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30

같음과 다름의 관계, 감각의 지평 넓히는 드로잉

미국 현대미술가, 로니혼 개인전 〈Roni Horn〉
전시장 벽에 가지런히 전시된 8개의 드로잉들. 같은 것과 다른 것을 구분하고 짝을 짓다 보면 개체를 구별하고 감각하는 데 열중하게 된다. 최근 중국 허 미술관에서 아시아 최대 규모 개인전을 펼친 현대미술가, 로니 혼이 초대하는 새로운 감각의 세계.
로니 혼(b. 1955) 〈Frick and Fracks〉 2018-2023
Gouache, and/or watercolor on Arches paper 8 units, each 38.1 x 28.6 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8개의 드로잉

국제갤러리의 여러 전시 공간 중 K3(3관)은 별도로 떨어진 건물이다. 암스테르담 건축가 그룹인 SO-IL은 기둥 없이 층고가 높게 만들어 대규모의 설치 작업이 가능한 환경을 만들었다. 그래서 입구에 들어서면 어떤 개체(작품) 하나에 집중이 되는 힘이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는 공간을 텅 비웠다. 대신 벽면마다 드로잉 작품이 걸렸다. 관계의 존재를 끊임없이 탐구하는 로니 혼 작가의 작업이다.

작품은 3X3 배열로 8점이 하나의 작품을 이룬다. 작품이 짝수인 관계로 한 점의 자리는 비워져 있다. 모호하게 불완전한 이 형태는 작가의 주문으로, 전시 때마다 조금씩 변형된다고 한다. 드로잉 시리즈의 이름은 <프릭 앤 프랙스>. 스위스에서 활동하는 코미디 아이스 스케이팅 듀오의 예명에서 차용한 것으로 ‘떼려야 뗄 수 없는’ ‘둘 간의 구분이 불가능한 관계’를 뜻하는 은어이기도 하다. 각 화면에는 과슈나 수채화 물감으로 드로잉한 하나의 도형이 있다. 그 도형은 1:1로 짝을 맞추고 있는데, 그 배치는 무작위적이어서 수없이 눈으로 모양을 좇게 만든다. 이렇게 도형을 비교하고 대조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작품과 소통하며 기호 간의 변주와 관계성을 인식하게 된다.

국제갤러리 3관(K3) 로니 혼 개인전 〈Roni Horn〉 설치전경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내게 하는 일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나는 그리는 사람이라 하겠다.

드로잉이 내 주된 활동이고, 양식이 무엇이든 매체가 무엇이든 내 모든 작품의 공통 분모가 드로잉이다.

– 로니 혼
(2003년 로니 혼이 파울로 헤르켄호프(Paulo Herkenhoff)에게 보낸 편지 중 발췌)

국제갤러리 3관(K3) 로니 혼 개인전 〈Roni Horn〉 설치전경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로니 혼(b. 1955) 〈Frick and Fracks〉 2018-2022
(왼) Gouache, and/or watercolor on Arches paper 8 units, each 38.1 x 28.6 cm
(오) Gouache, and/or watercolor on Arches paper 8 units, each 38.1 x 27.9 cm
Courtesy of the artist and Kukje Gallery사진: Ron Amstutz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유약한 매체를 사랑하는 작가

로니 혼은 늘 쉽지 않은 답을 유도한다. 명료하게 답할 수 없는 작품을 만들고, 관람객들로 하여금 스스로 그것을 감각하고 인지하게 만든다. 또한 작가는 유약한 매체를 사랑한다. 예술가들은 작품의 보존성을 위해 지속 가능한 매체를 선택하기 마련이다. 캔버스에 작업한 유화는 몇백 년이 지나도 관리만 잘하면 거의 그대로다. 아크릴이나 쉽게 변하지 않는 도료 등도 마찬가지. 수채화나 과슈는 물감의 특성상 종이에 스며드는데, 당분간은 괜찮겠지만 유화만큼 지속성이 높은 소재는 아니다. 또 종이라는 소재의 특성상 물리적으로 변색이나 찢어질 염려도 있는 것이다. 이는 작가가 애정하는 것과도 연관이 있다.

국제갤러리 3관(K3) 로니 혼 개인전 〈Roni Horn〉 설치전경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로니 혼은 이전 작업에서도 유리나 물 등 힘을 가하면 가변적이거나 깨질 수 있는 소재를 사용해 왔다. 유리는 뜨겁게 열을 가했을 때는 액체, 식으면 고체가 되고, 물 역시 온도에 따라 기체 형태로 변화하기도 한다. 작가는 고정된 정체성이 아닌 ‘가변적인 상태’를 지닌 것들에 관심을 가져왔다. 수채화 드로잉 역시 미술 시장에서의 고정된 관념을 거부하고, 작업의 근간임을 강조한다.

그런 점을 제쳐 두고라도 드로잉을 하나씩 살펴보는 즐거움과 짝을 이루는 관계를 인지하는 감각을 따라가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전시. 이번 개인전은 11월 16일부터 12월 31일까지 열리며, <프릭 앤 프랙스> 연작 15점이 소개된다.

로니 혼 작가 프로필 이미지
사진: Belén de Benito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로니 혼(b. 1955)은 뉴욕에서 거주 및 활동하고 있으며 로드아일랜드 스쿨 오브 디자인에서 학사, 예일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작가는 산탄데르 보틴 센터(2023), 타이베이 윈싱 아트 플레이스(2023), 하코네 폴라 미술관(2021), 바젤 바이엘러 재단(2020, 2016), 휴스턴 메닐 컬렉션의 드로잉 인스티튜트(2019), 포토맥 글렌스톤 미술관(2017), 아를 반 고흐 재단(2015), 바르셀로나 호안 미로 재단(2014), 함부르크 쿤스트할레(2011),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2004), 파리 퐁피두 센터(2003), 뉴욕 디아예술재단(2001) 등 세계 주요 기관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로니 혼은 최근 중국 포산 시에 위치한 허 미술관에서 아시아 최대 규모의 개인전을 선보이고 있으며 그의 작품은 뉴욕 현대미술관,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바젤 현대미술관, 파리 피노 컬렉션, 그리고 리움미술관을 비롯한 주요 기관에 영구 소장되어 있다.

이소진 수석 기자·콘텐츠 리드

취재 협조 및 자료 제공 국제갤러리

프로젝트
〈Roni Horn〉
장소
국제갤러리 K3
주소
서울 종로구 삼청로 54
일자
2023.11.16 - 2023.12.31
참여작가
로니 혼(Roni Horn)
이소진
헤이팝 콘텐츠&브랜딩팀 리드. 현대미술을 전공하고 라이프스타일, 미술, 디자인 분야의 콘텐츠를 기획하고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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