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8-30

전 세계의 주요 아티스트 북을 한데 모은 자리

책, 아트가 되다 〈BAAA: Books as Art as〉전
화집, 도록, 레조네, 아트북 등 미술과 관련된 책은 무수히 많다. 각기 다른 뜻을 가지고 있고 용도에 맞게 특정한 양식과 형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 더 해 한국에서는 다소 생소한 영역이지만, ‘아티스트 북(Artists’ Books)’이라 불리는 장르 또한 있다. 직역하자면 ‘미술가의 책’이라 할 수 있는 이 장르는 간략히 이야기하자면 ‘작가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책의 형태를 갖춘 예술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오케이앤피 부산에서 열리는 전시 〈BAAA: Books as Art as〉는 이 아티스트 북에 관한 전시이다.
전시 전경 ©OKNP

아티스트 북의 역사는 현대미술사와 그 흐름을 같이 하고 있다. 아티스트 북이라는 용어가 생겨나기 전인 20세기 초부터 다다, 초현실주의, 구성주의, 구조주의, 플럭서스 등 전위적인 예술가들에 의해 그 초기 형태가 만들어졌다. 작가들은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는 대신에 ‘책’과 ‘출판’을 통해 작품을 제작했는데, 유토피아적 열망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에게 계층 간의 불평등을 깨뜨리는 매체로 책이 가장 좋은 형태였기 때문이다. 이후 아티스트 북은 1960년대에 이르러 개념미술가, 설치미술가, 대지미술가들에 의해 더욱더 다양하게 실험되기 시작했다. 언급된 작가들의 특징 중 하나는 작품이 일시적으로만 존재한다든가, 또는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이런 작가들에게 있어 ‘책’은 그 어떤 매체보다도 매력적이었음이 틀림없다. 이들은 책을 통해 자신의 개념을 설명하기도 했지만, 더 나아가 책 자체를 갖고서 다양한 실험을 하며 새로운 책의 형태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이러한 예로 조셉 코수스, 존 케이지, 존 발데사리, 크리스토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실험은 현재까지도 계속되어, 비단 개념미술가뿐만 아니라 회화 작가들까지 각기 지향점은 다르지만, 책을 통해 다양한 작품 세계를 펼치고 있다.

전시 전경 ©OKNP
전시 전경 ©OKNP

이번 전시는 프랑스의 쓰리스타북스(Three Star Books), 미국의 프린티드매터(Printed Matter), 웨스트레이히 와그너(Westreich Wagner), 한국의 미디어버스의 작품들로 구성되었다. 각국을 대표하는 출판사들이 참여한 만큼, 이번 전시에는 마우리치오 카텔란, 사이먼 후지와라 등 동시대 주요 작가와 함께 존 발데사리, 소피 칼, 마이크 캘리, 로렌스 와이너 등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된다. 또한 권오상, 김선우, 박형진, 슬기와민, 엄유정 등 한국에서 선구적으로 아티스트 북을 선보인 작가들의 작품도 만나볼 수 있다.

전시 전경 ©OKNP

전 세계의 주요 아티스트 북을 한데 모아 선보이는 자리인 만큼 국내에서 쉽게 접하기 힘든 책들이 먼저 눈길을 끈다. 그 일부를 소개한다.

ThreeStarBooks_JOHN BALDESSARI_NOSE PEAK ©OKNP

얼마 전 타개하여 전 세계인들이 안타까워한 미국을 대표하는 개념미술가이자 미술 교육자였던 존 발데사리는 그 누구보다 아티스트 북 출판물에 열정을 쏟은 작가다. 그는 1970년대 초부터 판화를 찍기 시작했으며, 자신이 가르치던 학생들과 함께 ‘더 이상 따분한 작품을 벽에 걸지 않겠다’는 슬로건 아래 출판물을 기획/간행해 역사에 남겼다. 〈Nose Peak〉 은 그가 작고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아티스트 북이다. 12개의 에디션이 있지만, 각기 양장 등이 달라 유니크한 작품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현재 11권은 해외 주요 미술관 및 메가 컬렉터들에게 소장되어 있어 이제 한 점만 남은 이 작품은 제목 그대로 사람의 코(정확히는 러시아의 문학가 니콜라이 고골의 코)를 책 속에 산처럼 배치한 작품으로, 책을 넘김으로써 코의 형태가 점점 드러나는 형태를 지닌다.

ThreeStarBooks_MAURIZIO CATTELAN_Three-Volume Set 2008-2011(1) ©OKNP
ThreeStarBooks_MAURIZIO CATTELAN_Three-Volume Set 2008-2011(2) ©OKNP
ThreeStarBooks_MAURIZIO CATTELAN_Three-Volume Set 2008-2011(3) ©OKNP

마르쉘 뒤샹 이후 가장 혁명적인 예술가로 평가받는 마우라치오 카텔란은 리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하며 국내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게 된 작가이다. 일명 ‘바나나 사건’으로 더욱 알려진 카텔란은 대형 조각과 설치 작품을 주로 제작하고 있어, 미술관이 아닌 일반 컬렉터들에게는 그저 선망의 대상일 뿐이었다.

이번에 출품되는 〈Three-Volume Set〉은 자전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Die/ Die more/ Die Better/ Die Again〉(2008), 〈The Three Qattelan〉(2010), 〈The Taste of Others〉(2011) 등 3권을 엮은 책이다. 각각의 책에는 카텔란이 해왔던 다양한 프로젝트들이 사진이 아닌 그림(회화)으로 들어가 있으며, 글씨들 역시 타이핑이 아닌 손 글씨로 작성되었고, 책도 제본되어 있는 방식이 아니라 한 장 한 장 분리되는 방식이어서 작품과 책의 경계를 흐린다. 이 아티스트 북에는 광주비엔날레 총감독을 맡았던 마시밀리아노 지오니(Massimiliano Gioni)를 비롯해 다양한 전문가들이 참여했다. 다들 세계 최고의 위치에서 미술계를 좌지우지하는 사람들로 각각의 독립성이 카텔란의 기획하에 참여해 통일성을 갖는다.

ThreeStarBooks_SIMON FUJIWARA_Fabulous Beasts_kohinoormink(1) ©OKNP
ThreeStarBooks_SIMON FUJIWARA_Fabulous Beasts_kohinoormink(2) ©OKNP

최근 갤러리현대에서 개인전을 성공적으로 마친 사이먼 후지와라는 퍼포먼스, 영화, 설치, 조각, 텍스트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작가이다. 작가는 일본인 아버지를 둔 영국인으로서의 정체성 때문에 인종, 젠더 등의 정치적인 문제를 작품에 적극 끌어들인다. 이런 주제로 베니스 비엔날레를 비롯하여 카셀도큐멘타 등 세계적인 전시에 이름을 올렸다. 이번 〈Fabulous Beasts〉 시리즈는 베를린에서 생산된 모피 코트 한 벌로만 만들어졌다. 모피 코트는 재단 패턴에 따라 분해하고 여러 단계를 거쳐 털이 깎이게 되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제조업체 우표, 패치워크 디테일, 염색 자국과 피부병의 흔적, 생산자의 손 글씨 등을 찾아볼 수 있게 된다. 이 책은 그 가죽들을 다시 꿰매어 엮은 것이다. 사치를 위해 만들어졌던 모피 코트는 ‘읽을 수 있는’ 책으로 변모하여 내러티브나 정보가 아니라 그 자체가 가진 비뚤어진 관능을 통해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이야기를 전달한다.

미디어버스_엄유정_FEUILLES(1) ©OKNP
미디어버스_엄유정_FEUILLES(2) ©OKNP
미디어버스_박형진_까마귀와 까치(1) ©OKNP
미디어버스_박형진_까마귀와 까치(2) ©OKNP

아티스트 북이란 장르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전설적인 작가들의 작품 외에도 최근 주목받는 국내 아티스트의 작업도 시선을 끈다. 국내 아티스트 북 섹션에서는 2021년 독일 아트북 재단에서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인 엄유정 작가의 〈FEUILLES〉를 비롯하여, 슬기와민의 <나는 왜 출판하는가>, 박형진의 <까마귀와 까치>, 권오상의 <스몰 스컬프쳐스>, 김선우의 〈Astrolabe: From 5am to 5pm〉 등의 작품이 선보여진다.

미디어버스_김선우_Astrolabe_from 5am to 5pm(1) ©OKNP
미디어버스_김선우_Astrolabe_from 5am to 5pm(2) ©OKNP

‘더북소사이어티’가 손을 잡고 미술 관련 책들을 큐레이션 한 편집숍을 선보인다. 이 편집숍에는 세스 프라이스의 소설을 비롯하여, 유럽의 대표 출판사인 스펙터 북스(Spector Books), 로마 퍼블리케이션(Roma Publication)의 도서, 부산 작가들이 제작한 아티스트 북, 젊은 작가들이 만든 아기자기한 소품까지 함께 해 전시를 더욱 풍성하게 한다.

편집숍 전경 ©OKNP

최근 수십 년간 아티스트 북은 발전해 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국에서는 아티스트 북을 주제로 하는 전시가 부재해 그 개념이 제대로 정착하지 못한 느낌이다. 하지만 아트선재센터, 일민미술관 등 전위적인 미술을 소개하는 기관에서 책과 출판에 관련된 전시를 개최하며 아티스트 북 개념을 소개한 바 있고, 매년 열리는 ‘언리미티드 에디션’ 등의 행사들이 아티스트 북을 유통하면서 이 개념이 젊은 작가들 사이에서 자리 잡아 가는 중이다. 이번 전시는 아티스트 북을 알아가며 작품의 재료 중 하나로 ‘책’이 있었고, 그 실험은 여전히 진행 중임을 일깨운다. 더 나아가 디지털 환경에 익숙한 요즘 세대에게 아날로그 책의 물성을 체험하는 기회를 선사한다. 전시는 9월 10일까지.

이건희 객원 필자

프로젝트
〈BAAA: Books as Art as〉
장소
오케이앤피 부산
주소
부산 해운대구 해운대해변로 292
일자
2023.07.29 - 2023.09.10
시간
10:00 - 18:00
(월요일 휴관)
참여작가
참여 작가 마우리치오 카텔란, 존 발데사리, 소피 칼, 리크릿트 티라바니자, 로렌스 와이너, 고든 마타 클락, 권오상, 김선우, 박형진, 슬기와민, 엄유정 외
헤이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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