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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29

문동은은 왜 하필 ‘바둑’을 배웠을까?

건축가의 눈으로 본 〈더 글로리〉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에 쏟아지는 관심이 식을 줄 모른다. 탄탄한 스토리와 속도감 있는 전개, 맛깔 나는 대사와 배우들의 열연까지, 이 드라마를 즐길 수 있는 이유는 하나로 꼽기 어렵다. ‘집’이나 ‘공간’ 모티프를 살피는 재미도 그중 하나다. 공간이 중요하지 않은 서사가 어디 있겠냐마는, 〈더 글로리〉에서 공간은 조금 더 특별하다. 집, 건축, 건설사 등은 이 드라마에서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이기 때문. 극 중에서 “상대가 정성껏 지은 집을 빼앗는 게임”이라 표현되는 바둑이 자주 등장하고, 주요 인물의 직업이 건설사 대표인 점 등이 그 예다.
사진: 넷플릭스

그렇다면 건축가는 이 드라마를 어떻게 보았을까? 〈더 글로리〉 속 건축 모티프를 흥미롭게 보았다는 스몰러 건축사사무소의 최민욱 건축가에게 물었다. 그는 콘텐츠를 또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방법이나 서사에 공간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가늠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 본문을 읽기 전 참고 바랍니다

 

1. 아래 인터뷰에는 드라마 〈더 글로리〉의 강력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 넷플릭스와 〈더 글로리〉 제작진의 의도와 관련이 없는 인터뷰이 개인의 해석입니다.

Interview 최민욱 건축가

스몰러 건축사사무소 건축사

〈더 글로리〉는 건축 관련 모티프가 많은 드라마입니다. 학창 시절 문동은(배우 송혜교)의 장래 희망은 건축가였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습니다. 어린 동은이 살던 방에는 유명 건축물 사진이 붙어 있고, 건축 관련 책도 몇 권 보이고요. 어린 동은이 지냈던 집은 흔히 볼 수 있는 다가구주택이나 빌라의 원룸과는 또 다른 형태의 공간으로 보입니다.

동은이 어린 시절 살았던 여인숙은 흔히 쪽방촌이라 불리는 곳입니다. 보통 보증금도 없이 월세, 일세로 운영되지요. 반지하나 고시원조차 갈 수 없는 사람들이 주로 머무릅니다. 거주 여건이 아주 좋지 않은 곳이죠. 보통은 바닥 난방 시설이 없고 화장실과 샤워실은 공동으로 사용합니다. 만약 국내 주거 형태를 평가한다면 아마 이 형태가 가장 열악할 겁니다. 동은이 이곳에 살고 있다는 설정이 참 가슴 아팠어요. 아무리 비명을 질러도 도움을 받지 못했던 이유가 납득이 가기도 합니다.

어린 동은의 방에서. 아역을 맡은 배우들. 〈더 글로리〉 비하인드 스틸. 사진: 넷플릭스

박연진(임지연)과 하도영(정성일)은 마치 쇼룸처럼 으리으리한 드레스룸을 갖춘 저택에 삽니다. 연진의 가족이 사는 저택에서 인상적인 부분이 있었나요?

연진은 “겁나 비싸 보이는 정원”이 딸린 단독주택에 거주합니다. 동은은 길 건너 빌라의 옥상에서 그 집을 내려다보며 복수를 다짐합니다. 사실 건축가 입장에서는 이 장면이 가장 비현실적이었어요. 우리 도시에서 고급 단독주택과 빌라가 뒤섞여 있는 곳은 정말 찾기 힘들거든요. 전통적인 부촌이라 불리는 서울 평창동이나 성북동의 집들을 보면, 바깥에서 절대 집 내부를 쳐다볼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어요. 애초에 경사지에 위치한 데다 높은 담장과 조경이 집을 완전히 감싸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현실의 도시 공간엔 드라마 속보다 더 큰 차별과 간극이 존재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에덴빌라 옥상에서 연진과 도영의 저택을 바라보는 동은. 이미지: 〈더 글로리〉 영상 갈무리

건축 모티프가 곳곳에 드러나다 보니, 하도영이 건설 회사 대표인 것도 의미심장합니다. 건축가님은 이 점을 어떻게 보았나요?

하도영은 건설사 대표로 나옵니다. 현실 속에서 ‘집을 짓는 사람’인 것이죠. 반면 동은은 “너의 벽을 허물어 버릴 거야”라는 대사처럼 ‘집을 무너뜨리는 사람’을 자처하고 있어요. 그런 점에서 두 인물은 대립하는 구도라고 봤어요. 실제로 두 사람은 바둑 대국을 통해 서로 힘 대결을 하기도 하는데, 이는 ‘집을 지키려는 사람’과 ‘집을 무너뜨리려는 사람’의 대리전인 셈이죠. 아마 하도영이야말로 연진을 지키는 가장 강력하고 튼튼한 벽이라는 걸 동은은 알고 있었을 테고, 그렇기 때문에 바둑을 통해서 일종의 경고를 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특히 야외 바둑공원에서 바둑을 두는 모습이 인상 깊습니다. 거대한 바둑판 위에서 바둑을 두는 모습은 도영 역시 바둑판 위의 작은 돌에 지나지 않음을 설명하는 듯 보이기도 하더군요.

야외 바둑 공원에서 바둑을 두는 모습. 이미지: 〈더 글로리〉 영상 갈무리 ​

전재준(박성훈)의 공간은 화려합니다. 그의 캐릭터를 정확히 드러내는 듯해요. 집이든, 그가 운영하는 편집숍 ‘시에스타’든요.

재준의 집은 전형적인 펜트하우스입니다. 보통 고층 건물 꼭대기에 있는 최고급 주택을 뜻해요. 도시 속 모든 사람을 발아래 두고 사는 공간이라고 볼 수도 있죠. 재준이 욕실에 머무는 장면이 몇 번이나 나오는데, 창문 커튼이 쳐져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요. 행여 누가 볼까 걱정하거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을 정도의 높이에 살고 있는 거예요. 그의 공간은 모든 사람을 자기 발밑에 두고 보는 재준의 성격을 그대로 투영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재준의 집 욕실. 이미지: 〈더 글로리〉 영상 갈무리

동은과 같이 학교폭력의 피해자였던 김경란(안소요)의 공간도 눈여겨보게 되더군요. 재준의 편집숍 창고에서 머물다가 고시원으로 옮겨 지내죠.

〈더 글로리〉에서 집은 단순히 거주 공간을 넘어 자신을 지켜주는 안식처로 그려집니다. 드라마에서 ‘집’이라는 공간에 부여한 의미를 생각하자면, 경란은 여전히 자기를 지켜줄 공간을 가지고 있지 못해요. 특히 경란이 머무는 고시원은 굉장히 특이했어요. 방 안에 화장실이 있는데, 그 내부가 훤하게 들여다보였거든요. 보통 고시원 방 안의 화장실에는 반투명한 시트지가 붙어 있는 경우가 많아요. 침대에 누워 변기를 바라보는 일이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기 때문이리라 추측합니다. 저는 이 공간을 보며 가족이든 친구든 연인이든 그 누구와도 함께할 수 없는 곳이라 생각했어요. 경란은 성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혼자이고, 사회의 관심 밖에 있으며, 일상의 관계를 회복하지 못했음을 단적으로 느낄 수 있었죠. 시간은 흘렀지만 몸의 흉터처럼 마음속 상처 역시 그대로일 것임을 보여주는 공간이라고 봤어요.

경란이 머무는 고시원. 이미지: 〈더 글로리〉 영상 갈무리

주여정(이도현)이 독립해 이사한 집의 형태도 독특합니다. 마치 식물원처럼 투명한 유리창이 한 면을 꽉 채웠고, 천장도 매우 높아요. 매끈한 바닥재와 육중한 기둥도 눈에 띄고요. 주거 공간이라기엔 휑하고 차갑게 느껴지는 집인데요, 이 집이 무엇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나요?

제가 가장 흥미롭게 살펴본 공간은 주여정의 주거 공간이었어요. 동은에게는 유일한 안식처가 되는 공간이지만, 차갑고 온기가 전혀 없는 공간이거든요. 실제로 통유리와 콘크리트, 철로 구성된 삭막한 곳이에요. 이를 상쇄하기 위해서인지 따뜻한 느낌의 목제 가구를 배치해 두기는 했으나 냉기를 덮기는 역부족이죠. 그래서 저는 이 공간이 주여정의 마음 상태를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주여정의 심리를 공간으로 시각화한다면 분명 이런 모습일 거예요. 복수(살인)를 꿈꾸는 의사, 겉으로는 자상하고 따뜻하지만 내면은 차갑게 얼어붙은 모습일 테니까요. 실제 드라마에서 이 공간은 밤에 많이 등장합니다. 적어도 제 기억 속에는 주여정의 집에 햇빛이 드는 장면은 없어요. 어쩌면 동은은 그 차가움과 고독함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기에, 그 공간을 변화시키려는 시도로 자그마한 텐트를 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정의 집. 이미지: 〈더 글로리〉 영상 갈무리

동은의 텐트 이야기가 더 듣고 싶습니다. 동은은 왜 침대나 소파 등이 아니라 텐트를 선택했을까요?

〈더 글로리〉에서 집이라는 모티프엔 다중적인 의미가 있어요. 우선 건축에서 사용하는 사전적 의미의 집이 있고, 바둑의 승패를 결정짓는 바둑 용어로서의 집이 있죠. 또 은유적으로는 ‘개인의 안식처’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텐트는 동은이 이 세상에 처음으로 지은 ‘안식의 공간’인 것이죠. 바람이 불면 날아갈 듯 위태로운 데다 얇고 보잘것없을지 모르지만, 세상에서 받은 상처를 치유하고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기도 하죠. 텐트는 작지만 아마도 동은은 그 속에서 모처럼 깊이 잠들지 않았을까 상상해 봅니다.

동은은 여정의 집 한편에 텐트를 쳐서 머문다. 이미지: 〈더 글로리〉 영상 갈무리

주여정-문동은-하도영을 연결하는 매개는 ‘바둑’입니다. 주여정은 “바둑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집이 더 많은 사람이 이기는 싸움이에요. 그래서 끝에서부터 가운데로 자기 집을 잘 지으면서 남의 집을 부수면서 서서히 조여 들어와야 해요. 침묵 속에서 맹렬하게.”라고 말하죠. 바둑과 집이 연결되는 지점이 있는 듯해요.

하도영은 문동은과 주여정을 상대로 바둑을 둡니다. 승부의 결과는 나오지 않지만 아마도 도영은 여정에게 패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도영은 동은과의 내기 바둑에서 패해 돈을 잃기도 했고, 그런 동은을 가르친 사람이 여정이니까요. 저는 도영이 바둑을 두는 동안 이들은 이길 수 없는 상대라는 사실을 점점 깨달아 갔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동시에 현실 속에서도 집을 지키지 못하리라는 것을 결국 알아차렸을 것이라고도 보이고요. 거대한 바둑판 위에서 대국을 나누는 장면은 그런 도영의 상황을 잘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바둑을 두고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사실 자신 역시 바둑판 위에 올라와 있는 작은 바둑알에 지나지 않는 것이죠.

여정에게 바둑을 배우는 동은. 사진: 넷플릭스
도영은 기원에서 동은을 만난다. 이미지: 〈더 글로리〉 영상 갈무리 ​

결말에서 전재준은 공사장 시멘트에 빠져 생을 마감합니다. 실제로 시멘트 물에 빠지면 그냥 물에 빠지는 것과 달리 생명에 큰 위협이 되나요? 건축 현장을 모르는 사람의 궁금증입니다. (웃음)

콘크리트는 항상 철근과 함께 시공됩니다. 그래서 이 공법의 정식 명칭도 ‘철근-콘크리트 구조’라고 부릅니다. 철근은 보통 한 뼘 내외로 촘촘하게 설치됩니다. 현실에서 전재준이 건설 현장의 콘크리트에 빠졌다면 아마 철근을 잡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을 거예요. 현실에서는 사람이 빠져 익사할 만큼의 콘크리트를 타설하는 경우는 결코 없습니다. 안심하세요. (웃음)

〈더 글로리〉 비하인드 스틸. 사진: 넷플릭스

복수를 끝낸 동은은 건축 공부를 시작합니다. 건축가님은 SNS에 동은이 좋은 건축가가 될 것 같다고 쓰셨지요.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동은이 훗날 건축가가 된다면 큰 성공을 거두리라고 생각해요. 실제 건축가들이 건축 설계를 하는 과정은 공상과 상상 사이 어디쯤이거든요. 하나의 건물 속, 사람들을 상상하며 이들을 어디로 이동시킬지, 무엇을 보게 할지를 반복적이고 집요하게 상상하곤 합니다. 동은이 보여준 탁월한 ‘복수 계획’ 능력을 ‘건축 계획’ 능력으로 전환할 수만 있다면 아마도 대단한 건축물이 나올 거예요. 그리고 〈더 글로리〉 안에서 집은 단순한 건축물 이상을 의미하는 듯하다고 말씀드렸죠. 그런 의미에서 동은의 첫 작품은 ‘스스로를 위한 작은 집’이라면 좋겠어요. 크기는 한두 사람이 지낼 수 있을 정도로 적당히 아담하고 밝으면서 따뜻한 집이요. 어쩌다 비바람이 몰아쳐도, 그 어떤 힘든 일이 있어도 위로가 되는 그런 집이라면 좋겠습니다. 건축가로서 동은 후배의 앞날을 응원합니다.

〈더 글로리〉 비하인드 스틸. 사진: 넷플릭스

모든 것은 각자의 시각에 따라 다르게 보이기 마련이겠지요. 건축가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서 콘텐츠를 보는 방법이 궁금합니다. 이야기, 즉 서사에 ‘공간’은 어떤 힘을 불어넣을 수 있을까요?

건축은 물리적 공간을 만드는 행위인 동시에 사회적 의미를 담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과거에 지어진 관공서를 살펴보면 지면보다 높은 곳에 입구가 있는 건물이 많아요. 이건 권위적이었던 당시 사회 모습을 반영한 것이거든요. 관(국가)에 서류를 부탁하려는 사람은, 건물을 올려다보며 계단을 오르도록 만든 것이죠. 이런 식으로 건축 공간은 다양한 의미를 내포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공간적인 해석을 이야기의 배경으로 기획하면 서사를 더욱 입체적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고요. 실제로 언제부터인가 드라마나 영화, 예능 등 콘텐츠를 보다가 이런 공간의 의미를 부각한 사례를 자주 만나게 됩니다. 최근에는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이나 예능 〈피지컬 100〉에서도 그런 시도가 있었죠. 또 〈더 글로리〉에서는 더 적극적으로 나타났고요. 기회가 된다면 저도 이야기와 공간을 연결하는 작업에 참여해 보고 싶습니다.

〈오징어게임〉 스틸컷. 사진: 넷플릭스
〈피지컬 100〉 스틸컷. 사진: 넷플릭스

현재 건축가님이 집중하는 일에 대해 들려주세요.

건축에 담긴 다양한 이야기를 많은 분과 함께 나누고 싶어요. 그 방법이 경연 형식이 될지, 책이 될지, 유튜브가 될지는 아직 고민 중이지만 함께 소통할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물론 늘 그래온 것처럼 좋은 건축, 좋은 공간을 만드는 일에도 집중할 예정입니다.

글 김유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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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영
에디터. 이야기를 듣고 기사를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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