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8-03

디자인과 예술의 사이에서, 김영나

전시 'TESTER'부터 앞으로 준비중인 프로젝트까지
TESTER. photo ⓒ Unrealstudio

중간 점검 <TESTER>

지난 7월 두산갤러리에서 열린 는 김영나에게 의미가 깊다. 2007년 시작된 두산연강예술상 초기 수상자들을 재조명하는 전시라 일종의 중간 점검인 셈. 김영나는 스스로를 고민에 빠트렸다.

“전시 의뢰를 받았을 때 다른 전시보다 좀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새로운 계기를 만들고 싶기도 했고. 당연히 ‘SET을 점검하는 계기가 되겠구나’란 생각도 어렴풋이 들었어요. 그런데 단순히 반복하고 싶진 않고 어떤 걸 보여줄까 생각하다가 정작 SET의 원본 재료가 되는 것들을 전시에서 보여준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어쩌면 의도적으로 보여주지 않았던 건지도 몰라요.”

 
TESTER. photo ⓒ Unrealstudio

김영나의 디자인 세계를 이해하려면 SET에서 출발해야 한다. 2013년 두산연강예술상을 수상한 그녀는 2015년 뉴욕에 있는 두산 레지던시에 입주 작가로 지내게 되면서 같은 해 두산갤러리 뉴욕에서 처음 SET을 선보였다. 그전까지 그래픽 디자이너로서의 성향이 더 강했던 김영나는 순수 미술 공간에서 자신의 작업을 어떻게 보여줄지 고민했고 가장 익숙한 매체인 책을 떠올렸다(그녀는 그래픽 매거진의 아트 디렉터로 3년간 활동했다).

TESTER. photo ⓒ Unrealstudio

“일단 아카이브로서의 책을 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혼자 만드는 건 무리였죠. 제가 제 작업들을 중요도에 따라 선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껴져서 같이 공부했던 벨기에 디자이너 친구에게 부탁했어요. 자료들을 다 주고 구분이나 배열 같은 기본적인 코멘트만 했지 그 친구한테 대부분 맡겼어요. 그러다 보니 저에겐 아카이브지만 그 친구에겐 또 새로운 작업이 되었죠. 작업을 타인에게 의뢰하며 스스로 관찰자적인 작업을 해보고 싶기도 했고요.”

TESTER. photo ⓒ Unrealstudio

기존의 작업을 모두 해체하고 텍스트와 컨텍스트를 배제한 순수한 디자인 요소만을 남긴 이 책은 김영나에게 아카이브를 넘어 일종의 매뉴얼이 되었다. 이후의 작업들은 이 SET에서 꺼낸 디자인들을 재료처럼 활용하는 방식으로 전개됐다. 전시는 물론 록 페스티벌의 쉼터나 지하철역의 대규모 설치, 베개와 이불 커버 같은 것들이 모두 SET을 각각 다른 방식으로 구현하는 기회였고 사례이다. 그런데 막상 이 디자인의 원천을 공개한 적이 없었다는 것은 의외이면서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지면에서 빠져나와 잔뜩 블로우 업 된 컬러풀한 그래픽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사실은 이렇게 납작한 작은 도형에 불과했어요’라고 말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을지 모른다. 이번 전시에서 보여준 193점의 아카이브는 김영나가 SET을 중심으로 작업해 온 전시 아이덴티티, 포스터, 도록, 잡지 등 각종 인쇄물과 이미지들의 총망라다. 이번에도 역시 연대기적인 전형적인 아카이브 전시와 단순 나열에서 오는 지루함을 탈피하기 위해 오랜 파트너이기도 한 전산시스템에 층층이 유리로 된 선반 제작을 의뢰했다. 투명한 레이어를 사이에 두고 이미지들은 층위를 형성해 마치 하나의 집합체처럼 보인다.

TESTER. photo ⓒ Unrealstudio

“이번 전시를 통해 마음이 한결 편해졌어요. 사실 어느 순간부터 SET이 무거워지기 시작했거든요. 매번 다른 규칙을 가지고 활용하지만 언제까지 반복할 수 있을까란 생각이 들기도 하고 언젠가 이걸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이제는 그냥 둬도 되겠구나 싶어요. 필요하면 다시 꺼내 쓰기도 하고요. 단편적인 해법이 아니라 마음가짐이 달라졌다고 해야 하나? 이제 SET은 다른 차원이 된 것 같아요. 모호하긴 하지만 정말 아카이브, 하나의 덩어리가 된 느낌.”

193개의 아카이브가 있는 선반을 중심으로 전시장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벽화 <SET v.24 : 해체>와 반대편 벽면에 걸려 있는 신작 일곱 점은 마치 김영나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잇는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는 듯하다. 석고로 뜬 <194>, 스티커를 300배 확대해 거울처럼 만든 <테스터>, 털실로 자수를 놓은 <파이널 노티스>, 양면 테이프에서 영감을 얻은 <접착을 위해 떼어내시오>, 식품을 포장한 망을 도식화한 <레몬>, <복숭아>, <오이>, <양파>는 모두 김영나가 일상의 소재에서 얻은 영감을 익숙하지 않은 재료와 새로운 방식으로 구현해 낸 것들이다.

TESTER. photo ⓒ Unrealstudio

“파이널 노티스라는 말은 사실 좀 단호한 말이잖아요. 빚 독촉할 때 쓰는 스티커에서 온 단어이기도 하고. 그런데 이 차가운 말을 따뜻함이 느껴지는 물성으로 표현하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스티커는 사실 제가 좀 집착하고 있는 아이템인데 디자인 작업의 재료로도 활용하지만 새로운 방식으로 보면 어떨까 궁금했어요. 그래픽 디자인은 컴퓨터 안에서 구현될 수밖에 없고 결과물은 인쇄소에서 나오잖아요. 그런데 그래픽적인 언어를 다른 물성으로 옮기는 과정을 하다 보니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가 되는 느낌이 들었어요. 이걸 어떻게 표현하고 구현할 것인가, 방법론적인 것들에 대해 관심이 많아졌어요.”

TESTER. photo ⓒ Unrealstudio

최근 신체의 쓰임에 흥미가 생겨 퍼포먼스 수업까지 듣는다는 김영나. 이번 전시에 선보인 오브제들도 그녀가 직접 만들었다. 이제 그녀에게 디자인과 예술의 경계는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그저 자신이 보고 싶은 무언가를 새로운 방식으로 구현해 내는 것이 목적일 뿐. 오랜 시간 김영나의 기본값이자 표현 수단이었던 그래픽 디자인의 영역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는 그녀에게 이번 전시는 일종의 시험이자 실험이었다. 전시 타이틀이 <TESTER>인 이유다.

 
photo: Thomas Adank ​

한류의 키워드는 ‘하이브리티’ 

김영나의 최근 프로젝트 중 지난 6월 막을 내린 영국 V&A 뮤지엄의 <Hallyu! The Korean Wave>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전 세계에서 거의 최초로, 그것도 세계적인 박물관에서 열리는 한국에 대한 전시에서 그녀가 맡은 역할은 크리에이티브 리드. 전시에 관련된 모든 전문 인력을 보유하고 있는 V&A가 굳이 김영나를 선택한 것은 그녀가 제안한 기획이 공간과 디자인 그리고 예술을 모두 아울렀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핵심은 수많은 리서치와 고민 끝에 나온 한류에 대한 인사이트였다.

photo: Thomas Adank

“한류가 대체 무엇인가라는 질문부터 다시 했어요. 저는 한류가, 특히 그 K가 꼭 한국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제일 많이 들었거든요. 한류를 공유하는 세대의 언어이지 한국성을 대변하는 느낌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물론 한국적인 것이 내재되어 있고 제가 봤을 때 한류에서 가장 중요한 건 ‘Hybridity(혼종, 혼합물)’인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지금 한류를 대표하는 이미지로 블랙핑크의 리사가 나온다고 쳐봐요. 블랙핑크는 한국 그룹이지만 리사는 태국 사람이잖아요. 이걸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부터 생각해 봐야죠.”

photo: Thomas Adank

김영나가 생각한 한류의 키워드는 하이브리디티. 이 혼종의 시대상을 공간에 구현하기 위해 김영나는 한국의 ‘방’과 ‘광장’ 문화를 떠올렸다. 찜질방, PC방, 노래방 등 우리가 공간을 이야기할 때 많이 쓰는 방이라는 개념과 오늘날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중요한 공간이 된 광장. 닫힘과 열림, 폐쇄와 개방이라는 상반된 개념이지만 그것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하이브리디티와 접목시키고자 했다. 안타깝게도 김영나가 합류했을 시점에는 이미 전시의 많은 부분이 정해져 있었기에 기획을 다 반영하긴 어려웠지만 그녀 스스로는 과정에서 얻은 것이 많다.

photo: Thomas Adank

“저는 즐겁게 일했어요. 물론 아쉬운 부분도 많지만 V&A 같은 큰 박물관이 어떻게 일하는지도 알게 됐고, 또 기획자의 관점보다 관람객의 시선과 특성에 대해서 알 수 있었고 특히 한국인이 생각하는 한국과 외국인이 생각하는 한국의 차이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였던 것 같아요.”

V&A 전시에서의 직함이 ‘크리에이티브 리드’였던 것처럼, 최근 김영나에게는 디자인 의뢰보다는 조금 더 창의적이고 종합적인 작업을 요하는 제안이 많이 들어온다. 스위스의 한 타입파운드리는 새로운 서체를 출시하는 기념으로 김영나에게 ‘너의 스타일대로 재미있는 것’을 해달라고 요청했고 김영나는 사운드 아티스트와 협업하는 아이디어를 구상 중이다. 서체가 사용되고 우리가 읽는 방식을 어떤 유닛에 연결된 스코어로 표현하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그녀의 발상이 쉽게 이해되진 않지만 나중에 보면 늘 그렇듯 김영나만의 스타일대로 새롭고 재미있는 작업일 것이 자명하다.

 
photo: Thomas Adank

 

요즘 김영나는 9월에 있을 전시를 준비하면서 ‘상업성’에 대해 다시 생각 중이다. 그동안 했던 전시들은 대부분 비상업적인 프로젝트들이 많았는데 이번에 전시를 하는 갤러리는 꽤 적극적인 상업성을 띠고 있어서 더 그럴지도 모른다. 의뢰를 받고 작업을 하는 디자이너의 생태에 익숙했던 그녀는 작품의 ‘판매’에 대해서도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요즘 김영나는 작품을 사고 파는 행위를 다른 관점에서 보기 시작했다. 경제 활동이 아니라 자신의 작품이 다른 공간에서, 다른 사람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가를 생각한다.

 

“작품을 구매한다는 건 그 작품에 관심을 가지고 가치 투자를 하는 거잖아요. 그 사람은 분명 특별한 울림을 받았거나 다른 어떤 이유가 있을 거예요. 그렇게 보면 작품을 사고 판다는 게 좀 다른 차원이란 생각이 들어요. 사실 제가 만들고 팔고 싶지 않아서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이 소중한 아이를 어떻게 파냐고(웃음). 그 생각이 좀 바뀌었어요. 이제는 제 작업이 다른 맥락으로, 다른 생명을 갖고 살 수 있는 가능성을 봐요. 나한테는 이런 경험을 주고 다른 사람에겐 또 다른 걸 주겠지. 그동안 그 가능성을 저한테만 주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LOOM 챕터 0 오프닝. Photo: Siniz Kim

작품이 다른 곳에 가서 더 행복하길 바란다며 마치 자식을 떠나보내는 어머니 같은 아쉬움을 내비치는 김영나에게서 작품에 대한 깊은 애정이 느껴졌다. 돌이켜보면 이런 애정은 그녀의 아카이브와 전시에도 항상 녹아 있었다. 어떻게 보면 디자인 요소에 불과한, 자신의 작업에 활용한 도형, 선, 색을 절대 버리지 않았고 심지어 손이 가는 대로 접어본 종이조차 모아서 SET이라는 아카이브를 구축했으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평면에 갇힌 그래픽 디자인들을 꺼내 공간에 살아있도록 생명력을 부여했다. 김영나의 작업은 모두 그녀의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동안 움켜쥐고 있던 것들을 놓아버려서일까, 한층 홀가분해진 김영나는 그녀가 살고 있는 LOOM처럼, 무엇을 해도 되고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품은 채, 유연하지만 단단한 예술가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장수연 객원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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