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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5

디자이너 김현진이 그리는 괴상하고 아름다운 글자

기세 좋게 생동하는 글자들
서울 종로구 일민미술관 외벽에 걸리는 전시 포스터는 거리의 인상을 바꾼다. 일민미술관은 사람도 차도 수없이 오가는 광화문 사거리 대로변에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지난 4월 그 거리의 인상이 또 한 번 바뀌었다. 미술관이 새 전시 <히스테리아: 동시대 리얼리즘 회화>를 선보이며 새로운 포스터를 내건 것이다. 기묘하게 휘어지거나 꼬인 형태가 가득 담긴 포스터는 강렬했다. 흘러내리는 음표 같기도, 기이하게 발아한 씨앗 같기도 한 형태들을 좀 더 들여다보니 글자가 보였다. ‘히스테리아’, 전시의 이름이었다. 과감하고 아름다운 이 포스터를 디자인한 사람이 김현진이다.
일민미술관 외벽에 걸린 〈히스테리아: 동시대 리얼리즘 회화〉 포스터.|디자인: 김현진. 사진 제공: 김현진

글꼴을 주로 다루는 디자이너 김현진은 팟(POT)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한다. 이 이름은 ‘Pretty Odd Type’의 첫 글자를 따서 지은 것. 예쁘고 이상한(Pretty & Odd), 혹은 예쁘거나 이상한(Pretty or Odd) 글자를 그리겠다는 의미가 있다. 물론 있는 그대로 ‘꽤나 이상한(Pretty Odd)’으로 해석해도 문제없다.

김현진은 미국 밴드 패닉! 앳 더 디스코(Panic! At the Disco)의 앨범 〈Pretty. Odd〉를 듣다가 문득 그 단어들을 이름 삼는다. 이 작명 이야기는 그의 어떤 특징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우연에서 얻어진 것은 디자이너 김현진에게 중요한 재료이므로. 다만 날것의 우연을 가공해 누군가의 눈을 사로잡을 수 있게 되기까지는, 무수한 시간과 시도가 쌓여 왔을 것이다. 글자가 어디까지 괴상해질 수 있는지 실험하길 즐기는 디자이너 김현진을 인터뷰했다.

드라마 〈작은아씨들〉 대본집을 위한 타이틀 레터링.|디자인: 김현진. 제작: 플레인아카이브. 이미지 출처: 팟 인스타그램 @pot_works

1. 퀴즈 같은 타이포그래피의 매력

시각디자인을 공부했다고요. 그중 특히 글꼴, 타이포그래피에 빠져든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그 분야의 어떤 점이 매력적이었어요?

사실 시각디자인 학과에 입학하고 나서야 타이포그래피라는 단어를 처음 들어봤어요. 팀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당시 제겐 서체 디자인이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이끌어 나가는 프로젝트처럼 보였어요. 또 이렇게 해라, 저렇게 바꿔라 할 클라이언트도 없이 2,350자가 넘는 글자들을 하나하나 본인이 원하는 대로 만들어도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죠. 글립(Glyph)*을 하나하나 채워 나가는 일에도 쾌감을 느꼈고요. 어떤 콘셉트나 규칙을 많은 글자들에 적용하다 보면 꼭 변수가 생기기 마련이거든요. 예를 들어 ‘다’처럼 간단한 글자에서는 보기 좋았던 특징이 ‘쐋’처럼 획이 빽빽한 글자에 적용되면 어렵게 보이는 경우들이 있죠. 이런 과제를 해결하는 과정이 퀴즈를 푸는 것같이 느껴지기도 해요. 여러모로 푹 빠져들기 좋은 특성을 가진 분야 같아요.

* 글립 글자 하나의 모양에 대한 기본 단위
이미지 제공: 김현진

모든 분야가 그렇겠지만, 글자 디자인이나 타이포그래피 분야 역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잘 가늠이 되지 않습니다. 현진 님은 어떻게 실력을 쌓아 나갔나요.

처음 레터링을 접하고 나선 그냥 무작정 엄청나게 그려댔어요. 몇 년 사이 레터링의 인기가 갑자기 높아지긴 했지만 당시만 해도 글꼴 디자인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극소수여서 동기 100여 명 중에 글꼴에 관심 있는 사람은 저뿐이었어요. 글꼴 디자인을 심도 있게 배울 수 있는 커리큘럼도 드물었고요. 그런데 그때는 사실 누구에게 배워야겠다고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혼자 작업하는 게 마냥 즐거웠어요.

팟을 위한 스케치들.|사진 제공: 김현진

AG 타이포그라피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다가 독립했죠. 연구소에 몸담았던 경험을 들려주세요.

AG 타이포그라피연구소에 입사한 후에, 혼자서 마구 그려댔던 시기의 나는 천둥벌거숭이였음을 느꼈어요. 폰트를 개발할 때 고려해야 할 것, 기획부터 폰트를 배포하는 과정에 필요한 요소 등 많은 것을 AG 타이포그라피연구소에서 일하며 처음 배웠습니다. 연구소 자료 정리처럼 자잘한 업무에서 시작해 AG 초특태고딕 추가자를 개발하는 업무를 거쳐 AG 최정호민부리 글꼴 가족 확장 작업을 마지막으로 회사를 나왔어요. AG 최정호민부리 글꼴 가족 확장 작업은 이미 레귤러(Regular)가 있는 폰트의 미디움(Medium), 볼드(Bold) 굵기를 만드는 일이긴 했지만, 서체 한 벌을 만드는 경험은 처음이었기에 상당히 뜻깊게 생각합니다. 당시 AG 타이포그라피연구소에서는 디자이너 한 명이 글꼴 하나를 도맡아 끝까지 끌고 나가는 체계로 일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또 타인의 피드백을 받아가며 글꼴 작업을 한 경험도 그곳에서 처음 겪었기에 여러 방면에서 많은 걸 배웠습니다.

AG 최정호민부리.|이미지 제공: 김현진

독립한 지도 벌써 2년이 되었다고요. 독립의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학생 때부터 늘 품고 있던 목표가 소규모 스튜디오 운영이었어요. 출퇴근 시간이 정해진 삶이 저에겐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학생 때 인턴 생활을 하며 알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내 작업’을 하는 것에 대한 환상이 있었어요. 회사의 구성원으로 일하는 것보다 혼자 일하고 싶다는 마음을 항상 가지고 있었죠. 아마 학생 때 SNS를 통해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멋진 디자이너를 여러 분 접했고, 그분들을 동경하다 보니 그런 목표를 가지게 된 듯해요.

독립 전후로 어떤 점이 크게 달라졌어요?

동업자나 느슨한 협업 관계로 연결된 사람이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종종 든다는 점입니다. 혼자 일하는 방식이 부담도 적고 편하긴 하지만요. 종종 그런 생각을 하기는 해도, 아직은 장소에 큰 구애를 받지 않으며 일할 수 있고, 원할 땐 갑자기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지금의 자유를 조금 더 누리려 합니다. 독립 전에는 퇴근 후에도 바빴어요. 의뢰받은 개인 작업을 해내야 했거든요. 요즘엔 그와 또 다른 고민이 생겼습니다. 2년을 용케 버틴 스스로가 기특하지만, 더 오래 갈 방법은 무엇인지 생각하고 있어요.

아모레퍼시픽 한율의 ‘날아라 호랑이’ 팝업 스토어 행사를 위한 세가지 레터링과 부적 디자인 작업.|이미지 제공: 김현진

2. 재미있는 시도를 해볼 만한 일

미술관, 출판사, 브랜드, 영상 스튜디오 등 다양한 클라이언트와 작업했습니다. 여러 영역을 오갈 수 있는 이유는 뭘까요?

글꼴을 다루는 덕분에 다양한 매체와 협업할 기회가 늘어난 것 같아요. 학생 때 동기와 선배는 물론이고 교수님께도 “넌 졸업하면 글꼴 디자이너 하면 되겠다”라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다양한 작업을 하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기에 그 말에 다소 반발심을 느꼈어요. 글꼴 디자이너가 되면 한정적인 분야에서만 활동하게 될 것 같았거든요. “저 졸업하면 글꼴 안 할 건데요? 졸전도 글꼴로 안 할 건데요?” 말하고 다녔죠. 근데 결국 졸전도 글꼴 작업으로 하고, 글꼴 디자인을 주로 하는 디자이너가 되어 버렸습니다. (웃음) 결과적으로는 글꼴 덕분에 여러 영역의 작업을 하게 된 셈이에요.

스튜디오 춤의 프로그램 ‘Artist Of The Month’ 를 위한 로고 레터링 작업.|이미지 출처: 팟 인스타그램

작업 여부를 고민할 때 무엇을 고려해요? 어떤 작업을 하려고 하는지도 궁금합니다.

넉넉한 기간과 합리적인 견적을 전제로, 재미있는 시도를 해볼 만한 일을 선호하는 편입니다. 기존의 한글꼴 디자인에서 보기 어려웠던 글자를 그리고 싶다는 나름대로 거창한 목표를 가지고 있어요. 어딘가에 팟을 소개해야 할 때는 ‘낯설지만 아름다운 한글꼴을 찾아나가는 걸 목표로 하고 있다’라고 말하는데요. 스스로 말하기엔 꽤 낯부끄럽긴 하지만, 가끔 이 말을 내뱉을 때마다 스스로 경각심을 느껴요. 지루한 작업하지 말자고 되새기게 되죠.

드라마 〈구경이〉 대본집.|디자인: 김현진. 제작: 플레인아카이브. 이미지 출처: 팟 인스타그램

— 종이 위에 얹힐 때, 영상과 더불어 표현될 때 등 작업 성격에 따라 고려해야 할 점이 다를 텐데요. 다양한 매체와 협업하는 일을 즐기나요?

일을 시작한 초반에는 당연히 수없는 시행착오가 있었어요. 레터링이 어떤 방식으로, 어느 정도 크기로 사용되는지 고려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은 채 신나게 글자부터 그렸다가 낭패를 보기도 했죠. 획이 너무 가늘다든지, 왠지 배경과 따로 노는 느낌이 든다든지요. 이젠 경험이 쌓여서 작업 시작 전에 의뢰인에게 이것저것 물어봅니다.

또, 하나의 프로젝트일지라도 그 작업이 다양한 곳에 쓰일 수 있잖아요. 이를테면 레터링 하나가 네임택부터 가방, 의류 등 여러 소재에 쓰일 수 있죠. 그럴 때는 같은 레터링이라도 굵기에 차이를 주거나 해서 몇 가지 버전을 제작하기도 합니다.

영상 협업을 할 때는, 글자를 글립스(Glyphs)*에서 작도하는 단계부터 영상 디자이너를 고려합니다. 어떤 식으로 그려놓아야 영상 디자이너가 모션 작업을 할 때 보다 수월할지 고민하죠. 사실 요즘은 ‘매체가 종이냐, 화면이냐’ 하는 문제보다도 사용 목적이나 분야에 알맞은 분위기를 구현하는 일이 관건이라고 생각해요. 출판, 제품, 케이팝, 전시 등 분야마다 선호하는 스타일이 다르거든요. 새 작업을 맡을 때마다 환기도 되고 지루할 틈이 없는 이유죠.

* 글립스 폰트 제작 프로그램 중 하나
더현대 2022년 3월 비주얼을 위한 ‘KEY TO HAPPINESS’ 타이틀 레터링 작업 ⓒ THE HYUNDAI|키 비주얼 및 모션 그래픽: 입자필드. 사운드: 정문기. 타이틀 레터링: 김현진

여러 클라이언트와 함께했지만, 작업들에서 현진 님의 인상을 느낍니다. 어떤 작업이든 놓치지 않으려 하는 요소가 있다면요.

예전에는 누가 제 작업을 보고 ‘팟 작업일 것 같았는데 역시 그렇네!’ 같은 말을 하면 생각이 많아졌어요. 내 작업임이 확실히 드러나는 것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헷갈렸거든요. 자기 복제를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스스로 의심하기도 했고, 레터링이 자기주장이 너무 강하다는 건가? 그렇다면 그건 좋은 작업이 맞을까? 고민했죠. 이제는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확실한 스타일이 있다는 건 프리랜서로서 큰 강점이라고 여기게 됐습니다. 〈배트맨〉 TV 애니메이션 시리즈 ‘조커’를 좋아해요. 에피소드마다 해당 콘셉트에 유치하리만치 충실한 조커의 모습을 보는 일이 즐거워요. 근데 아무리 과한 의상이나 소품을 활용한다고 해도, 누가 봐도 조커는 조커거든요. 아마 팟도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요? 프로젝트마다 주어진 콘셉트에 충실하지만, 팟만의 느낌이 있는…. 어떤 작업을 하더라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는 게으르고 뻔한 시안을 만들어 내지 않는 거예요.

KBS 도쿄올림픽 특집 다큐 〈김연경, 김역경〉 다큐멘터리 타이틀, 자막 그래픽 글자 디자인.|이미지 출처: 팟 인스타그램

3. 일할 때도 글자를, 쉴 때도 글자를

글꼴 개발을 꾸준히 하고 있는 듯 보여요. 어떤 글꼴을 만들고 있어요?

굉장히 스스로 부끄러워지네요. 파생을 하다가 갈아엎고, 또 갈아엎고 반복하느라 몇 년째 개발 중인 글꼴이 하나 있는데요. 이름마저 바꿔야 하는 바람에 정식으로는 ‘이름 미정’, 가제 ‘베스카’라고 구구절절 소개해야 하는 글꼴이에요. 닐 게이먼의 〈북유럽 신화〉를 읽다가 ‘중세시대 장검 같은 인상을 가진 글꼴을 만들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것이 이 글꼴 개발의 계기가 됐습니다. 한글에 로만 타입(Roman Type)의 공간감을 적용한 폰트로 개발 중이에요. 넓은 속공간, 특히 이응이 초성으로 들어가는 글자들이 특징적이고 단단하면서 무게감을 가지도록 만들고 있어요. 굵기는 다섯 가지 정도로 계획하고 있는데, 우선 처음엔 1종으로 출시할 것 같아요. 판타지나 역사물 영화 포스터, 혹은 북 디자인에 사용되기를 기대하며 작업 중입니다.

‘이름 미정’, 가제 ‘베스카’ 글꼴.|이미지 제공: 김현진

종종 공유하는 개인 레터링, 타이포그래피 작품도 강렬한 인상을 안기는 것이 많아요. 계약된 일로 바쁜 중에도 개인 작업을 하게 되는 동력은 뭘까요?

레터링 작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개인 작업만 많고 상업 포트폴리오가 없다는 사실이 불안했는데, 막상 외주가 늘어나니 개인 작업을 할 여유가 사라진다는 점이 무척 아쉽더군요. 레터링은 일이기 전에 취미이기 때문에, 일을 해도 글자를 그리고, 쉴 때도 글자를 그려서 작업량이 많아 보이는 듯해요. 또 다른 동력이라면 제가 덕질을 좋아한다는 점…? 제가 덕질하는 방식은 글자를 그리는 것이어서, 꾸준히 개인 작업을 이어갈 수 있는 게 아닐까 싶어요.

〈스타워즈〉 레터링.|이미지 출처: 팟 인스타그램

덕질과 글자 그리기는 어떻게 연결되나요? (웃음)

예를 들어 어떤 영화를 보고 나왔는데 좋다면, 대사나 제목을 레터링합니다. 어떤 노래를 들었는데 너무 좋으면 가사나 곡 제목을 그리고요. 또 오늘이 5월 4일이다? 그러면 〈스타워즈〉 데이니까 또 레터링… 늘 이런 식이랍니다.

 

개인 작업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개인 작업은 어떤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인 것 같아요. 개인 작업을 하는 이런저런 이유들이 있지만, 무엇보다도 즐거워서 하거든요. 2021년 ‘타이포 잔치’에 참여했을 때 신기한 경험을 했어요. 당시 선보인 작업 중 ‘이건 상업적이거나 클라이언트가 있는 프로젝트에서는 통과되지 못할 거야’라고 생각한 작업이 있었는데요, 오히려 그 작업 덕분에 규모가 큰 기업에서 연락을 받았습니다. 비슷한 결로 캠페인 그래픽을 진행하고 싶다는 내용이었어요. 개인 작업을 통해 보다 실험적이거나 과감한 작업을 보여주는 일이 자기만족에서 나아가 일로 연결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깨달았습니다.

2021 타이포 잔치, 김현진 〈글자굿〉 연작.|사진 제공: 김현진

특히 개인 작업에 쓰인 글귀 중엔 시나 소설 등 문학의 구절이 자주 눈에 띄어요. 작업으로는 어떤 문구를 표현하고 싶다고 생각해요?

글꼴 디자인을 문자에 목소리를 더해주는 작업이라고 표현하기도 해요. 만약 그렇다면, 저는 성별이나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목소리를 만들고 싶어요. 그런데 제 머릿속 말을 그대로 쓴다면 저의 목소리가 될 테니까, 마음에 들면서도 멋지고 오묘한 문장을 빌려와 씁니다. 폰트 작업을 할 땐 글자를 먼저 그리고 문장을 고르는 일은 그다음 과정인데요. 레터링에서는 반대예요. 문장을 고르는 일이 앞서죠. 그러다 보니 사실 레터링 작업에 쓰인 문구는 특정한 목적으로 골랐다기보다는 제 취향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Beware; for I am fearless, and therefore powerful.” Frankenstein, Mary Shelley, 세계 여성의 날 기념 개인 작업.|이미지 제공: 김현진

작업 과정이 궁금합니다. 첫 획을 떼기가 쉽지 않을 듯한데, 어떻게 시작하나요?

볼펜이나 연필로 뼈대만 있는 글자를 그리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하나의 문자에서 나올 수 있는 여러 가지 버전을 쭉 나열해 보기도 해요. 예를 들어 치읓(ㅊ)은 꼭지가 아래 줄기와 수직, 수평으로 만나거나 대각선일 수도 있고, 아래의 지읒 부분은 갈래지읒일수도, 꺾임지읒일 수도, 아니면 대칭 형태일 수도 있어요. 라틴 알파벳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중 그려야 하는 글자의 콘셉트와 잘 맞거나, 다른 글자와 섞였을 때 매력을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형태를 고른 후 살을 붙이고 이리저리 실험하며 발전해 나갑니다.

작업이 잘 풀리지 않을 때는 손으로 직접 글자를 많이 그려 봐요. 그리는 것보다도 휘갈기는 쪽에 가까운데요, 그 과정에서 우연히 얻어지는 형태를 좋아합니다. 그러다 보니 프로젝트가 끝난 후 작업 노트를 다시 펼쳐보면 난장판일 때가 많아요.

세계한국어대회 〈50인 50꼴〉 ‘베를린’ 타이포그래피 작업.|사진 출처: 팟 인스타그램 @pot_works

4. 글자를 대하는 마음, 글자로 표현하는 마음

좋은 글꼴,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생각은 사람마다 다르겠죠. 현진 님의 생각은 어떤가요?

지켜져야 할 기본적인 부분, 그러니까 의도한 것을 제외한 실수가 없다는 조건을 전제로, 콘셉트가 확실하고 군더더기 없는 글자를 좋아합니다. 콘셉트 소개가 너무 감성적이거나 길어지는 걸 지양하는 편이에요. 표현하고자 하는 바가 확실하고 잘 전달된다면 좋은 글꼴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길을 걷다가 옛 자연농원 로고타입을 마주쳤는데, 불필요한 꾸밈 요소 하나 없는 그 글자가 시원스러워 기분이 좋았어요. 전에는 실제 필기구로 썼을 때 얻을 수 있는 획 대비나 형태에서 벗어난 레터링 작업을 보는 것만으로도 혼자 고통스러워하는… 이상한 강박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너무 편협한(?) 레터링을 하는 것 같아서 요즘은 열린 마음으로 다양한 시도를 해보려고 노력 중입니다. 글자를 정말 그래픽적으로만 보기도 하면서 유연한 자세를 취하려고 해요.

김현진이 마주친 옛 자연농원 로고타입

가독성과 심미성은 글자를 다루는 이에게 끝없는 고민을 불러오는 요소일 것 같습니다. 이 두 요소를 어떻게 다루려고 해요?

저는 심미성에 좀 더 집중하는 작업자에 가까워요. 최소한의 가독성을 지키는 선에서 글자가 얼마큼 괴상해질 수 있는지, 괴상하면서 아름다울 수 있는지 실험해 보는 작업을 즐겨합니다. 전주국제영화제 연계 전시인 〈100 Films 100 Posters〉 작업이나, 그냥 취미로 하는 레터링처럼 아무런 제약이 없을 경우에는 종종 가독성을 아예 생각하지 않고 작업하기도 하고요. 물론 그런 글자를 그리는 데서 오는 자유로움은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일정 수준의 가독성이라는 제약이 주는 재미가 분명히 있어요. 무엇보다 전혀 읽을 수 없다면 그건 더 이상 글꼴 디자인이라고 할 수 없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클라이언트에게서 받는 피드백 중 가독성을 높여 달라는 요청이 제일 재미있어요. 이 부분의 형태가 낯설어서일까? 아니면 획의 굵기가 너무 가느다랗나? 줄기를 끊으면 더 잘 읽힐까? 같은 여러 추측을 토대로 테스트하고 해결할 때면 미니 퀘스트를 깨는 느낌이 들어요.

2022년 전주국제영화제 〈100 Films 100 Posters〉 작업, 샤를로트 콜베르 〈마녀들의 땅〉 포스터.|디자인: 김현진

최근 3D 공부도 시작했다고요. 어떤 분야에 또 흥미가 있나요?

흥미가 있다고 말하기에도 양심에 찔리지만 올해 목표 중 하나가 코딩 공부예요. 코딩을 업무로 끌어오려는 생각은 아니고 재미있는 이미지를 생산해 내는 데 관심이 있어요. 글꼴 디자인에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 같고요. 사실 3D 분야도 인터넷 강의를 끊어 두고 수강하지 못한 지가 한참 되어서 갑자기 반성의 시간을 갖게 되네요. 회사를 나오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일이 이렇게 들어오다가 갑자기 끊기면 어쩌지?’ 하는 걱정에 물 들어올 때 노 젓자는 심정으로 닥치는 대로 일을 받아서 해내기 바빴습니다. 그래도 지금은 저 자신과 클라이언트를 위해 적정선을 지키려고 하지만, 재미있어 보이는 프로젝트가 많아서 하나둘 진행하다 보니 개인 작업도 밀리고 공부도 밀리고 있네요.

JOOHONEY OFFICIAL LOGO. 그룹 몬스타엑스 주헌 개인 로고 심볼 디자인.|이미지 출처: 팟 인스타그램

현진 님을 보며 좋아하는 것과 작업이 선순환할 수 있음을 알았어요. 밴드 데프헤븐(Deafheaven)을 좋아해서 투어를 열정적으로 따라간 모습에서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느꼈어요. (웃음) 또 밴드의 노랫말을 작업으로 표현하기도 하잖아요. 데프헤븐의 어떤 점이 그토록 매력적인가요?

올 것이 왔군요. (웃음) 데프헤븐은 작년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 무대를 보고 좋아하게 된 밴드예요. 그전에는 노래는 물론이고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어요. 지난해 처음으로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에 갔는데, 이들을 만나다니 운명이 아닐지… 데프헤븐은 메탈 밴드인데, 가사를 보면 모든 곡 하나하나가 시 같아요. 노래를 들으면서 이만큼의 감정을 느낄 수 있음을 데프헤븐을 들으며 처음 알게 되어 충격을 받았어요. 물론 라이브 공연 퍼포먼스가 엄청났다는 게 좋아하게 된 가장 큰 이유겠지만요. 그 이후로 이 밴드를 파기 시작했는데요, 대표작 〈Sunbather〉뿐 아니라 앨범을 발매할 때마다 타입 디자인에 많이 신경을 쓰는 밴드라는 점도 입덕 포인트 중 하나였어요.

데프헤븐의 곡 ‘Great Mass of Color’ 가사 레터링.|이미지 제공: 김현진
위의 곡 가사를 한국어 버전으로 레터링한 작업.|이미지 출처: 팟 인스타그램

좋아하는 것이 현진 님의 일과 삶엔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듣고 싶어요.

사실 ‘나는 덕질 위에 번창한다’라는 말을 우스갯소리처럼 종종 하곤 해요. 학생 때 쌓아 둔 레터링 포트폴리오의 95%는 모두 덕질의 일환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거든요. 좋아하는 노래나 영화의 제목, 가사, 대사를 그리다 보니 작업이 쌓였는데요, 그 포트폴리오로 영화∙공연 산업 쪽 디자인을 주로 하는 스튜디오에서 인턴을 해볼 기회도 생겼어요. 그런가 하면 덕질의 연장선으로 그려서 올린 글자 덕분에, 정말 협업하고 싶었던 제작사에서 연락을 받기도 했고요. 팟은 덕질이 일을 물어다 주는 구조로 돌아가고 있네요. (웃음)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은 좋아하는 대상이 생기면 그 대상을 엄청나게 그린다고 하는데, 저는 그림 대신 글자로 표현하는 것 같아요. 또 한 가지 tmi를 덧붙이자면, 지금까지 데프헤븐의 정규앨범 디자인을 모두 맡아 진행한 디자이너에게서도 연락을 받았어요. 제가 데프헤븐의 곡 가사를 레터링 작업해 올린 게시물을 보고 언제 한번 협업해 보고 싶다면서요. 저는 좋아하는 것이 생겨야 운동도 하고 공부도 하고 여행도 가고 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그렇기에 좋아하는 것은 저의 일과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데프헤븐의 곡 ‘Sunbather’ 가사 레터링.|이미지 제공: 김현진

글자를 만드는 일의 기쁨은 무엇인가요? 글자는 현진 님에게 어떤 의미를 품나요.

앞서 개인 글꼴 작업은 그 자체가 목적 같다고 말씀드렸죠. 글자를 그리는 과정 자체가 정말 즐거워요. 왜 좋은지 이유를 대라고 하면 그건 잘 모르겠어요. 아무리 피곤해도 너무 재미있는 드라마를 만나면 밤을 새워 시즌을 통째로 끝내기도 하잖아요. 제겐 레터링도 마찬가지예요. 새벽이 깊어져 가는데도 이 글자가 완성된 모습이 보고 싶어서 작업을 하게 돼요. 그리고 싶은 형태가 떠오르면 아이맥 앞에 앉기 전까지 하루 종일 머릿속에 그 형태가 맴돌고요. 서체 작업은 채워 넣어야 하는 빈칸이 2,350개가 넘는데요, 그 빈칸들을 보고 있자면 아득하기도 하지만… 또 한 자 한 자 그려서 애지중지 다듬은 글자로 문장을 타이핑하고 있으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어요. 그 글자들을 혼자서만 예뻐하는 건 그만두고 얼른 다른 사람에게도 선보여야 하는데 말입니다….

‘꺾이지 않는 마음’ 레터링.|이미지 출처: 팟 인스타그램

글꼴을 직접 마주칠 때도 기쁩니다. 개인 글꼴 말고 AG 타이포그라피연구소에 있을 때 만든 폰트는 아주 가끔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마주칠 때가 있거든요. 저는 아직 개발한 서체가 별로 없는 디자이너다 보니 그런 경험이 신기하고 기쁘더라고요. AG 타이포그라피연구소에서 혁필가 허운 남상준 선생님과 협업해 만든 AG 남상준체라는 글꼴이 있는데요, 이 글꼴을 마주친 곳은 무려 영국 런던 화이트 갤러리에 있는 서점이었어요.

화이트 갤러리 서점에서 만난 AG 남상준체.|이미지 출처: 팟 인스타그램

앞으로의 계획이나 바람을 들려주세요.

계획도 바람도 모두 서체를 출시하는 것입니다. 사실 지금 출시 준비 중인 것 외에도 대략 콘셉트를 잡아 둔 글꼴이 두 가지 더 있어요. 어서 그 글자들을 그리고 싶어서 못 견디겠는데, ‘이미 진행 중인 것부터 출시하면 그때 시작하자’는 다짐을 지키느라 겨우 참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시간 관리를 더 잘하는 디자이너가 되는 것이 당장의 목표예요. 클라이언트 일과 개인 작업 사이를 잘 조율해서 의뢰받은 일도 하고 서체도 꾸준히 선보이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데, 이 목표가 제일 어려운 것 같아요. 무엇보다도 이제 고작 독립 2년 차인 터라 5년, 10년, 그 이상까지 내가 이 일을 꾸준히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늘 있어요. 사람들이 매력을 느끼는 작업을 오래오래 하고 싶습니다.

소개하고 싶은 작업 3

이미지 제공: 일민미술관

일민미술관 〈히스테리아: 동시대 리얼리즘 회화〉 아이덴티티 디자인

“최근 작업 중 가장 마음에 들고 뿌듯한 프로젝트입니다. 이전에는 포스터 디자인을 하고 만족스럽다는 기분을 느끼기 힘들었어요. 이 작업은 글자만 엄청나게 크게 사용한, 레터링이 다한 작업이어서인지 꽤나 마음에 들어요. 리플릿 인쇄가 3차까지 들어갔다고 하니 다른 사람들 보기에도 괜찮았던 듯해 다행입니다. 저 스스로 자주 고민하는 난제가 있어요. ‘와 이거 대박이다, 너무 마음에 든다’ 하는 개인 레터링 작업에 비해 그냥 심심풀이 땅콩으로 그렸던 글자들이 높은 확률로 반응이 더 좋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가끔 제 만족도와 타인의 반응이 일치할 때 참 즐거워요. 지금까지 그려 본 글자들 중 아마 가장 커다란 크기로 인쇄된 작업이기도 해서 더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이미지 제공: 김현진

AG 남상준체

“소개하고 싶다기보다는 할 얘기가 참 많은 글꼴이에요. 90세 혁필가 허운 남상준 선생님과 소통하며 제작한 혁필 라틴 알파벳 폰트입니다. 개발 당시에는 퍽 힘들었기에 좋아하는 작업이라고 말하긴 어려운데요, 정말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이 글꼴을 은근히 자주 마주치곤 해요. 런던 여행을 하다 만나기도 하고, 밴드 크루앙빈 내한 포스터에 사용된 걸 발견한 적도 있고요. 작업할 때는 이 글꼴이 과연 어디에 쓰이려나? 어딘가에 쓰이긴 하겠지? 하는 의문을 품기도 했는데, 생각보다 다양한 곳에 쓰여서 신기해요. 오히려 요즘 더 정들기 시작한 작업입니다.”

이미지 제공: 김현진

세븐틴 ‘손오공(Super)’ 레터링

“역시 최근작입니다. 확실한 콘셉트와 함께 구름 같은 글자를 원한다는 제안을 받고 진행하게 됐어요. 재미있는 글자를 그릴 기회라고 처음부터 확신했거든요. 원래 밴드 음악을 좋아하는 데다가 최근 메탈에 푹 빠져서 케이팝을 거의 안 듣는데, 이 작업을 하게 된 후 참고용으로 ‘손오공’ 음원을 전달받아 들어 봤어요. 정말 좋더라고요. 콘셉트도 좋고 음악도 좋으니 작업 역시 굉장히 매끄럽게 진행됐어요. 작업 대부분은 클라이언트 마음에 들면 무사히 마무리되지만, 아이돌 관련 작업은 달라요. 제일 중요한 게 팬덤의 반응이거든요. 작업을 마무리한 후에도 공개되기까지 무척 긴장했어요. 공개되는 날, 심장을 졸이며 SNS로 반응을 검색했는데 디자인 관련 반응이 좋았어요. 의견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걱정한 만큼 기쁘고 뿌듯했습니다.”

글 김유영 기자

김유영
에디터. 이야기를 듣고 기사를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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