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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업트를 전포동에 오면 무조건 거쳐 가야 하는
공간으로 성장시키는 게 저희가 가장 원하는 포지션입니다.
정광호 하업트 디렉터
”
이후 향 브랜드 ‘시스올로지(SISOLOGY)’를 시작으로 ‘매거진 B’, ‘라뷔게르(La Vigueur)’를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총 7개의 감도 높은 브랜드가 하업트의 사계절을 채웠다. 이제는 트렌드를 이끄는 브랜드가 먼저 문을 두드리는 부산의 대표적인 디자인 스폿이 된 것. 하업트 멤버들은 그들의 포부가 단순히 젊은 청년의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었음을 근사하게 증명하고 있었다.
입점 브랜드를 빛내는 조연으로서 역할에 충실했던 하업트. 브랜드는 1주년을 맞이해 스스로 주연이 되어 8번째 기획전〈WHEN I WAS DRUNK〉를 전개한다. ‘누구나 한 번쯤, 술에 잔뜩 취해 그날의 기억이 민망함으로 몰려오는 순간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하업트는 엉뚱한 물음을 시작으로 연상되는 것들을 공간에 나열한다. 행방불명된 내 물건, 하지 말았어야 할 전화, 길가에 남긴 나의 영역 표시, 액정 나간 스마트폰··· 이는 곧 하업트 구성원의 민망하지만 너무나 즐거웠던 시간으로 남은 기억의 조각이다. 이렇듯 익살스러움이 가득 담긴 작품들이 2층 전시 공간을 채우는 한편, 1층은 카페 겸 바로 운영된다. 이번 기획전에 맞춰 선보이는 하업트 바는 작년 6월 공간 오픈 전부터 치밀하게 준비한 결과물이다. 이처럼 더욱 다채로운 콘텐츠로 두 번째 챕터를 시작한 하업트. 공간을 운영하는 정광호 디렉터를 만나 그 소회를 들어보았다.
Interview with 정광호 디렉터
반갑습니다. 정광호 디렉터님. 그간 어떻게 지내셨나요?
안녕하세요. 브랜드 팝업 쇼룸의 역할에 충실한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작년 6월 28일, 향 브랜드 ‘시스올로지’ 팝업을 시작으로 쉬는 날 없이 1년을 보냈네요. 시스올로지에 이어 ‘마스카(MASKA)’, ‘매거진 B’, ‘SW19’, ‘라뷔게르’, ‘나체(NACHE)’, ‘르페르소나(LE PERSONA)’까지 7개의 브랜드를 하업트에서 소개했습니다.
이번 여덟 번째 기획 전시 〈WHEN I WAS DRUNK〉는 하업트가 주인공이죠. 언제나 그림자처럼 묵묵하게 다른 브랜드를 빛내주던 하업트를 소재로 삼다니. 기획이 정말 흥미로운데요.
맞습니다. 하업트가 협업 없이 자체적으로 팝업을 진행한 사례는 이번이 처음인데요! 지금까지 입점 브랜드 고유의 톤 앤 매너와 니즈에 맞춰 프로젝트를 기획했다면, 이번 팝업은 하업트 1주년을 맞이해 좀 더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었습니다. ‘틀을 깨다(Break the mold)’라는 하업트의 슬로건을 담아 구성원들의 색깔을 마음껏 펼쳐보고자 했죠.
왜 하필 ‘술에 취한 순간’이 전시의 모티브가 됐나요?
작년 6월, 하업트를 운영하기 전부터 저희는 바를 준비해 왔습니다. 오랜 시간 준비한 바를 이번 1주년을 맞이해 선보이기로 했어요. 전시에선 바와 관련된 매력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고민 끝에 술에 취한 순간을 익살스럽게 표현하기로 했죠. 1층에선 묵직한 분위기 속에 편안하게 음료를 즐길 수 있다면, 2층에선 술에 취한 순간을 엉뚱하게 표현한 유쾌한 작품들을 경험할 수 있어요.
술에 취한 순간이라는 막연한 주제가 ‘화분에 꽂힌 위스키 병’, ‘먹다 남은 식기’, ‘길거리에 두고 온 가방’ 등 유머러스하면서도 한 번쯤 공감할 수 있는 작품으로 표현한 점이 인상적이었어요.
실제로 많은 방문객이 저희의 민망한 기억에 공감해 주고 계십니다. (웃음) 이번 기획전은 정말 즐기며 준비했어요. 하루 운영을 마감한 후엔 하업트 구성원 모두가 한 테이블에 마주 앉아 술에 취해 이불 킥 날리고 싶었던 순간, 잊지 못할 순간을 회상하며 장인 정신으로 아이디어를 고도화시켰습니다. (웃음) 사실 전시에 선보인 콘텐츠는 저희가 아카이빙 해두었던 아이디어 양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이에요. 아이디어를 모은 프레젠테이션 페이지가 200장을 훌쩍 넘길 정도니까요.
하업트의 1주년에 그래픽 디자이너, 포토그래퍼 등 다양한 분야의 크리에이터가 힘을 보탰죠?
네, 브랜드 디자이너 강찬 님은 앞서 말씀드린 수많은 아이디어를 필터링하고 전시할 수 있는 형태로 다듬는 데 많은 도움을 줬습니다. 또한 기획전에 함께한 작가님들은 글로만 존재하던 아이디어를 시각, 청각적으로 옮기는 작업에 큰 기여를 해주셨어요.
키치 한 동시에 감각적인 매력이 담긴 작품이 쇼룸에 가득하네요. 구체적으로 소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
이번 기획전에 그래픽 디자이너 렐리시(Relish)님은 〈Black Comedy〉란 작품을 선보입니다. 작가님은 이런 작업 노트를 남겨주셨어요. “술을 참 좋아한다. 술 덕분에, 술 때문에 생긴 좋고 나쁜 기억들이 많다. 그것들을 모아 최대한 유머러스하게 담고 싶었다. 거나하게 취한 다음 날, 문득문득 생각나는 순간의 조각들이 블랙코미디 영화의 한 장면 같아서일까.” 작품엔 이런 그의 감정과 여운이 담겨 있죠. 사실 렐리시 님은 하업트와 인연이 깊어요. 하업트 로고를 만들어 주신 분이기도 하죠. 바 메뉴판도 작업해 주셨는데 ‘메뉴판이 이렇게 멋있어도 되나?’싶었습니다. (웃음)
포토그래퍼 나경인 님은 〈CAPTURED RANDOM MOMENT〉이란 작업을 소개하며 ‘충동적 순간의 기록’을 이야기합니다. 하업트의 1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서울에서 한걸음에 달려온 작가님은 흐릿하면서도 자유분방함이 느껴지는 사진으로 전시 주제를 작가 특유의 시선으로 담아냈어요.
염재모 비디오 에디터님은 〈Gaze Imagination〉이란 영상 작업을 선보였는데요. ‘남의 시선을 남들이 볼 수 있다는 게 즐겁다, 어떻게 해석할까?’라는 물음으로 작품을 제작했습니다. 너무나 젠틀하면서 감각도 뛰어나 앞으로도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 들었어요. (웃음)
작품에 본인의 뚜렷한 색깔을 담는 보림(Borim) 작가님은 설치 작업을 선보였습니다. 제목은 〈Piece(개, 개)〉로 ‘이어지지 않는 기억의 나열’, ‘실제와 공상의 잔상’을 소재로 작업을 풀어냈어요. ‘개’ 형상을 한 조형물인데 술에 취한 모습을 직관적으로 과감하게 표현하죠.
음악으로 공간과 브랜드를 설계하는 문화 집단 ‘XXBANK’의 송찬양 감독님과 클로(CLO), 이강후 작가님은 술 취한 순간을 〈When I Was Bottle〉이란 제목의 음악으로 해석했습니다. 본 전시를 위해 특별히 제작한 것인데요. 사운드가 정말 좋아 방문객들이 ‘음원은 어디서 들을 수 있는지’ 자주 물어보시곤 해요.
크리에이터들의 서로 다른 개성이 조화를 이루며 더욱 독특한 무드를 만들어 내는 것 같아요. 전시 외에 하업트 바 오픈에도 큰 공을 들이셨죠?
바는 작년 6월 하업트 오픈 전부터 준비하고 있었어요. 카페 운영을 먼저 시작했으나, 사실 저희 팀 바 총괄 책임자와 매니저인 이호연, 권재현 님은 디쉬와 주류가 더욱 전문 분야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사운드 큐레이터 차성원 님, 바리스타 김유빈 님까지 하업트 일원 모두가 새로운 미각적 경험을 선사하고자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하업트의 막걸리 하이볼에 반했습니다.
대중적인 메뉴에 더해 하업트 만의 이색적인 주류와 디쉬를 개발했어요. 말씀하신 ‘막걸리 하이볼’부터 ‘스프링온 썸머’, ‘화이트 캣’ 등은 주류의 특징을 살려 독특한 풍미를 맛볼 수 있어요. ‘마라 토마토 파스타’. ‘게살 감자채전’ 등 개성 있는 디쉬 메뉴도 바에서 즐길 수 있고요. 이 외에도 다양한 취향을 충족하는 만족스러운 맛을 선보이고자 구성원 모두가 늘 연구하며 노력 중입니다.
지난 해 하업트가 처음 문을 열 때 여러 가지 생각과 포부를 말씀해 주셨는데요. 이제는 어엿한 부산의 디자인 스폿이 되었습니다. 지난 1년간의 소회가 있을까요?
하업트의 지난 여정은 6구 콘센트가 모두 꽂혀있는 멀티탭 같았어요. (웃음) 늘 가동 중이었고 쉴 틈 없이 움직였죠. 입점 브랜드를 빛내는 한편, 다음 브랜드를 위한 기획을 탄탄하게 준비하려면 언제나 부지런히 나아가야 했습니다. 방문객들에게는 미각적인 감동과 긍정적인 서비스 경험을 제공하는 일에도 소홀히 하지 않았어요. 하루도 빠짐없이 영업 마감 후 최소 30분간 팀원들과 하루를 돌아보는 미팅을 했습니다. 이 때 개선이 필요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논의했죠. 이렇게 정신 없이 1년을 보냈는데요. 그 시간을 되돌아보니 어느새 모든 구성원이 각자의 역할에서 더욱 전문적인 모습을 갖춘 스페셜리스트가 되어 있었습니다.
내부 구성원 외에도 늘 수준 높은 비주얼을 그려내는 외부 시공사와 파트너도 마치 하업트와 한 크루처럼 합이 잘 맞아 보입니다.
목공, 금속, 아크릴, 시트 등 전시 설치 파트도 전문반장님과 항상 의견을 나누며 지금까지 왔어요. 덕분에 이제는 서로의 생각을 너무 잘 알게 됐고, 팝업을 거듭할수록 더욱 높은 수준의 퀄리티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번 〈WHEN I WAS DRUNK〉전에도 씨에이 컴퍼니, 더피플 스튜디오, 누베르플레르, 그래픽 디자이너 지원과 지윤, 모델 제이(JAY), 디자인바이83을 비롯해 많은 파트너사와 크리에이터분들이 하업트의 행보를 응원하며 조건 없는 도움을 주셨어요. 너무 감사할 따름이죠. 앞으로도 하업트는 브랜드와 고객 사이의 감각적인 접점을 만드는 공간으로써 많은 분의 기대와 응원에 부응하며 최선을 다해 나아가려 합니다.
글 이건희 객원 필자
취재 협조 및 자료 제공 하업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