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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영은
2021-11-16

말을 건네는 작가의 방, 성립

성립 작가의 작업실 한 켠에 자리 잡은 애장품 5.

점이 모여 선을 이루고, 선이 모이면 면이 된다고 했던가. 그러나 작가 성립의 그림은 선이 모여 사람이 되고, 나무가 되며, 건물이 된다. 선으로 일상의 순간을 날카롭게 포착하는 성립 작가의 그림은 선 하나만으로도 풍부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는 걸 알려준다.

 

 

성립 작가의 그림이 섬세하게 다가오는 이유 중 하나는 그의 글 때문이다. 벌써 2권의 에세이집을 낸 성립 작가는 개인전을 하면 그림 옆에 자신이 쓴 글을 배치했다. 작가의 심정이 솔직하게 쓰인 글과 그림에 공감한 관람객들은 그에 화답하듯 일기와도 같은 소감을 잔뜩 남긴다.

 

여러 통로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보여준 성립 작가지만 사실상 그의 개인적인 취향을 직접적으로 보여준 적은 없었다. 그런 면에서 디어스 판교에서 열린 성립 작가의 전시는 그의 솔직한 취향을 볼 수 있는 기회다. 지금까지 협업한 작품과 작업실을 장식했던 애장품을 가져와 전시했고, 방에 놓인 의자까지 직접 구매해서 꾸몄다. 작가의 손길이 닿은 작은 소품 하나, 하나가 말을 거는 마법에 1인 가구를 위한 공간이 이야기로 가득 찬 신기로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Interview with 성립

 

 

오랜만이에요. 그동안 어떻게 지내고 계셨어요?

연말이 다가와서 그런지 갑자기 일이 몰렸어요. 한창 일하다가 잠깐 1~2주 정도 시간이 생겨서 쉬고 있는 중입니다.

 

 

디어스 판교의 한 공간을 작가님의 방처럼 꾸민 전시를 열고 있죠?

처음에는 이 공간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고민되었어요. 화이트 큐브가 아닌 주거 공간이니까요. 하지만 바로 그 사실에서 힌트를 얻어서 오픈 스튜디오처럼 풀었어요. 생각해 보니까 그동안 제 사생활이나 취향이 드러나는 전시를 한 번도 안 했더라고요. 그래서 제 물건을 갖다 두었죠. 그러다 보니까 공간이 꽉 찼어요.

 

 

주거 공간에서 전시하는 방식이라서 더 재미있었어요.

저도 평소와 다른 방식이라서 재미있었어요.

 

 

전시를 둘러보니까 작가님의 애장품으로 채워졌더라고요.

작업실에 있는 물건들을 갖다 둔 거라 전시장에 오면 친숙한 느낌이 들어요. 제 작업실은 사연과 추억이 담긴 물건들도 꽉 차 있거든요. 지금은 전시 공간에 많은 걸 갖다 둬서 작업실이 휑해요.

 

 

오래전에 했던 인터뷰에서 나만의 공간이 생기는 것이 목표라고 하셨어요. 작가님이 꿈꾸던 나만의 공간은 어떤 곳이었나요?

요즘 그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하고 있어요. 작업과 관련된 물건들이 많은 곳이 내 공간일까, 아님 정말 아무 생각을 안 하고 쉴 수 있는 곳이 내 공간일까… 작업실에서는 끊임없이 생각을 해야 하니까 머리를 비울 수 없거든요. 항상 작업과 휴식의 공간이 분리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여기 전시 공간도 거실은 제 작품과 물건으로 가득 채워졌지만, 침실은 작업과 관련된 것이 없어요.

 

 

지금은 작업실과 주거 공간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나요?

네. 집에는 작업과 관련된 물건들이 하나도 없어요. 얼마 전에는 집에 있던 데스크탑도 작업실로 옮겼어요. 그래서 집에 기계는 스피커 하나밖에 없어요. 작업실과 집의 분위기가 정말 달라요.

 

 

작업실 분위기가 궁금해지는데요. 일반적으로 작가의 작업실에 대한 환상이 있으니까요. 거대한 캔버스들이 세워져 있고, 여기저기 그림 도구가 막 흩어져 있고…

작업실은 일부러 방처럼 꾸몄어요. 가고 싶게요. 하하. 작업실에 도착하면 커피 마시면서 주변을 둘러보는데, 작업실에 좋아하는 것들이 많아서 보고 있으면 마음이 덩달아 좋아져요. 작업 전 예열하는 시간이 길어서 이런 과정이 중요해요.

 

 

그렇다면 작업실에서 가장 중요한 조건은 무엇인가요?

소리요. 소리가 거슬리지 않아야 집중이 잘 돼요. 그래서 종종 한 곡만 반복 재생을 할 때도 있어요. 아예 음악 없이 작업할 때도 있고요.

 

 

이번 전시 공간에서 가장 신경을 쓴 부분은 어디인가요?

소파와 의자가 놓인 공간이요. 제 그림이 없는 유일한 공간이거든요. 또, 제가 추구하는 대화의 구조를 생각하면서 소파와 의자를 배치했어요. 사람들이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편하게 대화할 수 있도록 소파 옆에 의자를 더 두었죠.

 

 

그러고 보면 작가님은 대중과 소통을 많이 하네요. 전시장에도 관람객이 방명록을 쓸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두고, SNS를 통해 팬들과 소통하잖아요. 누군가와의 대화가 작업에 도움이 되나요?

직접적인 힘이 되지 않지만, 어떤 한 걸음이 되죠. 작업을 지속하려면 누군가와의 대화가 계속 필요하거든요.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건 일방적인 소통 방식이에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을 그림과 글로 전달하면 관람객은 보기만 하니까요. 그런데 저만 계속 말하면 상대방은 지루하거든요. 타인과 단절되면 작업이 정체되는 것 같아서 일부러 관객들의 피드백을 더 열심히 받으려고 해요. 제 생각에 공감하는지 질문을 던지기도 하죠.

 

 

팬들의 반응을 보면 작가님의 작업에서 많은 위로를 받는다는 걸 느껴요. 그림뿐만 아니라 글에서도 공감을 많이 하더라고요. 그래서 궁금했어요. 글에 대한 영감은 어디서 받는지요.

전에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는데, 지금은 어느 정도는 자기검열을 해요. 사적인 부분을 제거하고 거시적인 관점으로 이야기하니까 관객들이 더 깊숙하게 들어오더라고요. 개인의 세세한 부분까지 말하면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다는 걸 알았어요. 힌트만 던져줘도 사람들은 스스로 상상하면서 공감을 해요. 그림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이전 개인전들을 봐도 작가님에게 글과 그림은 뗄 수 없는 관계임을 알겠어요.

그림을 그리려면 글이 필요하고, 글을 쓰려면 그림이 필요해요. 이런 방식으로 계속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이번 전시를 소개하는 글에서 ‘낮에는 그림, 밤에는 글’이라는 문구를 읽었어요. 실제로도 작업하는 시간이나 방식이 다른가요?

그런 편이죠. 글을 쓴 뒤에 그림을 그리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그림은 계획적으로 작업할 수 있거든요. 또 캔버스와 도구들도 준비해야 하고요. 반면에 글은 즉흥적인 요소가 필요해서 주로 생각이 많고 집중이 잘 되는 밤에 작업해요. 게다가 글은 떠올랐을 때 바로 쓰는 편이라 장소에 구애받지 않아요. 스마트폰에 바로 쓸 수도 있으니까요.

 

 

요즘 그림에서는 어떤 걸 표현하고자 하나요?

초보 운전자가 시야가 좁듯이, 저도 초창기에는 시야가 좁았던 것 같아요. 사람의 표정과 제스처,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간격에 집중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시야가 넓어지면서 그림과 저의 간격도 넓어졌어요. 그림과 좀 떨어진 곳에서 내려 보기도 하고, 때로는 아래서 올려 보기도 하죠. 그래서 지금은 이렇게 변화한 시점으로 무엇을 더 담을 수 있을지를 고민해요.

 

 

초반에는 사람을 중점으로 그렸는데 언제부턴가 자연이 등장했어요.

생각이 많아지면 산책을 하는데 밤에 자주 해요. 밤 산책을 하면서 본 나무와 식물들은 저와 달리 너무 멀쩡해 보여서 얄미웠어요. 나는 계속 움직이고 생각도 해야 하는데 나무와 식물들은 차분하게 서 있으니까요. 그런데 어느 날, 이들이 사람처럼 보이고, 생명력이 느껴지고, 제자리에 묵묵하게 서 있는 게 존경스럽기도 하면서 자연에 관심이 생겼어요. 또, 각자 다른 환경에서 자라는 나무와 식물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모습이 인간 사회와 닮았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 안에서 저 또는 다른 누군가의 모습도 발견했죠.

 

 

전시, 브랜드 콜라보레이션, 아트 클래스, 최근 NFT 작품 경매까지 하셨죠. 장르와 영역 구분 없이 활발하게 활동하는데, 이 중 제일 재미있는 건 뭔가요?

다 재미있어요. 다양한 브랜드와 콜라보레이션을 하면서 배운 점도 많고요. 하지만 지금 제일 기대되는 건 내년에 열릴 개인전이예요. 머리 속에 있는 아이디어들이 구현될 생각을 하면 엄청 설레요.

 

 

작가님의 꿈은 무엇인가요? 10년 뒤, 아니 더 먼 미래도 괜찮아요.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앞으로 10~20년만 그림을 그리고 내려놓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그때까지 그림을 그리려면 계속 공부하고 하고 싶은 말이 있어야 할 텐데 과연 제가 거장들처럼 끊임없이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고요. 그러지 못해서 서서히 묻히고 사람들 기억 속에서 잊히는 것보다 쏟아낼 만큼 다 쏟아내고 깔끔하게 은퇴하고 싶어요.

 

 

성립의 원스리스트!

작업실 한 켠을 차지한 애장품 5.

 

작업을 대하는 솔 르윗의 생각과 태도를 정말 좋아해요. 그래서 학부생 때, 그의 그림을 3D 조형물로 제작했어요. 작업실에 두고 계속 보면서 작업의 예열을 올려요.

하이엔드 브랜드와 처음 진행한 콜라보레이션이라서 더 기억에 남아요. 스테인리스 텀블러에 제 그림을 레이저로 각인한 제품으로, 한정판이라서 저도 한 쌍 밖에 가지고 있지 않아요.

옛날부터 포르쉐를 진짜 좋아했어요. 그래서 언젠가 포르쉐를 사겠다는 꿈이 있었죠. 이는 제가 포르쉐를 사면서 받은 파일런예요. 포르쉐는 구매 시 차주의 이름과 포르쉐 모델명을 새긴 트로피(파일런)를 주거든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그저 차를 사고 받은 오브제이겠지만, 저에게는 꿈을 이뤘다는 증표와 같아요.

이번 전시에서는 팬들이 찍어준 폴라로이드 사진과 편지도 진열해 두었어요. 개인전을 하면 사진을 찍어서 선물해 주는 팬들이 있어요. 이 사진을 보면 팬들에게 감사하기도 하고, 그 때의 기억이 살아나요. 작업실에는 팬들에게 받은 편지만 모은 박스도 있는데 너무 소중한 거라서 전시하지 못했어요.

일관된 분위기에서 작업하는 걸 선호하기 때문에 한 곡만 반복 재생하거나, 너무 튀지 않는 노래를 들어요. 시가렛츠 에프터 섹스의 ‘EP.1’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앨범이기도 하고, 수록곡이 모두 조용한 선율이라서 작업할 때, 앨범 전곡을 재생할 때가 많아요.

 

Everyday Dreaming

기간 2021.10.22 – 11. 21

장소 디어스 판교 5층 (경기 성남시 수정구 창업로 18)

예약

 

 

취재 및 자료 협조 성립, 디어스

에디터
CURATED BY 허영은
다양성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든다고 믿는다. 그래서 숨겨진 이야기들을 찾아내서 보고, 듣고, 읽고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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