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4-26

물의 위로, 물의 위력: 제14회 광주비엔날레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
“여러 이야기들이 모인 방법과 체계에 주목하고, 예술의 힘을 향한 태도와 접근 방법을 눈여겨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14회 광주비엔날레 오프닝 현장에서 이숙경 예술감독은 작품 하나하나보다 작품의 이야기들이 모인 방법과 체계에 더 집중해 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 이유는 이번 비엔날레의 주제인 ‘물’과 관련이 있다.

『도덕경』의 한 구절인 유약어수(柔弱於水)에서 차용한 비엔날레의 주제는 은유적 대상으로써 물이다. 물은 전환이자 회복의 가능성을 지니는 대상이다. 이를 방법론으로 삼았을 때 저항과 공존, 연대와 돌봄이라는 다양한 가능성을 내포할 수 있다. 전 세계 79명의 작가들이 참여하는 이번 비엔날레는 광주비엔날레 전시관과 더불어 국립광주박물관, 호랑가시 아트폴리곤, 무각사, 예술공간 집까지 총 5개의 장소에서 펼쳐진다.

국립광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 김기라 작가, 편집증으로서의 비밀 정원, 2023 | 사진: 글림워커스 ©광주비엔날레
무각사에 전시되고 있는 앙헬리카 세레, 내 두 번째 피부에 말씨를 뿌리다, 2023 | 사진: 글림워커스 ©광주비엔날레 ​

비엔날레에 참여한 작가들은 모두 상이한 이야기들을 품고 있다. 이들은 다양한 국가에서 출생했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이 출생지와 활동지가 다르다. 작가들이 경험한 환경과 배경은 다양하지만 동시대의 전 지구적 맥락과 인류를 위협하는 위기에 있어 시선을 맞춘다. 그리고 위기에 맞서 공존하는 방법을 위해 자신만의 시각을 가지고 발언한다. 발언을 모아 줄기를 만드는 역할을 담당한 이숙경 감독과 협력 큐레이터 케린 그린버그(Kerryn Greenberg), 보조 큐레이터 임수영과 최장현은 이번 기획에 도달하기 위한 네 가지 소주제를 내놨다.

소주제는 광주 항쟁의 정신을 영감의 원천이자 저항과 연대의 모델로 삼은 ‘은은한 광륜’과 전통에 주목하고 이를 재해석해 근대주의적 개념에 의문을 던지며 접근하는 ‘조상의 목소리’ 후기식민주의와 탈식민주의 미술 사상이 이주, 디아스포라 같은 주제로 발전한 방식을 다룬 ‘일시적 주권’ 마지막으로 생태와 환경 정의에 대한 비전과 한계를 다루는 ‘행성의 시간들’로 구성된다.

 

은은한 광륜(Luminous Halo)

제2전시관

“인생은 체계적으로 나란히 놓인 주마등 같은 것이 아니라

은은한 광륜처럼 첫 각성의 시간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를 감싸주는 반투명의 봉투 같은 것”

버지니아 울프

광주비엔날레 제2전시관 전경 | 사진: 글림워커스 ©광주비엔날레 ​

한국 현대사에서 분기점이 된 5.18 민주화운동의 일면은 광주와 동떨어지고 무관해 보이는 타 문화권에서도 전개된다. 꺼지지 않는 광륜처럼 억압에 대항하는 저항과 연대는 광주 항쟁뿐만 아니라 시대와 지역을 초월해 곳곳에서 발견된다. 우리는 더 나은 사회를 갈망하지만 왜 억압은 늘 존재할까? 억압에도 불구하고 변화의 정신은 왜 시대와 지역을 관통해 지속적으로 존재하는가? ‘은은한 광륜’ 주제관에서는 소외와 차별, 배척 등을 각기 다른 문화적인 맥락과 시점에서 다룬 작업이 소개된다. 광주에 기반을 둔 공동체와 협업한 작업이나 자신이 속한 사회를 비평적으로 조명하려는 시도 등이 포착된다.

조상의 목소리(Ancestral Voices)

제3전시관

광주비엔날레 제3전시관 전경 | 사진: 글림워커스 ©광주비엔날레

‘예술을 즐기는 사람이 많고, 예술가를 많이 배출한 고을’이라는 뜻의 ‘예향’은 호남과 광주를 소개하는 수식어다. 오래도록 광주라는 도시를 지탱해온 예술적 실천은 다른 문화권에서도 발견되는 조상의 가르침과 공명한다. 그리고 이는 전통 또는 토속에 가해진 식민주의적 폭력의 역사를 소환하기도 한다. ‘조상의 목소리’ 주제관에서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 전통이나 토속이라는 이름으로 경시돼 온 문화들을 드러내 보이는 작업을 제시한다. 서구의 시각, 주류의 관점에서 발견되기 어려운 이야기들과 특수한 맥락의 미시사들을 매개하는 작가들이 참여했다. 이들은 비서구 원주민 문화가 장점이 될 수도 있으며, 미래의 대안이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상기시키고 있다.

일시적 주권(Transient Sovereignty)

제4전시관

광주비엔날레 제4전시관 전시 전경 | 사진: 글림워커스 ©광주비엔날레

‘일시적 주권’ 주제관은 주권 침해를 다루는 작품에 주목한다. 식민주의와 탈식민주의 미술 사상이 이주와 디아스포라 등의 주제로 전개되는 방식을 눈 여겨보고, 다양한 국가에서 행했던 식민지화와 침투 등을 드러내 보이는 작품들이 소개된다. 식민주의는 과거의 전유물이 아닌 동시대 일상과 정치, 경제 등의 영역에서 계층 차별과 이주민 문제, 다문화주의 등의 이슈로 재등장하고 있다. 주제관은 다문화 사회의 문화적 장점과 혼성적인 이주민 정체성이 제시할 수 있는 가능성 등 탈식민주의적 실천과 사고가 불러오는 미래지향적인 메시지에도 초점을 맞춘다.

행성의 시간들(Planetary Times)

제5전시관

광주비엔날레 제5전시관 전경 | 사진: 글림워커스 ©광주비엔날레 ​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는 국가와 민족의 경계를 뛰어넘는 시도가 요구된다. 비록 상반된 가치관을 가지고 있더라도 말이다. 환경 오염으로 인한 기후 위기, 지구의 미래를 위협하는 전쟁과 이해관계 상충의 결과들은 이제까지 우리를 이룬 세계관과 가치관 재고를 요구하고 있다. ‘행성의 시간들’ 주제관은 전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질문하는 장이다.

©광주비엔날레 ​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는 시대를 관통하는 보편적인 가치를 향하며, 광주라는 지정학적 맥락에서 출발해 세계로 뻗어 나간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형태의 억압과 더불어 이에 저항하며 연대하는 방식에 주목해 보자는 취지다. “비엔날레 관람을 뉴스 보는 것처럼 느끼지 않게 하고 싶었습니다. 모든 정치적, 사회적 문제가 예술을 통해서 풀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술의 힘으로만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했어요. ‘물’이라는 주제가 나온 이유도 간접적으로 더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에 대한 방법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고요. 저는 그게 근본적인 전환을 가져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물이 강의 길을 바꾸고 바위를 녹이는 것처럼 말이죠.”

김민정, 마운틴, 2022, 한지에 먹, 132X190.5cm ©김민정
노에 마르티네스, 송이3, 2022, 도자기, 산화 슬립, 노끈, 89.9X21X21cm ©Patron Gallery ​

이번 비엔날레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문화와 역사를 경험한 작가들의 참여가 돋보인다. 마치 어디에서 기원했는지 알 수 없는 물줄기들 같다. 비엔날레의 물줄기가 모인 방식에 대해 숙고하다 보면 강에서 시작해 줄기의 근원으로 시선이 당도한다. 한 발짝 더 나아가 작가 한 명 한 명의 미시사에 귀 기울이다 보면 영국 테이트 모던의 국제 미술 수석 큐레이터이자 ‘현대 테이트 리서치 센터: 트랜스내셔널’의 수장을 맡고 있는 이숙경 총감독의 노련한 리서치 면모가 돋보인다. 큐레이팅 철학을 묻는 질문에 “현재를 잘 보여주는 매개자”라는 담백한 답변을 내놓은 이숙경 감독은 동시대 미술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되레 익숙해질 권리가 있는지 되묻고 있는 듯하다.

우후죽순 쏟아지는 비엔날레와 미술의 초국가적 상황에 익숙해져 비엔날레의 판단 기준과 잣대를 ‘신선함’에서 찾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이러한 잣대는 과연 충분할까? 광주비엔날레를 통해 작은 미시사들을 크게 보며, 눈에 띄는 단어가 있었다. 억압과 저항 같은 다소 익숙한 단어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 보이고 있는 ‘치료’였다. 국내 최초로 트라우마 센터가 생긴 곳, 억압과 저항, 연대가 있는 곳에서 공명하는 예술 실천과 미래를 찾는 목소리들. 초국가적인 일련의 현상이 이곳에서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 스밀 수 있는 이유에 대해 먼저 고려해 봐야 하지 않을까? 제14회 광주비엔날레는 오는 7월 9일까지.

하도경 기자

취재 협조 및 자료 제공 광주비엔날레

프로젝트
제14회 광주비엔날레
장소
광주비엔날레, 국립광주박물관, 호랑가시나무 아트폴리곤, 무각사, 예술공간집
일자
2023.04.07 - 2023.07.07
링크
홈페이지
하도경
수집가이자 산책자. “감각만이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현실”이라는 페소아의 문장을 좋아하며, 눈에 들어온 빛나는 것들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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