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로 앤 볼(Farrow&Ball) 페인트로 컬러풀하게 칠해진 공간은 피카소를 재발견할 수 있도록 하고 동시에 폴 스미스의 아이덴티티도 드러낸다. 폴은 “나는 예술 전문가가 아니며, 이에 피카소에 대한 학문적인 지식도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디자인에 대한 애정만큼이나 예술에 관심이 많고 예술을 통해 늘 영감을 얻습니다. 물론 피카소도 그 영향의 일부였지요”라고 얘기했다. 또, 연출에 대해 “하얗고 빈 벽에 작품을 거는 방식에서 탈피해, 자유롭고 시각적이며 직관적인 전시를 의도했습니다. 평소 피카소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누구나 자연스럽게 작품을 이해하고 감상할 수 있습니다.”라고 소개했다.
거장의 회화, 조각, 소묘, 판화, 도자기, 그래픽 아트 등 박물관이 보유하고 있는 5천여 점의 작품 중 첫 번째로 선택된 ‘황소 머리(Tête de taureau)’는 자전거 안장과 핸들 바로 만들었으며, 포스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두 번째 공간은 보그 잡지 커버로 도배되어 있는데, 몇 가지 선을 더해 그로테스크하게 변해버린 1951년 5월 호 패션 화보에서 그의 위트와 상상력이 잘 드러난다.
1900년대 초 이베리아, 아프리카 및 오세아니아 예술 등 다양한 소재를 비롯해 폴 세잔(Paul Cézanne)에게 영감을 받은 피카소는 대상의 형태를 단순화해 표현했다. 그뿐만 아니라 프랑스 화가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와 함께 새로운 큐비즘인 파피에 콜레(papiers collés) 기법을 발전시켰는데, ‘종이를 붙이다’라는 의미로 회화, 드로잉, 조각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며 보다 풍부한 예술의 형식을 보여주었다. 세 번째 공간에서는 ‘큐비즘’을 테마로 자연과 인간, 일상적인 물건이 담긴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이어진 분홍색 방은 ‘핑크 레이디스’를 테마로 그림에서 조각에 이르는 여러 작품을 만나볼 수 있는데, 당시 여성의 몸에 집중하고 많은 연구를 진행했다고 전해진다. 다음 공간에서 폴 스미스는 클래식한 패턴의 컬러풀한 벽지를 활용해 피카소의 ‘콜라주와 아상블라주’ 기법을 강조했다.
화려한 공간을 뒤로하고 이내 어두워진 분위기는 피카소의 심리적 변화를 반영했다. 1901년 가을, 절친이었던 카를로스 카사제마스(Carlos Casagemas)가 스스로 죽음을 택하며 시작된 ‘블루 멜랑꼴리’ 시기의 피카소는 블루 팔레트를 사용해 차갑고 어두운 무드에 거지, 매춘부, 술꾼과 같이 고독한 익명의 인물들을 그렸다. 다시 밝고 경쾌해진 분위기 속, 어릿광대의 모습을 한 피카소의 첫째 아들 폴(Paul)이 대중을 환영한다. 이는 피카소가 어린 시절 친구들과 즐겨 찾던 스페인의 메드라노 서커스장에서 본 광대, 곡예사, 무용수의 기억이 반영되었다.
다음 층으로 이동하는 복도부는 폴스미스의 상징인 스트라이프 패턴의 카펫을 깔아 기대감을 고조시킨다. 두번째 층은 ‘바이오모피즘’에 대한 소개로 시작된다. 바이오모피즘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유연하고 유기적인 형태가 특징으로, 1930년대 평론가들이 피카소의 작품에 대한 감상평에 많이 사용한 단어다. 1937년 스페인 내전 중에는 야만성에 대해 저항하는 작품을 남겼고,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는 그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방식으로 왜곡시킨 인간의 몸을 그렸다. 어두운 컬러에 동물의 사체, 인간 두개골이 담긴 정물화는 전쟁의 공포를 상징한다.
강렬한 빨간색으로 가득한 공간은 ‘투우’를 테마로 다채로운 이야기가 나열되어 있다. 특히 투우사가 황소 뿔에 찔리는 비극적인 순간은 1910년대부터 약 20년간 여러 작품의 주제가 되었는데, 인간과 동물의 투쟁, 나아가 삶과 죽음의 대립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전쟁이 끝난 뒤, 동물의 묘사도 이전에 비해 부드럽고 유머러스하게 변화했다. 이어진 공간은 ‘피카소의 스트라이프 브레통 셔츠’를 테마로, 전 세계 인들에게 이슈가 되며 대중문화로 소비된 피카소의 초상화를 재해석한 쉐리 삼바(Chéri Samba)의 작품으로 시작된다. 천장에는 피카소가 즐겨 입던 브레통 셔츠를 잔뜩 걸어두었다.
피카소는 1969년부터 1972년까지 남프랑스의 무장에서 말년을 보내며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쳤으며, 특히 사람들의 모습을 자유롭게 표현하는데 몰입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에 완성한 ‘젊은 화가(Le Jeune Peintre)’는 마치 후대의 화가들에게 보내는 작별 인사처럼 느껴진다. 망토와 모자, 왼손에 붓을 든 모습은 덧없는 세월을 뒤로하고 왼손잡이였던 자신의 젊은 날을 회상했을지도 모른다. 마지막 작품답게 왠지 모를 깊은 여운을 남기며, 전시는 끝난다.
현대적인 렌즈로 돌아본 피카소의 작품과 폴 스미스가 연출한 감각적인 미장센이 조화로운 회고전은 오는 8월 27일까지 진행된다.
글 유승주 객원 필자
취재 협조 및 자료 제공 국립피카소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