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편에서 이어지는 인터뷰입니다.
3. 일하며 배운 것
— 책 페이지를 넘길수록 이 책을 쓴 사람이 잡지 기자의 일은 물론 사람이 만든 것들, 이를테면 건축이나 디자인, 예술 등을 진심으로 아끼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사람이 만든 근사한 것을 아주 많이, 자주 만날 텐데요. 그중에서도 어떤 요소가 있는 것에 매력을 느끼고 애정을 품게 돼요?
내용과 형식이 일치하고, 겉과 속이 적절하게 어우러진 것을 좋은 디자인, 그런 사람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문질빈빈(文質彬彬)이라는 사자성어를 좋아해요. 겉의 아름다움과 속이 서로 잘 어울린다는 뜻인데요, 모양과 발음이 예쁘고 뜻도 훌륭하죠. 내용(콘텐츠)이 없는데 형식(디자인)만 따지면 허세이고, 내용만 중시하고 형식을 무시하는 건 촌스러운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끔 물건이 사람을 가르칠 때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 2006년 월간 《디자인》 기자로 입사해 18년간 근무했습니다. 기자, 그중에서도 디자인 매체의 기자로 일을 시작한 이유를 기억하나요? 잡지 기자, 편집장으로 일한 시간을 뒤돌아보면 어떤 기분인지도 듣고 싶습니다.
처음부터 디자인 전문가가 되고 싶었어요. 그래서 월간 《디자인》에 입사했고요. 어렸을 때를 회상하면 장래 희망란에 항상 기자나 아나운서라고 썼어요. 그런데 디자이너도 되고 싶었거든요. 결국 기자와 디자이너의 영역이 교차하는 일을 오래 했으니 운이 좋았습니다. 게다가 저는 디자이너로서의 재능은 별로 없었을 것 같아서, 기자가 되기로 한 게 얼마나 다행인지요! 이후로는 ‘이번 달도 무사히!’라는 생각만으로 한 달 한 달 버티다 보니 200번이 넘는 마감으로 이어졌네요. 일할 때는 구구절절 사연도 많았던 것 같은데 지금은 뭐가 힘들고 재밌었는지 솔직히 기억도 잘 안 납니다. (웃음)
— 마감이 끝난 날 밤 이야기에 담긴 설렘은 까마득한 후배인 저도 아는 기분이었어요. 그 부분을 읽을 땐 특히 노곤하고 행복했습니다. ‘서로에게 짜증 내지 않으면서 마감을 넘기려면 사소한 일에 다 같이 즐거워해야 한다.’라든지 ‘최고의 각성제는 시간 없음’ 등 정해진 시간 안에 함께 결과물을 만들어야 하는 사람들이 공감할 구절도 참 많았고요. 디렉터님에게 마감은 어떤 의미였나요?
저는 마감 때문에 성장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또 세상은 마감이 있어서 제대로 굴러간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마감’이라는 약속한 시각을 지키지 못한다면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의미가 없어요. 그래서 조금 부족해도 완벽보다는 완성을 더 중요히 여기게 되었고요. 중요한 디자인 이슈나 트렌드를 파악해서 기획하고 취재하는 일은 항상 재미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책을 한 권 만들 때마다 세계가 하나씩 늘어나는 느낌이 좋았습니다. 200여 권의 책을 만들면서 다른 곳에서는 할 수 없는 현장의 공부를 하고 있었더라고요. 다행히 적성에 맞아서 큰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고, 재미있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운이 좋았습니다.
마지막 대지 넘기고 편집자의 글을 쓰는 순간이 저의 최대 고비였는데, 그걸 넘기고 나면 다시 기분이 좋아졌어요. 마감 끝난 당일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고 소중해서 잠도 자기 싫었어요. 눈이 충혈될 정도로 영화를 몇 편이나 보고 〈한국인의 밥상〉을 입맛 다시면서 보는 게 제 마감 후 루틴이었습니다. 마감 후 이틀이 세상 아무 걱정도 없는, 행복감이 최고조에 이를 때였어요. 그다음 날부터 불행 시작? (웃음)
하여튼 잡지를 만들면서 결과물을 한 달 안에 빨리빨리 확인할 수 있었던 점도 좋았어요. 마감하자마자 바로 다음 호 기획을 해야만 했기 때문에, 반성하거나 실의에 빠져있을 시간도 별로 없었어요. ‘다음 기회가 있지, 다음 호가 있으니까 더 잘하면 되지.’ 아쉬운 마음이 들어도 그런 식으로 엄청난 정신 승리라든지 자기 최면을 했던 것 같아요. 매달 새로운 일을 기획하고 앞으로 나가는 일을 했지, 뒤를 자꾸 돌아보지는 않았던 시간이었습니다.
4. 마감이 끝나고
— 오래 해 왔던 일을 벗어나는 데는 용기나 각오가 필요했을 것 같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새롭게 도전하게 되었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쉼표와 마침표를 잘 찍는 사람이 되고 싶어져요. 쉴 때와 떠날 때를 잘 아는 현명함을 갖고 싶어진다고 할까요? 이제 겨우 쉼표와 ‘기자 겸 편집장’이라는 타이틀의 마침표를 하나 찍은 기분입니다. 그렇다면 자아, 이제 어디로 가지? 그것도 천천히 생각해 보려고요. 따져보니 급할 게 없어요. 언젠가 포스트비쥬얼의 설은아 대표가 이런 얘기를 해준 적이 있어요. “때가 되면 두려움이나 망설임이 없어진다. 망설이고 있다면 아직 때가 아니다.” 저 역시 때가 되니 망설임이 없어지더라고요.
— 월마다 돌아오는 마감이 없는 일상은 어떤가요?
매달 정기적으로 마감을 하는 생활이란, 한 달에 일주일쯤은 야근을 각오하고 모든 스케줄을 오로지 마감 기간을 위해 조정하거나 피해서 잡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책 한 권을 끝내는 잡지 마감 외에도 셀 수 없는 자잘한 원고와 프로젝트 마감이 동시에 이뤄졌어요. 그래서 더 이상 정기적으로 마감을 하지 않는다는 생각만으로 기쁨이 차올랐는데, 지금도 여전히 비정기 마감을 하고 있어서 정규 마감직에서 벗어난 기쁨을 제대로 누리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흑흑.
— 어떤 일들을 도모하거나 꿈꾸고 있나요? ‘호기심이 많고 싫증을 잘 내는 성격’이라고 본인을 정의했던 디렉터님이 계획 중인 일이 궁금합니다.
무언가 기획하는 일을 재미있어하고, 좋아했어요. 말씀대로 호기심이 많고 싫증도 잘 내는 편이거든요. 이 일을 오래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런 저의 성격 때문이었어요. (웃음) 마감하고 바로 또 다음 달 취잿거리와 특집을 생각하느라 바빠서 싫증 나거나 지루할 겨를이 없었다고 하는 게 맞겠네요. 저는 에디터십을 갖고 콘텐츠 비즈니스 하는 일을 해 왔다고 생각해요. 또 특정 분야의 일이 능숙해지면 다른 분야에 그 방식을 적용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숙련도가 높아질수록 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나고 경계 분야로의 확장이 쉬워집니다. 새로운 일을 시도해 보거나 다리를 건너는 일에 겁내지 않게 되고요. 변화에 적응하려고 매번 처음부터 끝까지 새로운 일을 배워야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일 잘하는 원리는 2100년이 되어도 똑같지 않을까요? 그래서 제가 해 왔던 일과 역량을 다른 분야에 적용하는 환승을 하고 싶어요.
— 《마감하면서 듣는 음악》은 어떤 이들이 읽으면 더 좋을까요?
우선 정기적인 마감을 하느라 분투 중인 기자, 에디터들. 이들에게 동료애를 느낍니다. 또한 수시로 독한 마감을 쳐내는 능력자인 디자이너와 크리에이터들이 읽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콘텐츠 비즈니스에 종사하는 마감인들의 무탈한 마감을 진심으로 기원해요!
— ‘북 디자인이 맘에 든다는 이유만으로 책을 사도 된다고 생각한다’라는 말씀을 한 적이 있죠. 《마감하면서 듣는 음악》의 디자인과 만듦새에 대한 생각을 들려주세요.
북 디자인 역시 중요한 콘텐츠이기 때문에, 저는 정말로 북 디자인이 맘에 든다는 이유만으로 책을 사도 된다고 생각해요. 《마감하면서 듣는 음악》의 커버 사진과 내지 연출 사진을 텍스처 온 텍스처에서 멋지게 찍어 주었습니다. 내지 촬영을 위해 끝까지 구하지 못했던 LP를 빌려주고 추천사까지 써준 좋은 친구 김범상 피크닉 대표와 존 콜트레인의 〈블루 트레인〉 앨범을 빌려주신 이재민 실장님께 다시 한번 고맙다는 인사를 드립니다. 또 저도 막연하게 ‘마감 전과 후’라는 콘셉트를 떠올리긴 했지만, 어떻게 구현할지에 대해서는 아이디어가 별로 없었는데, 워크룸 프레스에서 알맞은 아트 디렉션을 해 주었어요. 덧붙여 편집자를 잘 만나는 일도 정말 중요합니다. 저 자신도 남의 글을 손보는 편집을 많이 해봐서 잘 압니다. 저자의 역량도 중요하지만 디자이너와 편집자를 잘 만나야 좋은 책이 나옵니다. 사실이에요!
《마감하면서 듣는 음악》
저자 전은경
발행 워크룸 프레스
사진 텍스처 온 텍스처, 유현선
편집 박활성
디자인 김형진
규격 170 x 240 mm, 140쪽, 무선 소프트커버
발행일 2023년 4월 1일
글 김유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