼 선율이 부드러운 클래식을 더 듣게 되었어요. 준오씨는 크고 단단하면서 거친 소리를 내는 메탈 음악을 더 듣고요. 이렇게 취향이 작업에도 연결되는 것 같아요.
아트웍을 통해서 취향을 더 명확하게 알게 되고, 다시 취향이 작업에 영향을 끼친다는 점이 신기하네요.
어지혜 아트웍을 하면서 감도 예리해졌어요. 아트웍 작업을 통해 역방향 사고를 연습하게 되니까 새로운 관점이 생겼고 덕분에 디자인도 풍성해졌어요. 디자이너는 개인 작업을 통해 자신의 취향과 관심사를 파악하고, 자기 자신에게 더 집중할 수 있어요. 그 결과 디자인도 더 풍성해질 거고요. 제 경험상, 디자이너들이 꼭 자신만의 아트웍 작업을 했으면 좋겠어요.
뻔한 질문일 수도 있지만 스팍스 에디션에게 조형과 회화는 어떤 의미인가요?
어지혜 할머니가 되어도 계속 할 수 있는, 평생의 업이자 활력을 주는 놀이가 되었으면 해요.
장준오 세상에서 가장 멋진 것. 그래서 저도 평생 조형 작업을 했으면 해요.
어지혜 그리고 인생을 풍족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기도 하죠.
장준오 맞아요. 그 무엇도 조형 작업을 하면서 느끼는 만족감과 행복감에 비할 수 없어요. 작업을 하다 보면 ‘세상에 이렇게 재미있는 게 또 어디 있어!’라는 생각이 들어요.
Particle by Jang joon-oh
평생 하고 싶은 일을 찾았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이죠.
어지혜 친구와 함께 보내는 즐거운 시간, 그림을 그리면서 느끼는 충족감, 피아노를 연주할 때의 행복감… 이렇게 인생을 충족시키는 순간들이야말로 오랜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장준오 특히 작업하는 시간은 타인과 비교하지 않아도 되는, 오로지 나만을 위한 시간이잖아요. 이런 시간을 많이 가질수록 좋은 것 같아요. 그런데 요즘 강의를 나가면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자신감을 잃어가는 학생들을 많이 봐요.
어지혜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을 만들거나, 글을 쓰거나… 창작 활동은 힘들고 아픈 순간도 있는 삶 속에서 나를 채워주고, 살아있어서 기쁘다는 마음을 들게 하는 소중한 시간이에요. 자신을 표현하고 싶은 건 인간의 기본 욕구이니까, 창작 활동을 통해 욕구를 충족시키고 자신 작품에 반하면서 살아가야 해요. 특히 자신이 만든 작품은 오롯이 자기 거니까 당연히 사랑을 줘야 해요.
제가 좋아하는 기타리스트, 척 슐디너가 사용하는 기타예요. 일렉 기타를 연주하고 수집하지만 누군가의 기타를 따라 산 적은 없었는데 이건 예외였죠. 일반적으로 일렉 기타는 메탈이 아닌 장르도 연주할 수 있는데 이 기타는 오로지 메탈만을 연주하도록 디자인되었어요. 시끄럽다고 느낄 정도의 소리가 나기 때문에 스튜디오에 아무도 없을 때만 연주해요.
우리가 출시한 아트웍 굿즈 중에서 이 제품을 제일 좋아해요. 단순한 움직임으로 사람들에게 놀라움과 즐거운 에너지를 전달하거든요. 사실, 아트웍 작품을 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하지만 굿즈는 누구나 살 수 있고 선물도 할 수 있으니까 우리 작품을 더 많은 사람들이 소장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이미지 제공 스팍스 에디션
CURATED BY 허영은
다양성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든다고 믿는다. 그래서 숨겨진 이야기들을 찾아내서 보고, 듣고, 읽고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