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각지에서 근사한 로컬 숍을 운영하는 5인의 대표와 디렉터에게 물었다. “쉬는 날 가게 문 닫고 어디 가세요?” 식당부터 서점까지, 가장 인상적인 지점부터 매장에서 추천하는 제품과 메뉴까지 깐깐한 감각과 취향으로 선별한 사장님피셜 리스트를 주목해 보자.
서점극장 라블레
김수진 ‘어쩌다 책방’, ‘어쩌다 산책’ 디렉터
이곳을 어떻게 알게 됐는가
건축 관련 기사를 찾아보던 중 알게 되었다. 백인화, 백명화 두 자매가 운영하는 건축설계사무실 ‘IWMW’에서 설계한 서점이라는 사실을 알고 관심이 갔다.
특히 어떤 점에 매료됐는가
서점은 다양한 사람들을 포용하는 방식으로 운영할 수도 있지만 운영자의 문학적, 문화적 취향을 짙게 드러내는 운영 방식을 취할 수도 있다. 라블레는 후자여서 좋았다. 명확한 운영 방식과 그것이 반영된 꼼꼼한 설계가 이루는 조화도 인상적이다. 종종 극장으로 변하는 안쪽 공간은 은밀한 동굴처럼 설계했는데, 바깥 공간과 바닥 소재까지 차이를 줌으로써 크지 않은 면적임에도 공간의 심도가 달라지는 걸 느낄 수 있다. 바깥 공간은 현존하는 작가의 작품, 안쪽은 타계한 작가의 작품으로 구분하여 책방을 직관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한 점도 매력적이다.
공간 분위기가 어떤지 소개해 준다면
오목하게 파인 천장 덕분에 수도원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 든다. 책을 안정적으로 받쳐주는 서가의 크기와 두께는 공간 전체에 묵직한 무게감과 안정감을 주며, 서점의 그래픽 디자인을 담당한 오혜진 디자이너가 프랑수아 라블레의 소설에서 착안해 만든 그로테스크한 반인반수 그래픽도 강렬한 이미지를 남긴다. 너무 무거운가 싶다가도 곳곳에 붙어 있는 재밌는 소개 글을 읽다 보면 간질간질 웃음이 난다. 책방 바로 건너편에는 학교가 있다. 하교 시간이면 책방에서 청소년들을 많이 볼 수 있는데 그 풍경이 참 좋다.
이 가게에서 추천하는 제품/ 메뉴
라블레에는 곳곳에 원서가 함께 진열돼 있다. 국내 작품이 어떻게 번역되어 어떤 모습으로 해외에 소개되고 있는지 찾아보는 것도 즐거운 일. 특히 한영 번역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소제(Soje)’ 번역가가 작업한 한국문학 책들을 추천한다.
마리오네
이재환 ‘도우큐먼트’ 대표
이곳을 어떻게 알게 됐는가
인스타그램 알고리즘을 통해 우연히 발견했다. 성수동에 새 매장을 오픈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처음 방문했다. 마리오네와 별다른 연고나 친분은 없지만 지금껏 다른 이들에게도 많이 추천했던 나폴리 피자 전문점이다.
특히 어떤 점에 매료됐는가
정석에 가깝게 제대로 구운 피자와 편안한 식사 분위기. 나는 나폴리 피자 협회에 대해 관심이 없지만 협회의 규정을 떠나 이 모든 공정을 경험하고 있는 피자집 사장으로서, 마리오네는 기꺼이 방문할 만한 가치가 있는 피자를 굽는 곳이라고 말하고 싶다. 파스타를 비롯한 기타 메뉴도 훌륭해 보이지만 남는 배가 있더라도 피자를 더 먹어야 하기 때문에 굳이 주문하지 않는 편이다.
공간 분위기가 어떤지 소개해 준다면
성수동 붐이 막 일어날 시기에 과감하게 동네 끝자락에 들어섰다. 매장에 들어가면 통창 왼편으로 큰 화덕이 있고 중앙에는 작업 테이블, 오른편으로 식사 공간이 보인다. 벽면에는 수많은 상장과 카푸토 인증서, 레몬, 신경 써서 고른 타일 등이 걸려 있고, 나폴리 지역과 관련된 다양한 오브제도 구경할 수 있다. 이탈리아를 가보지 않아서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사장님이 표현하고자 하는 나폴리 감성이 공간 여기저기에 묻어난다.
이 가게에서 추천하는 제품/ 메뉴
‘마르게리따’ 피자. 마르게리따는 토마토, 치즈, 바질 거기에 올리브유만 두르면 완성되는 ‘마리나라’ 피자와 더불어 나폴리 피자의 근본이 되는 메뉴다. 피자라는 장르가 자칫 재료에 의지하는 요리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 굽는 사람의 테크닉과 재료의 관리가 매우 중요하다. 같은 재료와 방법으로 준비해서 굽더라도 매장마다 결과물이 다른 이유다. 복잡한 여러 조건들을 통과해 테이블 위로 올라온 마리오네의 갓 구운 마르게리따는 흠잡을 곳 하나 없이 맛있다. 다테리노 토마토를 사용하시는 것인지 토마토소스에서 단맛이 조금 더 느껴진다.
근정전
김보화 ‘애시드’ 대표
이곳을 어떻게 알게 됐는가
‘길종상가’ 인스타그램을 통해 알게 됐다. 8년 전쯤 제주도에 살 때 길종상가에서 거실 테이블을 주문한 적이 있다. 그 후로도 쭉 길종상가의 작업을 인스타그램이나 여러 매체를 통해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었는데, 최근에 소개된 가게가 근정전이었다. 너무 멋진 공간이기도 했고 고향인 이천에 있어서 기억해 뒀다가 방문했다.
특히 어떤 점에 매료됐는가
특정 시대와 국가를 떠올리기 힘든,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유일무이한 분위기. 눈길이 닿는 거의 모든 곳에서 높은 완성도가 느껴진다. 직접 가보면 공간이 아니라 잘 만든 세공품 안에 앉아 있는 기분이다. 완성도가 높고 매끈한 공간은 종종 부담스러울 때도 있는데, 근정전은 사람을 반기는 편안한 느낌을 준다. 경복궁의 근정전에서 연상되는 색감이 매장 내부에 세련되면서도 자연스럽게 녹아든 점도 매력적이다.
공간 분위기가 어떤지 소개해 준다면
딱 보면 알만한 기성품이 전혀 보이지 않아서 기물들 하나하나 무척 공들여 만들고 꼼꼼히 셀렉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알고 보니 가구를 비롯해 벽과 천장까지 대부분 직접 제작했다고 한다. 나무와 카페트에 관한 인상이 강한 곳이라 그런지 겨울밤에 캐롤을 들으며 혼자 앉아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쓸쓸하면서도 포근하게 세상과 잠시 거리를 두는 기분이 들 것 같다.
이 가게에서 추천하는 제품/ 메뉴
혹시 나처럼 술이 세지 않다면 시그니처 메뉴인 ‘샹그릴라 하이볼’을 추천한다. 술맛이 거의 느껴지지 않고 달콤하고 청량해서 공간과 음악을 천천히 감상하면서 음미하기 좋다.
BAS(Brillpiece Archive Shop)
정슬기 ‘숍 그로브’ 대표
이곳을 어떻게 알게 됐는가
평소 애정하던 주얼리 브랜드 ‘브릴피스(Brillpiece)’에서 오픈한 편집숍이라 자연스럽게 소식을 접했다. 브릴피스 자체가 워낙 감각적인 브랜드이기 때문에, 여기서 전개하는 편집숍이라면 당연히 높은 감도로 채워질 거라는 기대가 있어 믿고 방문했다.
특히 어떤 점에 매료됐는가
개성 넘치는 브랜드를 꾸준히 소개한다는 점에서 이곳의 ‘뚝심’에 반했던 것 같다.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해외 브랜드들, 국내의 숨은 브랜드나 작가들을 발굴해 BAS만의 감각으로 멋지게 풀어낸다. 꼭 어딘가에 있었으면 했던 가게인데, 그런 역할을 충분히 해주고 있어서 고마운 마음이 들 정도다.
공간 분위기가 어떤지 소개해 준다면
서촌 골목 어귀에 2층짜리 단독 주택으로 조용히 자리 잡고 있어 들어가기 전부터 친구 집을 찾아가는 듯한 친근한 느낌을 준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가게를 지키는 사장님과 터줏대감 같은 고양이, 컬렉팅한 물건들의 분위기가 시너지를 이루며 마치 다른 세계로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을 준다. 브루클린 혹은 유럽 어느 멋진 편집숍에 온 것만 같달까. 공간을 구성하는 집기들도 굉장히 실험적인 데다가 BAS를 찾는 고객층도 예술적인 감각을 지닌 사람들이 많아 더 그런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 같다.
이 가게에서 추천하는 제품/ 메뉴
다른 브랜드와의 협업으로 만든 BAS만의 제품들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중에서도 찐 애정템은 ‘sohn’이라는 브랜드와 함께 제작한 ‘Ribbed wool socks’. 코튼 라벨이 달린 포인트도 매력적이지만 감촉이 너무 좋아서 매일매일 신는 최애 양말이다. 그리고 아직 구매하지는 못했지만 최근에는 ‘Beads Candle’을 흥미롭게 봤다. 언뜻 보면 큰 비즈로 만든 목걸이처럼 생겼는데 하나씩 잘라서 사용할 수 있는 캔들 제품으로, 아이디어도 새롭지만 패키지나 구성품도 정말 섬세하다. 이렇게 새로운 형태와 재미를 주는 제품/ 기획이 나에게는 다 영감이 된다.
파트원나이스
장주원 ‘룩백 커피’ 대표
이곳을 어떻게 알게 됐는가
나는 커피를 사랑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샌드위치도 정말 좋아한다. 평소 서울에서 맛있다고 하는 샌드위치 가게를 찾아보는 걸 즐기는데, 파트원나이스도 샌드위치 맛집을 검색하던 중에 알게 되었다.
특히 어떤 점에 매료됐는가
일단 사장님 혼자서 오랫동안 운영하셨다는 점에서 마음이 간다. 요즘처럼 수많은 카페가 생기고 사라지는 시기에 같은 자리에서 5년이 넘도록 유지했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더구나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서울의 ‘핫한’ 상권이 아닌 의외의 지역에 있다는 점도 이 가게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한적한 동네에 자리 잡아 인근 주민 단골의 비중이 높은 로컬 카페. 심플한 메뉴 구성도 좋다.
공간 분위기가 어떤지 소개해 준다면
전반적으로 깔끔하고 담백한 느낌이다. 조용한 골목에 있는 데다가 작은 평수의 매장이라서 오며가며 부담 없이 편안하게 머물기 좋다. 너무 화려하거나 힙하지 않고 캐주얼한 분위기라서 더 마음에 든다.
이 가게에서 추천하는 제품/ 메뉴
파트원나이스의 모든 샌드위치 메뉴가 훌륭하지만, 그중에서 시그니처 메뉴인 ‘파스트라미 샌드위치’를 추천하고 싶다. 속에 있는 재료 하나하나의 맛이 다 느껴지는데 어느 하나 과한 느낌 없이 조화를 이룬다. 특히 안쪽에 살짝 발린 블루베리 잼이 자칫 심심해질 수 있는 샌드위치 맛에 위트를 더한다.
글 김정현 객원 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