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에 기댄 삶
“좋아하지 않는 곳에 살고 있다면 다른 곳으로 떠나세요. 할 수 있을 때 행복을 찾으세요.”
미국의 그림동화 작가 타샤 튜더는 쉰여섯의 나이에 돌연 행복을 찾아 산골로 떠났다. 보스턴 명문가에서 태어나 풍요롭게 자란 그가 황량한 버몬트 주에 정착한 이유는 단순했다. 자연에 기대어 사는 느리고 소박한 삶이 행복했기 때문이다. 타샤는 30만 평 규모의 대지에 꽃과 나무를 손수 심고 가꾸며 35년간 정원을 일궜다. 정원이라고 했지만 잡초가 무성하고, 온갖 풀벌레와 동물들이 오가는 야생의 모습에 가까웠다. 그곳에서 타샤는 자연의 일부가 되어 수많은 생명들과 동거하듯 살았다. 인생은 짧으니까, 행복을 찾아 원하는 대로 살라는 타샤의 말은 너무나 낭만적이어서 초현실적으로 들린다. 사실 우리 주변만 봐도 자연에서의 삶을 동경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00에서 한 달 살기’나 ‘워케이션’이 유행처럼 퍼지는 걸 보면 말이다. 하지만 단순한 일탈이 아닌 자연이 주는 근원적인 가치에 더 집중한다면, 초현실적인 낭만도 현실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곳이 있다. 타샤의 정원에 비견할 만한 곳, 제주시 서부 애월읍에 위치한 ‘부영농장’이다.
두 사람의 비밀스러운 보물창고
부영농장은 어느 노부부가 43년간 손수 가꾼 3천 평 규모의 개인 정원이다. 한 번도 외부인을 들이지 않고, 두 사람만 머물던 비밀스러운 장소다. 원래 부산에 살던 이 부부는 건강이 좋지 않을 때마다 잠시 제주에 머물며 휴식을 취했다. 한적하고 아름다운 자연에 매료된 이들은 제주에 정착하기로 마음먹고 지금의 농장 터를 사들였다. 당시만 해도 이곳은 제대로 된 포장도로도, 편의시설도 없는 그야말로 허허벌판이었다. 불편한 것 투성이었지만, 당장 살기 편하자고 주변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들의 삶을 이곳에 맞추기로 했다. 두 사람이 쉴 작은 집 한 채를 짓고, 나머지 땅은 전부 정원으로 만들었다. 부부는 제일 먼저 넓은 정원을 지탱할 큰 나무 12그루를 심었다. 그리고 그 나무들이 자리 잡을 때까지 기다렸다. 온전히 뿌리를 뻗는데 10년이 걸렸지만 부부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나무가 뻗어낸 뿌리를 지도 삼아 산책로를 만들고, 주변에 자신들이 좋아하는 식물들을 심었다. 마치 서로의 자리를 헤아려 나눠 갖듯, 천천히 농장을 꾸렸다. 부부는 삶을 자연의 흐름에 맡긴 채 무수히 많은 계절을 보냈다. 부영농장은 오랜 시간 두 사람의 몸과 마음을 다독여 준 치유의 공간이었다.
내밀한 공간으로의 초대
두 사람의 소중한 공간으로 제 역할을 다 한 농장은 최근 새로운 주인을 만나 변화를 앞두고 있다. 농장의 새 주인은 부부와 오랜 인연을 맺은 황씨 부부의 장남 황효진씨다. 부부가 건강에 관심이 많다는 걸 알게 된 한 지인이 한림읍에 사는 황씨 가족을 소개시켜주면서 두 집안의 특별한 인연이 시작됐다. 당시 오랜 지병이 있던 남편이 1년의 시한부 선고를 받은 시점이었다. 사연을 들은 황씨 가족은 부부에게 자연에서 난 재료로 만든 건강 먹거리를 대접하며 언제든 편하게 와서 차와 음식을 먹고 가라고 제안했다. 부부는 매일 그들이 만들어 준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자연스럽게 몸에 활력이 생겼고, 그렇게 부부는 기적처럼 9년의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었다.
부부는 황씨에게 농장을 맡기며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 부영농장에서 편안하게 쉬고 회복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황씨는 부부의 뜻에 따라 최대한 농장의 원형을 살린 치유 센터 설립을 계획했다. 앞으로 5~6년의 개발과정을 거쳐 레지던스를 겸한 케어 센터가 농장에 들어설 예정이다. 하지만 막상 공사에 돌입하려니 황씨에게 걱정이 앞섰다. 그곳에 살던 수많은 생명들이 행여 놀라지 않을까? 갑자기 낯선 사람들이 헤집고 들어오면 상처받지 않을까? 황씨는 농장의 생명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손님맞이를 계획했다. 조금씩, 천천히, 농장에 사람들을 초대하기로 한 것이다. 농장 본연의 모습이 사람들의 기억에 남겨질 수 있다면 그 또한 좋은 일이었다.
형태를 정의하지 않은 팝업
그렇게 2022년 7월 “여름의 정원”이라는 테마로 4주간의 팝업이 열렸다. 커피 브랜드인 ‘트래버틴’, ‘딥블루레이크’, ‘보난자커피’, ‘메쉬커피’가 함께 참여해 매주 특별함을 더했다. 인위적으로 꾸미지 않고, 그 어떤 형태로도 정의하지 않은 팝업이었다. 방문객들이 농장 그대로를 느낄 수 있도록 본연의 모습을 살리는데 더 집중했다. 팝업 관람은 2만원의 입장료를 내고 2시간가량 가이드와 함께 농장을 투어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하루 3세션 (오전 10시, 오후 2시 30분, 오후 4시)으로 나누고 인원은 세션 당 20명으로 제한했다. 태풍과 소나기가 오가는 변화무쌍한 여름 날씨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세션이 매진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첫 팝업의 힘입어 22년 10월, 두 번째 팝업이 열렸다. 이번에는 ‘듁스커피’와 ‘파티세리 후르츠’가 파트너로 참여해 가을의 정취를 더해 줄 음료와 디저트를 제공했다.
5월 5일부터 19일까지 2주간 열린 이번 팝업은 6월 9일 성산에서의 제주 데뷔를 앞둔 ‘프릳츠 커피’가 파트너로 함께했다. 프릳츠의 인기 커피와 더불어 부영농장에서 수확한 귤로 만든 귤잼 도너츠를 관람객들에게 제공해 달콤한 여유를 선사했다. 또한 작가 ‘무과수’와 함께 하는 ‘나를 잘 돌보는 삶’에 대한 토크 세션(5월 14일), 제주 프라이빗 레스토랑 ‘오지나’에서 ‘몸을 회복시키는 음식’을 맛볼 수 있는 다이닝 세션(5월 12-13일) 등 특별 세션을 별도로 마련해 몸과 마음을 돌아보는 다채로운 체험을 가능하게 했다.
‘부영농장’ 방문기
5월 13일 토요일 4시 세션 관람을 위해 부영농장을 찾았다. 농장은 애월읍에서도 산 쪽으로 꽤나 들어간 조용하고 한적한 주택가에 있었다. 버스를 타고 간다면 정류소에서 30분 정도 더 걸어야 갈 수 있었다. 농장 주변에는 여느 팝업 매장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팻말도, 안내원도 없었다. 제대로 찾아온 게 맞나 싶어 두리번거리는 사람들만 길가에 보일 뿐. 지도에 찍힌 지점을 찾으니 커다랗고 빨간 대문이 보였다. 대문 앞에 놓인 낡은 우체통과 “鬴榮農場”이라 새겨진 성인키만 한 자연석이 농장을 알리는 입간판 역할을 하고 있었다.
4시 정각이 되자 굳게 닫혀 있던 대문이 활짝 열렸다. 문이 열리는 사이로 초록의 녹음이 뿜어져 나오듯 펼쳐졌다. 무성하게 자란 풀과 높이 솟은 나무가 가득한 그곳은 정원 보다 숲에 더 가까웠다. 복작대는 사람들이 반가웠는지, 농장의 새들이 환영하듯 화음을 내며 울어댔다. 예약을 확인하고 입장하니 스태프가 웰컴 티를 건네줬다. 풀잎 향이 가볍게 스치는 ‘산죽차’라는 이름의 맑은 차였다. 현 농장주이자 건강과 먹거리 연구가인 황효진씨가 부영농장에서 만든 수제차라고 설명했다. 입안에 감도는 은은한 차향이 사라질 때쯤, 팝업을 기획한 정재석 디렉터가 투어 시작을 알려왔다.
올해 마지막 팝업에 대한 짧은 개요를 설명한 후 바로 가이드 투어가 진행됐다. 길게 늘인 8자형 구조로 된 농장은 어디서든 다시 시작점으로 돌아갈 수 있게 길이 연결돼 있었다. 천천히 걸으면 20분 정도 소요되는 짧은 산책길이다. 정재석 디렉터는 길 중간 중간 멈춰서 눈앞에 있는 나무와 꽃에 대한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려줬다. 생선 비린내가 나서 뱀을 쫓아낸다는 어성초, 황금빛 단풍이 부를 불러온다 하여 양반가에서 주로 심었다는 황금회화나무, 정원사들이 올 때마다 탐내는 300년 된 베롱나무, 나무 하나가 페라리 한 대 가격 정도 된다는 자연 금송, 샤넬 향수의 원료로 쓰이는 조향사들이 좋아하는 나무 금목서, 약성분이 많아 감기약으로 쓰인 하늘타기 나무 등 정원에 있는 희귀한 식물들에 얽힌 이야기를 들으니 하나하나가 다르게 보였다.
1시간가량의 가이드가 끝나고, 30분간 농장을 둘러볼 수 있는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입구 앞에 있는 오두막에서 프릳츠 커피와 도넛을 제공했다. 작고 허름한 이 오두막 또한 노부부의 추억이 담겨 있는 공간이었다. 정재석 디렉터는 “팝업을 열면서 오두막을 리뉴얼을 고려했지만, 추억의 흔적까지 함께 나누는 게 더 좋을 것 같다고 판단해 그대로 유지했다”는 후문을 전했다. 관람객들은 향긋한 커피와 빵을 들고 저마다 마음에 드는 장소에 자리를 잡고 앉아 달콤한 여유를 즐겼다. 팝업 공간인 만큼 포토스팟을 하나쯤 만들 법도 한데, 인공적인 조형물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손수 만든 것처럼 보이는 소박한 나무 의자와 크고 작은 돌, 입구에 놓인 몇 개의 미술품이 정원의 유일한 장식이었다. 부부의 온기가 그대로 남아 있는 비밀스러운 장소에 초대받은 느낌이 들었다.
정원을 돌며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하지만 눈 앞에 펼쳐진 싱그러움과 향기까지 담아낼 수는 없었다. 휴대전화를 가방 깊숙한 곳에 찔러 넣고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빛이 드리울 때마다 풀잎이 반짝였다. 그저 울창한 초록 숲처럼 보였던 나무들이 모양도 향도 제각기 다른 개별적인 존재들로 다가왔다. 그 이름을 하나하나 곱씹어 보았다. 어느 새 하늘이 제법 붉어져 있었다. 농장의 아침과 밤이 궁금해졌다. 부부는 이곳에서 시시각각 바뀌는 정원의 모습을 매일 봤겠지?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두 사람은 어떤 이야기를 나눴을까? 어제보다 더 자란 꽃에 대한 이야기, 방금 딴 귤 맛에 대한 이야기, 바위틈에서 꿩 알을 발견한 이야기… 어쩐지 대화가 끊이지 않았을 것만 같은 부부의 하루를 상상하니 마음이 뭉클해지며 벅차올랐다. 그 순간 나는 살아있음을, 살아있는 존재들과 함께 있음을 느꼈다. 2시간 남짓한 시간동안 농장에 머물며 나는 생의 본질을 만났다. 부영농장의 이름은 한자로 가마솥 ‘부’에 영화로울 ‘영’을 쓴다. ‘영화로 가득 찬 농장’이란 뜻이다. 실로 그곳은 이름처럼 귀하고 빛나는 것들이 가득했다.
글 문수진 객원 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