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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27

코펜하겐 도시재생 공간 5 – 오래된 공간이 다시 태어나는 법

새로 짓지 않아도 도시가 매력적인 이유는?

코펜하겐은 낡은 것을 허물기보다, 시간이 켜켜이 쌓인 공간에 새로운 감각을 더해 다시 쓰는 도시다. 1990년대 중반부터 코펜하겐은 항만과 공업 지대를 철거하는 대신, 기존 구조를 보존하고 새로운 기능을 더하는 ‘재생’ 전략을 도시계획의 핵심으로 삼았다. 그 배경에는 탄소중립을 위한 지속가능성, 창의 산업의 성장, 도시 공간을 공공 자산으로 여기는 시민 의식이 있다. “새로 짓는 것보다, 다시 쓰는 것이 더 멋지다”라는 인식은 코펜하겐을 움직이는 힘이다. 병원이 박물관으로, 공장이 미술관으로, 교회가 커뮤니티 공간으로 바뀐 사례처럼, 과거의 흔적 위에 예술과 디자인을 입힌 재생 공간 다섯 곳을 소개한다.

병원에서 박물관으로, 덴마크 디자인 뮤지엄

덴마크 디자인뮤지엄 외관 ©Rasmus Hjortshøj

오늘날 ‘덴마크 디자인의 성지’로불리는 덴마크 디자인뮤지엄(Designmuseum Danmark)은 원래 병원 건물이었다. 1757년, 덴마크 최초의 병원인 왕립 프레데릭스 병원(Frederiks Hospital)으로 문을 열었고, 이후 1926년 디자인 전문 박물관으로 새롭게 탈바꿈했다. 본래 병원 건물의 설계는 로코코 양식의 대표 건축가 니콜라이 아이그베드(Nicolai Eigtved)와 라우리츠 데 튀라(Lauritz de Thurah)가 맡았다. 이후 1926년 박물관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는 건축가 이바르 벤첸(Ivar Bentsen)과 덴마크 가구 디자인의 거장 카아 클린트(Kaare Klint)가 리디자인을 맡았다.

좌) 실내 인테리어 디자인 모습 ©Christian Hoyer 우) 덴마크 디자인뮤지엄 내 카페 인테리어 디자인 ©Luka Hesselberg

병원 건물의 흔적은 지금도 곳곳에 남아 있다. 정면 파사드에는 왕립 병원을 상징하는 석조 부조와 프레데릭 5세의 문장이 보존되어 있으며, 안뜰은 남녀 병동을 나눈 U자형 구조를 따른다. 내부 회랑의 높은 천장, 깊은 창턱, 완만한 계단 등도 병원 시절의 구조를 유지하고 있으며, 클린트가 설계한 진열장과 가구는 위생과 기능성을 중시한 병원 건축에서 착안한 요소다. 과거의 기억 위에 덴마크 디자인 교육의 장으로 거듭난 셈이다.

상설전 전시 전경 ©Designmuseum Danmark

박물관 내부는 상설 전시와 기획 전시가 어우러진 구성으로 아르네 야콥센(Arne Jacobsen), 핀 율(Finn Juhl) 같은 거장부터 동시대 신진 디자이너의 실험적인 작업까지 폭넓게 다룬다. 현재 다양한 전시가 진행 중이며, 그중에서도 20세기 덴마크 디자인의 흐름을 조망하는 상설전 <Danish Modern>과 텍스타일 프린트의 문화적 가치를 재해석한 기획전 <The Power of Print>는 과거의 유산을 오늘의 감각으로 다시 쓰는 이 공간의 정체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전시로 주목할 만하다.

 

동네 교회에서 커뮤니티 거실로, 압살론

‘공동 식탁’의 장소로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압살론 ©Folkehuset Absalon

 압살론(Absalon)은 1934년 지어진 루터교 교회를 개조해 만든 지역 커뮤니티 공간이다. 지금은 매일 저녁이면 동네 주민들이 모여 함께 식사하는 ‘공동 식탁(fællesspisning)’의 장소로, 누구에게나 열린 다이닝홀이자 동네 사랑방으로 쓰이고 있다. 단순한 식당이나 카페를 넘어, 일상 속에서의 소통과 유대, 나눔의 경험을 디자인하는 실험장이라 할 수 있다.

©Folkehuset Absalon

공간 기획은 플라잉 타이거 코펜하겐(Flying Tiger Copenhagen)의 창립자이자 기업가 레나트 라이보슈치츠(Lennart Lajboschitz)가 주도했다. 그는 도시계획 전문가 플레밍 보레스코프(Flemming Borreskov)와 함께 “누구나 들어와 쉴 수 있는 동네의 거실 같은 공간”을 만들겠다는 비전을 세웠고, 버려졌던 교회를 리노베이션 해 공동체의 중심으로 되살렸다.

©Folkehuset Absalon

건물의 중심부인 메인홀 ‘살렌(Salen)’은 높은 천장과 긴 테이블, 편안한 가구로 채워져 있다. 이곳에서는 저녁 식사뿐 아니라 커피 타임, 회의, 탁구 게임, 주말 댄스파티, 목요일 밤 빙고까지 다양한 일상이 펼쳐진다. 위층에는 맨발로 요가와 운동 수업이 열리는 ‘클루벤(Klubben)’, 가장 꼭대기 탑방에는 드로잉, 다트, 철학 강연 등 보다 깊이 있는 창작과 탐구가 이뤄지는 ‘톤베얼셀셋(Tårnværelset)’이 자리한다.

©Folkehuset Absalon

한편, 공간 디자인은 덴마크 출신 예술가 탈 R(Tal R)과 건축가 알란 리트(Allan Lyth)가 함께 맡아, 벽과 천장, 계단까지 이어지는 강렬한 색감의 회화적 요소로 시각적 활기를 불어넣었다. 입구의 석조 몰딩은 밝은 원색을 칠했고, 제단이 있던 자리에는 무대와 함께 붉은 벽을 설치해 소리의 울림까지 고려한 디자인으로 완성했다.

물류 창고에서 라이프스타일 하우스로, 오도 하우스

노르드하운 항구 옛 물류 창고를 리노베이션 한 오도 하우스 ©Audo Copenhagen

오도 하우스(Audo House)는 코펜하겐 노르드하운(Nordhavn) 항구의 옛 물류 창고를 리노베이션 해 2019년 문을 연 하이브리드 공간이다. 호텔, 쇼룸, 레스토랑, 콘셉트 숍, 전시와 이벤트 공간이 하나로 통합된 이곳은 덴마크 디자인 브랜드 오도 코펜하겐(Audo Copenhagen)의 본사이자 플래그십 스토어이기도 하다. 오도는 1978년 설립된 메누(Menu)가 2023년 리브랜딩 하며 새롭게 선보인 브랜드로 가구와 조명, 오브제를 중심으로 부티크 감성의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한다. 그리고 오도 하우스는 그 철학을 공간 전반에 구현한 대표적인 사례다.

노름 아키텍츠는 따뜻하면서도 모던한 감각의 공간을 연출했다. ©Audo Copenhagen

공간 설계는 노름 아키텍츠(Norm Architects)가 맡았다. 미니멀한 구조와 자연광, 목재·천연석·텍스타일 등 따뜻한 재료를 조화롭게 사용해 차분하면서도 감각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기능별 공간은 유기적으로 연결돼, 방문자는 전시와 식사, 쇼핑, 휴식을 자연스럽게 넘나들 수 있다.

1층 콘셉트 숍에서는 오도 코펜하겐의 다양한 리빙 제품을 만날 수 있다. ©Audo Copenhagen

1층에는 오도의 철학을 가장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콘셉트 숍이 자리한다. 가구, 조명, 오브제를 실제 주거 공간처럼 구성해 디자인이 일상에 스며드는 방식을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특히 사용자의 동선과 생활 방식까지 고려한 배치 덕분에, 마치 누군가의 집에 초대된 듯한 경험을 제공한다.

 

©Audo Copenhagen

코펜하겐의 인기 브런치 카페 ‘울프 앤 콘스탈리(Wulff & Konstali)’도 입점해 있다. 맞춤형 브런치와 건강한 메뉴, 감각적인 공간 디자인을 통해 브랜드의 라이프스타일을 미식 경험으로 확장한다.

상층부에는 부티크 호텔 ‘오도 레지던스Audo Residence’가 있다. 꼭대기 층의 로프트 구조를 살린 객실은 노출된 목조 천장과 오크 파켓 바닥, 절제된 색감으로 아늑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오도의 가구와 조명, 큐레이션된 예술 작품이 조화를 이뤄 브랜드의 미감을 밀도 있게 체험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투숙객은 단순한 숙박을 넘어 브랜드가 제안하는 삶의 방식을 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페인트로 완성한 감각의 집, 세인트 레오 하우스

꼭대기에 자리한 부티크 호텔 '오도 레지던스'의 모습 ©Audo Copenhagen
쇼룸, 전시장, 스튜디오, 카페가 유기적으로 연결된 세인트 레오 하우스 ©St. Leo

한때 창고였던 건물이 색과 감각의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코펜하겐 노르드하운에 자리한 세인트 레오 하우스(House of St. Leo)는 덴마크의 프리미엄 페인트 및 마감재를 제작하는 덴마크 브랜드 세인트 레오(St. Leo)가 조성한 공간이다. 공간에 깊이와 질감을 더하는 감각적인 제품으로 주목받는 브랜드답게 이곳은 쇼룸과 전시, 스튜디오, 카페가 유기적으로 연결된 구조 안에서 브랜드의 철학을 입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구성됐다. 

 

공간 설계는 디자인 듀오 ‘스페이스 코펜하겐(Space Copenhagen)’이 맡았다 기존 창고의 높은 천장과 노출 콘크리트 벽, 거친 재료감은 유지한 채 섬세한 색과 빛, 질감을 덧입혔다. 산업 건축의 물성을 보존하면서도 브랜드가 지향하는 ‘절제된 우아함’을 건축적으로 구현했다.

기간 공개한 바이오 페인트와 라임 페인트 신제품을 공간 안에 적용한 모습 ©St. Leo

한편 지난 <3 Days of Design> 기간 동안 세인트 레오는 두 가지 친환경 페인트 신제품을 공개했다. 생물 유래 성분으로 만든 ‘바이오 페인트’는 갤러리스트 티나 세이덴파덴 부스크Tina Seidenfaden Busck와 협업해 다채로운 색감을 선보였고, ‘라임 페인트’는 노르드질란 해안에서 영감받은 은은한 색조로 공간의 질감을 강조한다. 이와 함께 열린 전시 <Where Colours Unfold: Art, Craft, and all Things Beautiful>는 예술과 공예, 색의 감각을 아우르며 브랜드의 미감을 입체적으로 소개해 눈길을 끌었다.

조선소의 흔적을 품은 미술관, 코펜하겐 컨템포러리

B&W의 옛 용접 공장B&W의 옛 용접 공장에서 미술관이 된 코펜하겐 컨템포러리(Copenhagen Contemporary) ©Katrine Jungersen Hansen

코펜하겐 컨템포러리는 클래식한 미술관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과거 이 부지는 덴마크를 대표하는 조선소 부르마이스터 앤 웨인(Burmeister & Wain)의 대형 용접 공장이었으나, 지금은 동시대 미술의 실험 정신을 담아내는 전시장으로 재탄생했다.

코펜하겐 컨템포러리(Copenhagen Contemporary)이 자리한 레프살뢰에(Refshaleøen) 섬 일대 모습 ©Adam Mørk

리노베이션은 덴마크 건축가 도르테 만드루프Dorthe Mandrup가 맡았다. 웅장한 철골 구조와 350미터 길이의 산업 공간을 보존하면서도 새로운 층위를 더하는 방식으로 공간을 재구성했다. 외벽은 오랜 세월의 흔적이 묻은 벽돌과 유리섬유, 철재 프레임을 그대로 유지하고, 보수와 덧댐은 강철과 유리를 활용해 기존의 거친 질감과 조화롭게 이어지도록 했다. 출입구에는 선박 제작소의 역사를 기리는 의미로 코르텐 강판을 적용한 점도 눈길을 끈다.

Aftershock, 2021 © James Turrell, Installation view at Copenhagen Contemporary, 2024. Photo by David Stjernholm.
좌) Monster Chetwynd, A Feather in your Hat!, 2025. Big Red Hat Shop, 2025 Installation view at Copenhagen Contemporary, 2025 Photo: Anders Sune Berg 우) Emma Talbot, Are You a Living Thing That Is Dying or a Dying Thing That Is Living?, 2025. Installation view at Copenhagen Contemporary, 2025. Photo: David Stjernholm

코펜하겐 컨템포러리는 조각, 설치, 퍼포먼스 등 대형 작업에 최적화된 환경을 갖췄다. 최근에는 빛의 예술가 제임스 터렐(James Turrell)의 몰입형 설치작 <Aftershock>를 상설 전시로 공개했으며, 올라퍼 엘리아슨(Olafur Eliasson), 아이 웨이웨이(Ai Weiwei), 타라 도노반(Tara Donovan) 등 세계적인 작가들의 개인전도 선보여 왔다. 에마 톨벗(Emma Talbot), 몬스터 체트윈드(Monster Chetwynd), 군 고르딜로(Gun Gordillo) 등 실험적인 작가들의 전시도 이어지며, 동시대 미술의 다양한 흐름을 아우르고 있다.


이정훈 기자
취재 협조 및 자료 제공
  덴마크 디자인뮤지엄, 압살론, 오도 하우스, 세인트 레오, 코펜하겐 컨템포러리

이정훈
독일 베를린에서 20대를 보냈다. 낯선 것에 강한 호기심을 느끼며 쉽게 감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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