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규모 양조장에서 만드는 개성 있는 맥주를 뜻하는 ‘크래프트 맥주’. 1970년대 미국에서 크게 성장한 크래프트 맥주 시장은 국내에서도 2000년대 후반 이후 꾸준히 성장해 왔다. 한국수제맥주협회에 따르면 국내 크래프트 맥주 시장은 1500억원 대(작년 기준), 업체는 160여 개에 달한다. 대기업에서 생산하는 ‘라거(Lager)’ 이외에 다양한 스타일의 맥주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크래프트 맥주 시장도 함께 성장한 것. 전국 방방곡곡 대표 양조장이 들어섰고 펍이나 음식점에서도 쉽게 크래프트 맥주를 접할 수 있는 요즘이다.
맥주 양조장은 넓은 부지가 필요해 교외 지역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은데 서울 한복판에 자리 잡은 브루어리도 있다. 서울브루어리는 2018년 합정에서 론칭한 서울 태생 크래프트 맥주 브랜드다. 가정집을 개조한 합정점, 상가 건물에 위치한 한남점에 이어 최근 4월, 성수동 연무장길에 플래그십 스토어 개념 공간인 성수점이 문을 열었다. 건물 전체를 양조장과 탭 하우스(tap house), 복합 문화 공간 용도로 설계 및 시공한 공간으로 지하까지 총 7개 층, 약 350평 규모다. 노출 콘크리트와 나무 패널, 유리블럭이 인상적인 외관과 단정하지만 브루어리 특유의 활발함이 느껴지는 내부까지. 성수동의 지역 분위기와 어우러지면서도 서울브루어리만의 개성이 묻어난다.
“저는 맥주가 아닌 공간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서울브루어리 이수용 대표는 성수점이 서울브루어리가 지향하는 문화를 펼쳐 보일 수 있는 무대라고 소개했다. 다양한 크래프트 맥주와 음식 그 이상의 어떤 것. 맥주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맥주를 둘러싼 다양한 문화가 피어나고 섞이고 퍼져나갈 수 있는 장을 꿈꾼다. 그래서 이곳은 매일 신선한 맥주를 만들어 내는 양조장이자 탭하우스 그리고 카페, 다이닝 레스토랑, 라이브 공연장, 클럽, 플리마켓, 팝업 스토어가 일어나는 복합문화공간이다. 전 세계에서 예를 찾아볼 수 없는 수직 양조장 시스템, 성수동의 지역 맥락을 살린 공간 디자인, 크래프트 브루어리 문화와 브랜딩 그리고 맥주 이야기까지 <캐비넷>에서 총 3편에 걸쳐 자세히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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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부터 루프탑까지, 층마다 설계한 경험 디자인
서울브루어리는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연무장길 대로에서 한 블럭 들어선 골목에 있다. 건물 앞을 마당으로 터놓아서 실제 건물은 안쪽으로 들어서야 자세히 보이는데 좁고 긴 부지 특성상 층마다 공간의 목적을 나눈 것이 특징이다. 창호 전체가 열리는 오픈형 구조의 1층 매장은 카페 겸 탭룸 레스토랑으로 맥주뿐 아니라 커피와 다양한 음식 메뉴를 제공한다. 2층은 탭하우스 전용 공간으로 맥주와 함께 다양한 음식 메뉴를 맛볼 수 있다. 3층은 서울브루어리에서 엄선한 내추럴 와인과 전문 셰프가 제공하는 파인다이닝을 경험할 수 있는 다이닝 공간. 양조 시설을 바라보면서 식사할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지하와 4층은 맥주가 만들어지는 양조장으로 보통 브루어리 투어 때 공개된다. 5층 컬처 홀(Culture Hall)에서는 시즌별로 재즈 공연이나 라이브 공연, 밋업, 전시 등 다양한 예술 문화 행사들이 열린다. 바로 위 루프탑과 연계해 페스티벌 같은 행사도 기획 중이다.
서울브루어리 층별 구성
옥상 | 루프탑
5층 | 컬처 홀
4층 | 양조장(브루어리)
3층 | 다이닝 & 양조장
2층 | 탭하우스
1층 | 탭하우스 & 카페
지하 | 양조장 & 물류 공간
Interview with
서울브루어리 이수용 대표
홍익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디벨로퍼, 부동산 컨설턴트 등에서 경력을 쌓다가 평소 좋아하던 크래프트 맥주 씬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되었다. 2018년 합정동에 서울브루어리를 오픈하면서 서울의 다채로움을 담은 브루어리를 만들어 나가려 노력중이다.
더퍼스트펭귄(T-FP) 최재영 대표
건축, 공간, 브랜드를 다루는 크리에이티브 스튜디오, 더퍼스트펭귄(T-FP)의 최재영 대표. 더퍼스트펭귄은 공간 디자인은 물론 브랜딩과 건축까지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활약중이다. 서울브루어리 성수점의 건축 설계와 공간 디자인을 진행했다.
— 서울브루어리는 지난 4월 22일 정식 오픈했는데요, 가오픈한 날짜인 3월 17일도 의미 있는 날이었다고요.
이수용 (이하, 이): 3월 17일은 서울브루어리의 첫 맥주인 ‘골드러쉬 캘리포니아 커먼’이 출시된 날이에요. 딱 5주년을 맞아 성수점을 여는 것이 목표였는데 건물 일부 시공이 덜 끝난 부분이 있어서 그러지 못했어요. 대신 정식 오픈 전에 여러 가지 테스트를 해보기 위해 가오픈 기간을 두었죠. 4월 22일도 나름 의미 있는 날이에요. 지구의 날이잖아요. 서울브루어리의 시그니처 제품 중 하나인 ‘페일 블루 닷’이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에서 나오는 ‘희미한 푸른 점(Pale Blue Dot)’에서 영감을 받은 IPA 맥주거든요. 저 멀리 우주에서 보면 희미한 점일 뿐인데, 이 지구에서는 사람들끼리 온갖 욕심으로 인한 전쟁, 비극이 일어나요. 그러지 말고 서로 즐겁게 행복하게 살았으면, 지금만큼은 좋은 사람들과 기분 좋은 맥주를 마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지은 이름이죠.
— 외관부터 내부까지 절제된 소재와 간결함이 돋보이는 공간인데요. 공간 콘셉트를 어떤 방향으로 진행했는지 궁금합니다.
최재영 (이하, 최): 일단 이 공간은 양조장이라는 정체성이 제일 중요했어요. 그다음이 이곳이 위치한 성수동이라는 지역과의 맥락이었죠. 바깥에서 보면 창호를 통해 양조 기계들이 언뜻 보여요. 양조장, 성수동, 공장 이 세 가지 키워드가 서울브루어리의 핵심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내부 모습을 거리낌 없이 노출할 수 있었어요. 그런 요소들이 이곳이 탭하우스일뿐 아니라 브루어리 공간이라는 것을 명징하게 드러내죠.
조형적인 콘셉트는 직선적이고 담백하게 자신의 신념이 깃든 공간. 그것이 서울브루어리가 갖고 있던 언어라고 생각해요. 거기에 저희가 하나 추가한 건 ‘원기둥’이라는 조형감이예요. 양조장에서 양조 탱크 보셨나요? 맥주를 만드는 커다란 탱크가 큰 원기둥 모양이잖아요. 그리고 건물 전체에 설치된 설비 배관들도 원통형이고, 테이블에 올려진 맥주잔, 맥주캔, 케그…맥주라는 분야는 원기둥이라는 조형미 감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고 봤어요. 직선적이고 단조로운 베이스 위에 엘리베이터 홀이 커다란 원기둥으로 건물 전체를 관통하는 느낌이라면, 맥주 배관들은 그 주변의 공간을 채우는 느낌이 들죠.
— 1층 공간은 외부 창문이 ‘ㄱ’ 자로 모서리면이 모두 개방되는데요. 앞 야외공간까지 이렇게 열리는 공간은 처음 본 것 같습니다.
최: ‘열린다’라는 것은 외부와의 연결을 뜻해요. 이수용 대표가 늘 크래프트 비어의 개념과 정신, 지역과의 소통을 강조했거든요. 오늘날의 성수동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빠르게 변화하는 동네잖아요. 그러다 보니 지역과의 맥락보다는 본인의 이야기만 하는 곳도 많아요. 서울브루어리는 소통을 하는 곳이거든요. 그런 점들을 어떻게 공간으로 풀 수 있을까 했고, 이 앞에 마당을 비운 것도 그런 이유 중 하나예요. 현실적으로 본다면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 날씨 특성상 계속 이렇게 열어두진 못하죠. 그래도 이런 제스처를 취하는 건 의미가 있다고 봐요.
이: 늘 자유롭고 캐주얼한 공간을 꿈꿔 왔어요. 열린 공간은 제가 지속해 얘기했던 부분이고, 얼마큼 열리게 할 것인지 어떻게 열리게 하는지 많이 논의한 끝에 T-FP에서 솔루션을 주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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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동의 맥락을 잇는 공간
성수동 일대는 신발 공장, 철물점, 인쇄소, 가죽 가게들이 몰려 있던 공장지대였다. 성수동 2가에 위치한 연무장길은 기존의 공간들을 내부 리뉴얼한 가게들이 즐비하다. 거친 콘크리트, 붉은 벽돌, 목재, 쇠 파이프… 서울브루어리는 성수동에서 발견할 수 있는 여러 소재와 공간의 요소들을 추출하고 압축해 건물 소재에 적용했다.
— 성수동에서 찾은 다양한 요소들을 건축에 적용했다고 하셨어요.
최: 성수동이라는 지역과의 맥락을 잇는 공간 그러면서도 독특한 공간이 되길 바랬어요. 성수동은 공장단지였고, 이렇게 많이 변화한 지금도 곳곳에 제조나 생산시설들이 여전히 남아있어요. 건축과 인테리어 모든 개념 안에 성수동에 있던 원래 요소들을 추출하고 압축해 적용했어요. 노출 콘크리트의 느낌이라든지, 직선적인 구조들이 반복해서 만들어지는 패턴이라든지… 내외장재를 믹스하는 것도 시도해 보고 나무 소재도 더 많은 부분 적용하려고도 했죠. 결과적으로 지금 외관은 나무를 붙이는 대신 나무의 결을 살린 패턴을 활용했어요. ‘쏘우 컷(saw cut)’이라고 톱으로 자른 거친 표면의 느낌이 나죠. 층마다 설치된 나무는 비텍스(vitex)라는 원목을 썼어요. 하드우드 원목은 종류가 정말 많은데 서울브루어리에는 밝은 느낌의 원목이 잘 어울릴 것 같았죠.
성수동에는 예전 건물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예전 우리나라에서 7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많이 썼던 유리블록 소재들을 찾아볼 수 있거든요. 지금 2023년에 짓는 건물에 굳이 과거의 유리블록을 쓸 필요는 없었지만, 지역의 맥락을 받아들여서 적용한 소재죠. 그리고 유리블록은 낮에 자연광을 안으로 들이고 밤에는 내부 인공광을 밖으로 분출해요. 형상은 보이지 않고 빛만 관통해 오가는 소재라는 것도 재미있어요. 밤에 보면 서울브루어리 안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나 에너지들이 밖으로 뿜어져 나가는 것 같이 보이죠.
— 층고가 높은 것도 독특합니다.
부지 자체가 좁고 긴 여건상 원근감을 최대한 주기위해 층고를 높이는 전략을 썼어요. 5.5m가 건축법에서 허용하는 최고 높이거든요. 그래서 서울브루어리가 지상 5층 건물이지만 옆 건물과 비교하면 훨씬 높아요. 층고가 낮은 건물로 비교하면 지상 10층까지도 나올 수 있는 높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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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자체가 브루어리!
수직 배관 시스템의 비밀
서울브루어리는 전 세계 어디 내놔도 독특한 양조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수직으로 긴 건물이라 선택한 방법이긴 하지만 그 시스템은 놀랍도록 기술적이다. 서울브루어리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는 순간에도 위아래로 배관을 통해 몰트와 맥주가 층을 오가며 이동하고 만들어지고 있으니까.
— 성수점을 만들면서 에피소드는 없었나요?
이: 에피소드라.. 건축 초반에 땅을 팠더니 6미터 정도 오염 되어 있었어요. 생각지도 못했던 변수였죠. 정화 비용도 들었지만 공사 시간이 많이 늘어났어요. 양조 설비들을 이미 계약해 놨는데 기간이 틀어지니 하루에 약 백만원 씩 창고 비용이 발생했고요. 공사도 공사지만 플랜트* 설비 그리고 시설들을 공간 안에 설치하는 것까지 지난한 과정들이 있었어요.
최: 이런 프로젝트는 건축도 중요하지만, 건축만큼 힘들고 까다로운 게 플랜트 설비거든요. 지금 서울브루어리는 지하와 4층에 양조장이 있는 구조예요. 양조 탱크 하나에 맥주가 가득 차면 약 10톤이에요. 이런 양조 탱크를 여러 개 넣으려면 하중을 어떻게 할지 구조 설계도 필요하거든요. 양조장만 생각하면 1층에 양조 설비를 넣는 것이 맞겠지만 그런데도 1층과 2층을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겠다는 대표의 의지가 있었죠.
이: 지금 만약 다시 한다고 하면 저는 못 한다고 생각해요. 누가 4층에 양조장을 넣고 이런 배관 시스템을 넣겠어요.(웃음)
— 브루어리 어디에서도 배관을 볼 수 있습니다. 수직 양조 시스템은 어떤 구조로 설계되어 있나요?
이: 지하는 맥주의 시작이자 완성인 공간이에요. 재료를 보관할 수 있는 창고, 양조 기계, 캔이나 케그를 만드는 공정 시스템이 있는 곳인데요. 원자재와 완제품이 드나들 수 있게 탑차와 기계차도 드나들 수 있는 구조로 기획했어요. 맥주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면, 지하에서 몰트를 갈아서 3층으로 보냅니다. 몰트는 3층 브루 하우스(Brew House)에서 당화 과정을 거쳐요. 생성된 맥즙은 4층 양조장으로 보내 발효과정을 거쳐 맥주가 되죠. 그 맥주를 다시 지하로 내려서 숙성 과정을 거친 뒤 패키지 과정을 거쳐 완성품으로 출고합니다. 만들고 난 뒤 몰트 찌꺼기 역시 지하로 바로 내려서 버릴 수 있게 만들었어요.
수제 맥주는 몰트와 홉을 다양하게 써요. 종류마다 무게를 재서 넣는 작업이나 패키징할 때 필요한 일부 수작업 과정을 빼고는 모두 자동 시스템으로 만들어 두었어요. 그리고 지금 건물 구조상 전자동이 아니면 할 수도 없고요. 브루어들이 위아래로 왔다 갔다 하면서 만들긴 쉽지 않으니까요. 시스템은 핸드폰으로도 제어할 수 있어요. 유럽에서 탑-티어(top-tier) 브루어리들이 쓰는 첨단 기술들을 접목했습니다.
*플랜트(Plant): 공장에서 생산할 수 있는 설계, 조달, 시공 등이 복합된 시설 설비를 말한다. 브루어리에서는 양조 설비와 시스템 설계, 현장 시공 등이 해당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