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 엄익준. 그림 그리는 법을 배운 적은 없다. 평범한 삶을 살다 겉으로 표출되지 못하는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니 태양을 작품에 담아내는 아티스트의 삶에 이르렀을 뿐. 도자기로 제작한 와인 잔 ‘선글라스’ 작업으로 대중에게 처음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이후 유러피안 화풍과 지중해 연안 특유의 여유로움에서 영감을 받아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이국적인 캔버스 작업을 꾸준히 펼치는 중이다. ‘He Realized Nothing Concrete’를 줄여 헤르시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그는 태양을 한가득 품어 사물에 숨결을 불어 넣는다. 여러 번의 개인전과 직접 큐레이션 하는 상점 ‘솔라리움’을 운영 중이다.
태양을 좇는 헤르시는 해바라기와도 닮았다. 내면 깊숙이 스민 확고한 가치관과 잘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겸손까지. 해바라기는 결코 옆으로 퍼지거나 다른 식물에 기대지 않는다. 스스로 꿋꿋하게 성장할 뿐. 자신의 소설 속 등장인물 태양의 신 솔라리에가 인간들에게 선사하는 한줄기의 태양 빛을 작품에 담아내는 그의 작업은 범상치 않다.
앞서 이야기 나눈 태양과 와인, 지중해라는 키워드 다음으로 염두에 두고 있는 새로운 키워드나 스토리가 있을까요?
저의 작업과 전시 등 모든 활동이 앞서 말했던 소설 속 내용을 기반으로 다 이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 안에 다 담겨있어요. 소설은 내년 출간을 목표로 아직 한창 작업 중이라 그 이야기의 끝이 어디까지 파생될지 끝을 예측할 수 없지만 저만의 세계관을 만들어 가는 중이고요. 그다음 작품이나 전시도 모두 이 소설 속 이야기를 기반으로 맥락이 이어질 예정입니다.
소설 작업이나 작품 활동에 있어서 스토리텔링은 꽤나 중요한 요소인데, 작가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흥미로워서 그 다음 이야기를 빨리 읽고 싶어요.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작가님만의 방식이나 노하우가 있을까요?
저는 행복한 순간을 수집하려고 해요. 지인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다양한 경험을 나누는데 그 순간에서 창의적 영감을 얻는 것 같아요. 그리고 앞서 언급한 제 자신과 주변 인물을 모두 삼인칭으로 변환해 쓰는 ‘삼인칭 일기’도 계속해서 쓰고 있고요. 나중엔 누가 누군지 까먹기도 하지만 도움이 됩니다.
(왼) <Hernc Hotel: A Pleasant Meal> 전시 포스터
(오) <Hernc Hotel: A Pleasant Meal> 공간 한 가운데 위치한 호텔 문을 상징하는 작품
행복한 순간을 수집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지난 1월에 스몰글라스에서 진행했던 전시 <Hernc Hotel : A Pleasant Meal>가 떠올라요. 호텔이라는 메인 테마 아래 만찬을 즐기는 테이블 위의 풍경을 선보이셨죠.
태양의 산물이라고도 불리는 와인은 태양 빛을 얼마나 잘 흡수했느냐 못 했느냐에 따라 숙성도와맛이 바뀌잖아요. 제가 또 친구들과 테이블에 둘러앉아 맛있는 음식과 와인을 곁들이는 시간을 가장 좋아하거든요. 그렇다 보니 자연스레 테이블 위의 풍경을 담아내는 작업을 하게 됐죠. 이 작품들을 어떻게 선보일지 고민하다가 기분 좋은 식사에는 좋은 서비스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그럼 환대를 받을 수 있는 호텔의 공간성을 연계해 보자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Hernc Hotel : A Pleasant Meal> 전시는 성수동의 스몰글라스라는 다이닝 바와 함께 진행을 했고, 공간 한가운데에는 단순히 바Bar가 아니라 호텔이라는 거대 공간에 들어선 느낌을 주고자 문 그림을 같이 배치했어요. 또 제가 평소 영감을 받았던 호텔의 벽지 패턴을 오마주 한 작품을 전시하였고 스몰글라스 팀과 함께 식물과 커튼을 셀렉해서 호텔 무드를 최대한 살리려 했고요. 와인을 주문하면 제가 만든 와인잔에 서브 된다는 게 일반 전시에서는 쉽게 만날 수 없는 요소였죠. 전시 공간에서 작품을 실제로 사용해볼 수 있으니까요. 이러한 컨셉은 작년 세몰리나 클럽에서의 전시에서도 진행을 했었는데 아마 와인 바와 함께 전시를 진행하는 형태는 고정적으로 지속되지 않을까 싶어요. 이 방식이야말로 저의 작품을 보다 잘 즐길 수 있고 잘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죠.
작가님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테이블의 풍경이 있나요?
작년에 이탈리안 비스트로 세몰리나 클럽에서 <지중해 클럽 The Mediterranean Club>이라는 타이틀로 팝업 비스트로를 열었었는데 오프닝 파티 때 세몰리나 클럽 친구들이 준비해준 케이터링 테이블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있어요. 제 작품과 테이블이 너무 잘 어울렸던 터라 잊을 수가 없네요.
테이블에 둘러앉아 맛있는 음식과 와인을 즐기는 시간을 좋아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을까요?
편한 사람들과 있을 때 조금만 취기가 올라도 별소리 다 하잖아요. 안 해도 되는 얘기도 하고 거기서 또 재밌는 얘기도 나오고. 때로 누군가는 상처받기도 하고요. 하지만 그런 자리에 모여서 시시콜콜한 이야기와 생각들을 가감 없이 이야기하죠. 평소 생각만 하던 바람을 이야기하면서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어’라거나 때론 호언장담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를 굳이 얘기하는 바람에 다음날 ‘아 어떡하지’ 하다가 그냥 해버리는 경우도 있고요.(웃음) 덧붙이고 과장하면서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과정이 저한테는 즐거움인 것 같아요. 테이블 앞에서 우울한 얘기는 절대 하지 않으려 해요. 긍정적이고 재밌는 얘기만 하려 하죠.
‘태양’이라는 소재를 통해 사람들에게 희망을 안겨주고 싶다 하신 적 있어요. 그럼에도 작가님도 우울하거나 힘든 날이 있을 텐데요. 그럴 땐 어떻게 이겨 내시는 편인지 궁금해요.
진짜 잠 많이 자고 와인 마시러 가요. 절대 혼자 있지 않으려고 노력을 많이 하고요. 제가 좋아하는 것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을 찾아 나섬으로써 우울한 감정과 동떨어져 있으려 해요. 그렇게 며칠 지나면 해결 방안이 보이더라고요. 매몰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게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또 미술관을 찾아 작품들로 치유를 하기도 하고요.
그림 그리실 때는 어떤 재료를 사용하시나요?
주로 아크림 물감을 사용하고, 종이는 코튼 페이퍼를 사용해요. 코튼 페이퍼는 원래 수채화를 그리는 종이라 결이 조금 거칠거칠한데 일반 종이처럼 잘 칠해지지 않아 좋더라고요. 걸리적거리는 그 질감이 좋아요. 캔버스에도 작업을 하고요.
올해 초 떠난 미국 여행에서 미술관을 많이 다니셨다고요. 가장 기억에 남는 미술관이 있었다면요?
필라델피아의 반스(Barnes) 파운데이션이라는 미술관이요. 벨 에포크(Belle époque) 시대 작가들의 작품을 다 모아놨더라고요. 당시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를 가장 크게 후원했던 사람도 반스였어요. 반스는 의사였는데 신약 실험에 성공하면서 돈을 많이 벌었고 그걸로 당대 아티스트들의 그림을 대거 구매하고 재단을 만들어 미술관을 만들었다고 해요. 그래서인지 특히나 마티스 그림이 정말 많더라고요. 평소 폴 세잔도 좋아하는데 그의 그림도 많이 볼 수 있었고요. 두 작가의 원화는 정말 원 없이 보고 온 것 같아서 행복한 여행이었어요.
작가님의 예술 활동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아티스트가 있다면 누구일지 궁금합니다.
폴 세잔과 앙리 마티스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들의 그림처럼 선도 삐죽삐죽 튀어나오고 이 경계선이 왜 여기 있어야 되는지 모르겠는데도 여기에 있는 게 저만의 구도인 것 같거든요. 특히 꼬불꼬불한 걸 엄청 좋아하고요. 최근에는 이탈리아 패션 브랜드 마르니(MARNI)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프렌체스카 리소(Francesca Risso)에게 푹 빠져있어요. 며칠 전에는 당신의 작업을 오마주 해 그림을 그려도 되겠냐는 DM을 별 기대 없이 보냈는데 읽기는 읽었더라고요.(웃음) 메시지를 읽은 것만으로도 신기했어요. 아무쪼록 패션 아이템에 저의 그림을 녹여내는 작업에 관심과 흥미가 생기고 있는 요즘입니다.
작품 활동에 있어 작가님 스스로 세운 가치관 혹은 철칙이 있을까요?
기준이라기보다 저는 그림이 정직할 때 오히려 더 슬프더라고요. 처음에는 이왕 그리는 거 정교하고 완벽하게 그리려 하고, 칠도 꼼꼼하게 했는데 그럴수록 그림이 더 별로였어요. 그래서 이제는 완벽하게 하지 않은 게 저의 방식이 되어버렸고, 한 번에 칠을 모두 끝내는 게 아니라 첫 번째 칠하고서 몇 시간 두었다가 다시 또 두 번째 칠에 들어가고 그래요. 작업과 작업 사이에 간격을 두는 거죠. 그렇게 하면 좀 더 제가 추구하는 작업과 가까워지더라고요.
(왼) 스케이트 파크 내 전시 전경
(오) 스케이트 스쿨 모집 프로모션 일러스트레이션
지난 2월에는 오리지널 액션 스포츠,라이프스타일 브랜드 반스(Vans)와도 협업하셨죠.
한남동 무신사 스튜디오 지하 1층에 자리한 반스 인도어 스케이트 파크 내에서 작은 전시를 진행했어요. ‘스케이트 파크’ 이름 그대로 공원으로 생각하고 제가 상상하는 공원에 있을 법한 사물을 그렸어요. 이번에 솔라리움에서 소개하는 사물도 그림에 함께 담았고요. 전시 작품 말고도 ‘스케이트 스쿨 모집’ 프로모션 일러스트레이션도 함께 진행했는데 스케이트와 관련된 다양한 사물을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색감으로 채색해서 특색있는 포스터가 나오지 않았나 싶어요.
작년 연말부터 올해 4월까지 다양한 협업과 전시로 숨 가쁘게 달려왔어요. 어느덧 5월이 코앞으로 다가왔네요. 하반기에도 많은 협업이 예정되어 있다고요.
그러게요. 많은 곳에서 좋은 기회를 많이 주신 덕분이에요. 성수동에서 패션 브랜드와 제품 협업과 플래그십 스토어에서 함께 전개할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어요. 지금까지의 개인전 중에서도 처음으로 캔버스 그림 20여점 이상 선보이는 자리가 될 것 같아요. 여러 벌의 티셔츠와 다양한 형태의 굿즈들도 기대가 되고요. 무엇보다 요즘 가장 인기가 뜨거운 성수동 거리에서 전시를 열게 되어 설레네요. 제가 밝은 태양을 좋아하다 보니 저의 계절은 아무래도 여름인 것 같은데 5월 개인전을 시작으로 더 밝은 에너지와 태양의 이야기를 널리 소개할 수 있을 것 같아 저 개인적으로도 큰 기대가 됩니다.패션 그리고 가방 브랜드랑 다양한 협업을 진행 중이고, 이전에 <지중해 클럽> 팝업을 함께 했던 세몰리나 클럽과 이번에도 지중해 관련해 새로운 전시를 계속 이야기 나누고 있어요. 또 디저트를 만드시는 분들과 재미있는 아트 피스를 만들어 볼 계획도 있고요. 2023년도 일정이 벌써 거의 꽉 차있어 관심을 가져주는 분들에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