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04

알츠하이머 환자들이 길을 잃지 않는 마을

유럽의 구시가지를 닮은 요양 시설 ‘랑드 알츠하이머 마을’
알츠하이머 환자들이 병원이나 요양 시설에서도 홀로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전과 같은 일상을 이어갈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프랑스 랑드주 닥스에 있는 ‘랑드 알츠하이머 마을(Village Landais Alzheimer)’은 알츠하이머 환자 입주자들에게 의료 및 생활 케어와 함께 최대한의 일상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요양시설이다.
알츠하이머 환자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마을
알츠하이머 환자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마을

‘알츠하이머 마을’을 조성할 당시 가장 중요했던 첫 번째 조건은 입주민들의 독립적인 생활을 뒷받침할 수 있도록 ‘건축물이 친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을을 설계한 덴마크 건축 회사 노드 아키텍츠(NORD Architects)는 환자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도록 유럽의 옛 구시가지의 광장 구조를 참조했다. 시설 부지 가운데에 커다란 광장 ‘라 바스티드(La Bastide)’가 있고, 광장의 사면을 상점가가 둘러싸고 있는 형태다.

 

상점가에는 마트, 식당, 베이커리, 카페, 미용실 등 환자들의 이용 빈도가 높은 생활 편의 시설들이 들어서 있다. 또 여러 행사와 음악 공연 등이 열리는 강당, 예술이나 체육 활동을 할 수 있는 액티비티 룸, 미디어 도서관도 있다. 모든 것이 한눈에 들어오며 자신의 모습 역시 남들의 눈에 쉽게 띄는 광장에서는, 인지 능력이 저하되어 있는 환자들이 홀로 다니다가 길을 잃었을 때에도 대처하기가 비교적 수월하다. 금세 다시 목적지를 찾거나,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거나,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오래된 유럽 도시에 실제로 있는 구시가지를 축소해놓은 모양새이기 때문에 입주민들에게 이미 익숙한 구조라는 장점도 있다. 노드 아키텍츠는 알츠하이머 환자들의 인지 능력이 계속해서 변화하기 때문에 이런 장점들이 있는 개방형 구조가 적합하다고 보았다.

알츠하이머 환자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마을

광장과 상점가를 빠져나가는 길은 4개다. 길들은 각각 4개의 서로 다른 주거 구역으로 연결된다. 4개의 주거 구역마다 각각 30명씩의 주민이 산다. 각 구역은 7-8명이 셰어하우스처럼 살아가는 4개의 가구로 나뉘어, 환자들은 시설 밖에서처럼 평범하게 크고 작은 여러 단계의 커뮤니티를 이루어 살아갈 수 있다.

 

건물로 향하는 길과 건물 주변에는 정원과 연못이 여러 곳 있다. 정원의 나무와 꽃들은 환자들에게 좋은 감각적 자극이 되어줄 수 있다. 혼자, 혹은 이웃이나 지인들과 함께 돌볼 수 있는 공유 텃밭도 있다. 작은 농장에는 환자들의 정서 케어를 위한 당나귀 두 마리와 닭들이 있다. 환자들은 전부 5헥타르가 넘는 넓은 녹색 공간에서 산책하거나 머물며 휴식을 즐길 수 있다. 모든 길은 안전한 곳으로 향하도록 고안되어 있고, 막다른 길 없이 둥근 형태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덕분에 환자들은 길을 잃을 걱정 없이 독립적으로 이동할 수 있다.

 

광장과 산책로, 내부 공용 시설들은 외부인에게 개방되어 있다. 인근 주민들은 ‘알츠하이머 마을’ 안에 들어와 산책을 할 수도 있고, 마트나 미용실을 이용할 수도 있다. 이를 통해 환자들은 시설에 거주하면서도 그 안에 고립되지 않고 외부 환경 및 지역사회와 접촉하고 소통할 수 있다.

알츠하이머 환자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마을

환자들의 행복하고 존엄 있는 삶을 중시하는 이곳은 사실 프랑스 주정부에서 연구 목적을 겸하여 기획한 공공 시설이다. 랑드주 정부는 네덜란드에서 이미 운영 중인 유사한 시설에서 힌트를 얻어, 환자들이 편안하게 살아가면서 동시에 그런 환자들과 함께 알츠하이머의 새로운 치료법을 연구하는 의료 센터가 한 공간에 있는 요양원을 만들고자 했다. 의료진과 방문 연구진이 이곳에 함께 거주하거나 수시로 오가며 치료와 연구에 참여한다.

이밖에도 이곳에서는 의료진이 가운이나 유니폼 대신 사복을 입고, 환자들은 개인마다 맞춤형으로 케어를 받는 등 일상을 유지하는 환경을 제공한다. 개인 공간에 있을 때는 입주 전의 일과나 취미 생활, 또 취향을 유지할 수 있도록 권장하고, 시설 밖의 가족이나 친구들과 자주 교류하도록 돕는다. ‘알츠하이머 마을’은 절반 이상 정부 보조금으로 운영하며 입주민들은 1년에 약 2만4000유로를 낸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몇 달 미뤄진 끝에 2020년 하반기에 첫 입주자를 받았다. 환자 120명 중 10명은 60세 미만이다. 의료진과 연구진 및 관리인들을 포함한 직원 120명, 그리고 봉사자 120명이 등록되어 활동하고 있다.

박수진 객원 필자

자료 제공 NORD Architects, Village Landais Alzhei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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