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3-25

바늘 끝으로 새로움 구하기

작가 오재훈의 손에서 태어난 형상들
우리의 시선을 잡아 두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편의점에서 건네어받은 비닐봉지, 테이블 위 놓인 우유갑, 신발장 구석을 차지한 운동화…. 하지만 작가 오재훈이 차근차근 다져온 세계에선 수많은 일상의 소재들이 \해체되어 본래의 모습을 잃었다가 뜻밖의 형태로 새로운 역할을 갖는다.
우유갑으로 만든 파우치. 뚜껑을 그대로 활용한 부분이 돋보인다. ⓒjaehun oh

사진 전공으로 대학교에 입학한 오재훈은 순전히 호기심으로 신청한 패션디자인학과 강의에 더 열심이었다. 전공 과제를 놓치더라도 옷만은 끊임없이 만들었다. 군 제대 이후에도 그 마음이 식지 않아 양복점은 물론 봉제공장을 드나들며 갖은 기술을 익히기도 했다. 그렇게 매 순간 원하는 일에 열과 성을 다하다 보니 ‘하얀바늘’이라는 브랜드를 세상에 내놓기에 이르렀다. 그 과정 속에서 어떠한 요량을 품고 있었는지 또 이후의 행보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몇 가지 물음을 건네어봤다.

Interview with 오재훈 작가

에어팟 케이스(키링)와 파우치가 된 맥도날드 ‘THE BTS MEAL’ 패키지. ⓒjaehun oh

ㅡ 맥도날드의 ‘THE BTS MEAL’ 패키지로 만든 에어팟 케이스를 통해 ‘하얀바늘’을 처음 접했어요. 언젠가 브랜드명이 지닌 의미에 대해 꼭 묻고 싶었는데 반갑습니다.

저는 늘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살기를 바라요. 어린아이는 주위를 둘러싼 모든 것들에 눈을 반짝이고, 있는 그대로 그것들을 담거든요. 저도 특히 작업을 할 때는 맑고 ‘하얀’ 마음으로 임하고자 해요. 여기에 매일 다루는 재봉틀의 부품인 ‘바늘’을 붙였더니 ‘하얀바늘’이 된 것 뿐이에요. 브랜드라고 해서 이름에 어떤 거창한 뜻을 담기 보다는 부르기에 편하고 쉬운 말을 사용하고 싶었어요.

ⓒjaehun oh

ㅡ ‘하얀바늘’은 업사이클링 제품을 중점적으로 전개했어요. 업사이클링 작업을 시작한 연유가 있었나요?

사실 업사이클링에 의미를 두고 시작한 브랜드는 아니에요. 순전히 소재가 가진 매력에 집중하다 보니 소재가 가진 또 다른 가능성 역시 탐구하게 된 거죠. ‘하얀바늘’의 첫 작업물은 세븐일레븐 편의점 비닐봉지로 만든 에어팟 키링인데요. 봉지의 색이나 질감이 의류에 쓰이는 원단만큼이나 귀엽게 느껴져서 이후에도 같은 소재로 다양한 작업을 진행했어요. 워낙 볼드한 디자인과 알록달록한 색감을 좋아하는 편이어서인지, 그때는 정말 비닐봉지가 “나 좀 봐줘!” 하는 것 같았달까요? (웃음)

ⓒjaehun oh

ㅡ 소재를 선정한 이후에 진행되는 작업 프로세스가 궁금해요.

우선 소재를 눈앞에 두고 어느 부분을 어디에 어떻게 사용할지 찬찬히 뜯어보는 시간이 필요해요. 그러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스케치 후에 패턴을 떠서 샘플을 만들어봅니다. 완전히 새로운 디자인 작업인 경우에는 서너 번 정도 수정하는 과정을 거치기도 하고요. 업사이클링 작업은 동일한 소재의 수량이 한정적이어서 제작에 실패하면 더 사용할 여유분이 없어요. 이 같은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샘플 제작에 공을 들이는 편이에요. ‘이 패턴이다!’ 확신이 들 때에야 골라 둔 소재로 작업하는 거죠.

작업의 재료는 원단부터 종이, 테이프에 이르기까지 무궁무진하다. ⓒjaehun oh

ㅡ 과자 포장지, 종이컵, 박스테이프…. 다양한 소재들을 작업의 재료로 사용하고 있어요. 특성이 다른 소재들을 함께 다루는 일은 퍽 어렵게 느껴지는데요. 재료에 따라 작업 방식이 달라지기도 하나요?

원단과 비닐, 종이 등 여러 소재들을 묶어 작업하는 일은 한 가지 소재만으로 작업하는 일보다 훨씬 난도가 높아요. 다행인 건 대부분 재봉틀 작업이 가능한 소재들이어서 큰 차이를 못 느낀다는 거예요. 소재에 맞게 재봉틀 세팅을 달리하고, 소재가 찢어지지 않도록 세심히 작업하는 정도죠.

2022년 3월, 오브젝트 성수점에서 열린 ‘하얀바늘’ 팝업 전경. | 이미지 제공: 오브젝트​

ㅡ 지난해 열린 팝업스토어에서는 앞서 이야기 나눈 업사이클링 제품을 선보이는 동시에 주문 제작을 받았어요. 

당연히 버릴 법한 쓰레기에도 기억이 담겨있으면 소중해지는 것 같아요. 저는 지난 일본 여행에서 버리지 않고 챙겨온 과자 포장지로 작은 파우치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는데요. 파우치를 보면 문득 그때의 즐거운 기억이 떠오르더라고요. 많은 분들이 기억이 가진 힘에 공감해 주실 것 같아 선보이게 되었어요.

이미지 제공: jaehun oh

오브젝트에서 진행한 팝업스토어에 방문한 분께서 아이돌 그룹 ‘NCT DREAM’의 포토카드 비닐로 에어팟 케이스를 제작해달라고 요청하셨어요. 손바닥만 한 작은 케이스 안에 멤버 7명의 얼굴을 다 담고 싶은 마음에 엄청난 노력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주문 이후로 동일한 주문이 다섯 건 정도 있었어요. 역시나 ‘팬심’이 최고구나 했죠. (웃음)

ㅡ 얼마 전 ‘하얀바늘’ 운영을 중단하고 작업자의 길을 택하게 되었다고 밝혔어요. 심경의 변화가 있었나요?

저는 다양한 취향을 가지고 있어요. 음악 취향만 하더라도 즐겨 듣는 뚜렷한 장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재즈부터 클래식, 케이팝, 힙합 등 두루 즐겨 듣습니다. 하지만 브랜드라는 건 명확한 색과 방향성을 오랫동안 지속해야 하잖아요. 다채로운 취향만큼이나 만들고 싶은 것도 수백 가지인 제가 작은 소품을 집중적으로 제작하는 ‘하얀바늘’을 길게 끌고 가기에는 어려울 것 같다는 판단이 섰어요. 같은 제품을 반복적으로 만드는 일이 힘에 부치기도 하고요. 스스로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서 내린 결정이에요.

ⓒjaehun oh
ⓒjaehun oh

ㅡ 때문인지 아기자기한 소품에서 벗어나 조명, 오브제와 같은 작업을 다수 공개했어요.

이어지는 이야기예요. 제 디자인이 잘 팔려서 유명 편집숍에 입점하고, 수많은 제품을 만들 수 있는 건 정말 기쁜 일이고 운이 많이 따라줬죠. 그럼에도 반복되는 작업과 그에 소요되는 시간에 많이 지쳤던 것 같아요. 일종의 탈출구를 찾는 심정으로 오브제를 만들기 시작했고, 조금 더 발전시키다 보니 조명에까지 이르렀어요. 판매를 위한 제품을 디자인할 때는 ‘잘 팔릴 디자인일까?’하는 고민을 줄곧 안고 있었는데, 애초부터 오브제는 판매를 목적으로 하는 작업이 아니어서 훨씬 편안하게 작업할 수 있었어요.

ⓒjaehun oh

ㅡ 아디다스 트랙탑, 노스페이스 패딩, 나이키 운동화 등 의류를 소재로 활용한 작품도 인상 깊었어요. 시리즈를 기획하고 있나요?

패션 브랜드를 활용한 작업이 아무래도 사람들에게 주목받기 쉬운 것 같아요. 유독 흥미롭게 봐주시기도 하고요. 더불어 대량의 쓰레기를 생산하는 업계가 패션계이기도 해서 ‘시리즈’라고 명확히 계획을 세우지는 않았지만 꾸준히 의류를 소재로 작업하려고 해요.

 

ㅡ 작업에서 어떤 부분을 강조하고자 하나요?

식품 포장지나 의류 같은 경우 대부분 소재에 브랜드 로고가 프린트되어 있어요. 가능한 브랜드 네임에 제 작업이 가려지지 않도록 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브랜드의 힘을 빌리는 데만 그칠 수 없으니까요. 브랜드가 가진 이미지와 사용할 소재가 가진 특성을 제 나름대로 해석해서 작업물의 형태와 디테일을 결정하고 있으니 이런 부분을 알아봐 주셨으면 해요.

조각보를 재해석해 제작한 오브제. ⓒjaehun oh

ㅡ 최근 작업 중 가장 만족스러웠던 작업을 꼽는다면요?

최근 작업은 아니지만, 작년 8월에 시작한 조각보 오브제 작업을 이야기하고 싶어요. 패치워크* 방식을 주로 다뤄온 저로서는 조각보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데요. (웃음) 이전까지 작업을 하는데 있어 ‘한국적인’ 것에 큰 감흥이 없는 편이었지만 조각보로는 뭔가 만들어보고 싶더라고요. 

*크고 작은 여러 가지 옷감 조각을 이어 맞추는 수예 기법
ⓒjaehun oh

조각보 오브제를 제작할 때는 노방 원단을 사용해요. 바람이 불면 날아가겠다 싶을 정도로 가볍지만, 탄탄하게 형태를 잘 유지하는 점이 노방 원단으로 만든 오브제의 특징입니다. 또 대체로 평면 형태인 조각보를 입체 형태로 만들어 오브제의 앞면과 뒷면, 바닥 조각 모양이 한눈에 보이는 것도 즐겨 주시면 좋겠어요. 너무 무겁고 정갈한 느낌이 나지 않도록 귀엽고 발랄한 색감으로 작업했으니 쉽게 접근하실 수 있을 거예요. 여러 일들로 인해 아직 조각보 오브제를 발전시키지 못하고 있지만 꼭 시간을 들여 시리즈로 제작하고 싶습니다.

시리얼 ‘콘푸라이트’ 포장지로 만든 파우치와 키링. 시리얼 보관을 위해 쓰이던 스티커로 에어팟을 안전하게! ⓒjaehun oh

ㅡ 새롭게 도전하고 싶은 영역이 있나요?

현재 테크 액세서리 브랜드 ‘케이스티파이(CASETiFY)’와 작업을 구상하고 있는데요. 이전과는 또 다른 새로운 시도를 위해 드릴을 구매했어요. 눈에 띄는 소재는 뭐든지 다 뚫어보고 싶어요. (웃음) 재봉틀, 바느질이라는 매체가 소재에 한계를 두기 쉬운 편이지만, 그 부분을 넘어서는 신선한 작업을 선보일 예정이에요.

ⓒjaehun oh

ㅡ 작가님이 지향하는 작업적 방향성은.

작업이 무거워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는 것. 재기 발랄하고 엉뚱함이 넘치는 저만의 작업을 선보이고 싶어요. 물론 우수한 퀄리티도 함께 갖춰야 하겠죠. 어떤 콘셉트적인 작업물이 아닌, 실생활에서 사용할 수 있는 작업물들로 찾아뵐 것 같아요.

김가인 기자

취재 협조 및 자료 제공 오재훈 작가

김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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