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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24

AI가 해낼 수 없는 건축가의 일

2023 프리츠커상 수상자, 데이비드 치퍼필드
건축가이자 도시 계획자인 데이비드 앨런 치퍼필드(David Alan Chipperfield)가 2023년 프리츠커 건축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건축 평단도, 대중도 “받을 사람이 받았다”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특히 현직 건축가들이 이번 수상자 선정과 관련해 강력한 지지를 보내고 있다. 왜 그럴까?
BBC Scotland Headquarters, photo courtesy of Ute Zscharnt for David Chipperfield Architects

올해 초 오픈 AI가 선보인 챗 GPT 이후, 산업계가 빠르게 재편되고 있는 것처럼 건축계도 인공지능과 머신러닝 기술이 발달하며 건축가의 작업 일부를 자동화하는 시도가 활발하다. 건축 설계에 필요한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AI 기반의 소프트웨어는 계속 진화 중이며, 3D 프린터로 건물을 짓는 기술 또한 고도화되고 있다. 2020년 네덜란드의 한 건축 회사는 3D 프린터로 희귀병 어린이를 위한 집을 120시간 만에 짓기도 했다.

인공지능이 건축가의 일을 대체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의 기술력만 두고 이야기하면, 답은 일정 부분 정해져 있다. 앞 문장에 ‘건축가’ 대신 ‘작가’나 ‘화가’를 대체해도 마찬가지이다. 현재 AI가 할 수 있는 정도의 결과물을 만들어온 작가나 화가, 건축가는 대체될 것이고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일을 해온 사람은 앞으로 더 필요한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현직 건축가들이 이번 프리츠커상 수상에 환호하는 이유는 이와 맞닿아 있다. 인공지능이 해낼 수 없는 건축가의 일을 그 누구보다 잘 보여주는 주인공이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데이비드 앨런 치퍼필드(이후 데이비드 치퍼필드)이기 때문이다.

Amorepacific Headquarters, photo courtesy of Noshe

건축물을 설계할 때 기능성과 안정성은 기본이다. 여기에 역사와 사회, 경제 환경적인 이슈를 고려하고 지속 가능한 건축물과 도시를 계획하는 일이 필요한데 이는 아직까지 인간의 영역으로 남아있다. 저 멀리서 보아도 한눈에 들어오고 그 모습이 아름답다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가 한국에 남긴 아름다운 유산이 있다. 바로 서울 용산역 인근 ‘아모레퍼시픽 사옥’이다.

서울 용산에 설계한 아모레퍼시픽 사옥

Amorepacific Headquarters, photo courtesy of Noshe

아모레퍼시픽에서 사옥 건설을 결정한 후, 국제설계공모를 진행했다. 당선작은 데이비드 치퍼필드 건축사사무소. 심사는 2010년 6월 아모레퍼시픽 사옥에서 진행됐다. 조성룡(조성룡도시건축 대표) 건축가가 심사 위원장을 맡았고, 김봉렬(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김영준(김영준도시건축 대표), 박승홍(디자인캠프문박 대표), 김기호(서울시립대학교 교수)가 참여했다. 당시 심사 위원장이었던 조성룡 건축가는 당선안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아모레퍼시픽 본사 설계공모에서 데이비드 치퍼필드 건축사사무소의 응모안은 자연 환경 뿐 아니라 도시 주변의 인문 환경에 깊은 관심을 갖고 의미를 읽어낸 결과물이라고 모두 판단했습니다. 당시 용산역 일대에 초고층 상업 건물과 주거 건물이 들어설 예정이었는데, 이에 휩쓸리지 않고 오히려 상대적으로 낮고 단순하면서 강한 이미지를 주는 설계안이었습니다.”

Amorepacific Headquarters, photo courtesy of Noshe

“동쪽의 용산 공원, 북쪽의 남산 등 주변 풍경과도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었고요. 또 6~7층 높이의 높은 개구부와 넓은 중정을 끼고 있게 하고 8.1X8.1m로 균등하게 설계된 사무 공간을 대공간과 구별해 설계한 것은 바람의 순환과 일조를 효율적으로 확보하기 위해서였죠. 향과 풍경, 기후 특성과 계절 감각, 문화와 습관을 고려해 단순하면서도 친밀감과 개방감이 높은 건축물을 완성했다고 생각합니다.”

Amorepacific Headquarters, photo courtesy of Noshe

건축물의 일정 영역은 임대용 오피스로 사용될 예정이었다. 임대 오피스 건축물에서는 수익성을 간과할 수 없다. 건축비가 너무 많이 나와서도 안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임대 과정에서 매달 청구되는 관리비가 임대인에게 부담스럽지 않은 정도여야 한다. 당선작은 8.1X8.1m 모듈을 잘 배치해 경제성을 극대화하는 동시에 채광과 환기를 조절하기 위해 다양한 형태의 루버 시스템으로 건물을 감싸 쾌적하면서 냉난방비가 크게 소요되지 않게 했다. 다음은 <아모레퍼시픽 새 사옥 스토리북>에 게재된 데이비드 치퍼필드의 인터뷰 내용 중 일부분이다.

Turner Contemporary, photo courtesy of Simon Menges

“최선의 지속 가능한 해법을 요구했기 때문에 계절별 날씨에 관한 과거 기록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서울의 경우 건축물에 자연 환기를 제공하려면 기후 조건상 봄과 가을, 연간 최대 6개월 동안이 알맞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혼합 방식의 계절별 운영 시스템을 개발했어요. 건축 부지에 바람이 어떻게 부는지도 연구해 이를 기초로 옥상 정원이 딸린 커다란 오프닝 공간을 배치할 수 있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아모레퍼시픽이 제시한 공모안과 완성된 개발안이 놀랄 만큼 유사하다는 점에서 우리 스스로도 경이롭게 여깁니다. ‘하나의 공적인 공간을 창조하는 건물’, ‘아트리움을 중심으로 형성된 건물’, ‘볼륨 사이사이에 끼워 넣은 커다란 오프닝’, ‘루버 시스템으로 조정되는 파사드’ 등 모든 구상이 설계 초기 단계부터 존재했고 마지막까지 잘 살아남았습니다.”

강하고 기념비적인 or 거의 사라질 뻔한 제스처

The Neues Museum, photo courtesy of SMB / Ute Zscharnt for David Chipperfield Architects

20세기 건축은 철과 콘크리트가 주도했다. 철과 강철, 콘크리트와 같은 현대적인 재료와 기술을 사용해 누가 더 새로운 형태로, 더 높은 건축물을 올리느냐가 건축계 주류를 이루었다. 비례미와 대칭성이 뛰어난 오피스 건물이 줄줄이 이어지며 현재의 도심 풍경을 완성했다. 데이비드 치퍼필드 역시 거대한 오피스 빌딩이나 상업 빌딩, 미술관을 지었지만 크건 작건 규모와 상관없이 그만의 고유한 매력이 담긴 건축물을 설계했고 그들은 공통적으로 명쾌한 해법과 우아함을 갖고 있다.

올해 프리츠커상 심사위원장이자 2016년 프리츠커상 수상자였던 알레한드로 아라베나(Alejandro Aravena)는 그의 작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매우 정확하고 세심하게 선택한 특정 도구로 각 프로젝트에 응답해왔습니다. 때로는 강하고 기념비적인 몸짓을, 때로는 거의 사라질 뻔한 제스처를 사용해왔죠. 그는 유행을 피함으로써 영구적으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

The Neues Museum, photo courtesy of SMB / Ute Zscharnt for David Chipperfield Architects

아모레퍼시픽 사옥이 강하고 기념비적인 몸짓이라면, 베를린 신 뮤지엄(Neues Museum)은 ‘사라질 뻔한 제스처’에 가깝다. 19세기 중반에 지어진 후 제 2차 세계대전 말기 공습으로 파괴된 옛 건물을 재건하기 위해 독일 정부는 국제설계공모를 진행했고, 데이비드 치퍼필드 건축사사무소가 맡아 2009년에 재개관했다.

 

옛 건물의 역사적인 가치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현대적인 박물관으로 변환시키기 위해 파괴된 건물을 부분적으로 복원(restoration)하고 새로운 건축 요소를 개입시켜 독특한 전시 공간을 만들어냈다. 포탄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는 기둥과 벽, 웅장한 대리석 계단이 있는 내부는 과거와 현재, 고전미와 현대미가 조화롭게 공존하며 새로운 구조물을 도입한 곳은 투명한 유리와 철재 등 현대적인 재료를 사용해 역사적인 시기가 뚜렷하게(historic clarity) 드러날 수 있게 했다. 또 이 프로젝트는 운하를 따라 이웃 박물관과 연결된다. 새롭게 태어난 박물관이 과거의 길과 깊게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새로운 관계 맺기를 자처한 것이다.

Procuratie Vecchie, photo courtesy of Alberto Parise

이탈리아 베니스 성 마르코 광장에 가면 광장을 빙 둘러싸고 회랑이 이어지는 16세기 건축물을 만날 수 있다. 건축물 가까이 다가가면 웅장한 규모도 압도적이지만 부조로 새겨진 장식들이 눈에 들어온다. 기독교적인 주제를 바탕으로 다양한 문양이 새겨져 있는데 그 섬세함이 대단하다. 대부분 사람들은 건축물이 오래된 만큼 조각 장식 역시 중세 시대부터 이어져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복원된 것이 대부분이다. 오랜 시간 군청 사무실로 사용되던 장소를 일반인에게 개방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고 데이비드 치퍼필드가 나섰다.

 

그는 이 프로젝트에서 건축과 공예가 서로 긴밀하게 얽혀 있을 수 있다는 믿음을 보여주기 위해 다소 지난하더라도 까다로운 협업 과정을 묵묵하게 이끌어낸다. 프레스코화를 복원하고 테라초와 회반죽 등 예전에 사용된 기법을 고스란히 재현해 완성했다. 일견 한 덩어리로 보이는 벽이나 바닥 또한 미세하게 달라 보이는 각기 다른 재료를 사용한 점이나, 빈틈없이 결부되도록 각각의 재료를 깎아 접합시킨 모서리를 보면 그가 추구하는 완성도가 얼마나 소름 끼치는 수준인지 알 수 있다. 옥상 테라스, 전시와 이벤트 공간, 강당과 갤러리로 이어지는 이 곳 ‘Procuratie Vecchie’ 는 하루 평균 5만 명 이상의 방문객이 찾는 명소로 자리 잡았다.

Procuratie Vecchie, photo courtesy of Alberto Parise

데이비드 치퍼필드는 20세기와 21세기를 두루 아우르며 40년 넘게 건축가로 활동해왔고 그의 포트폴리오는 아시아와 유럽, 북미 전역까지 폭넓게 펼쳐져 있다. 더 많은 프로젝트를 이곳에서 경험하기를.

 김만나 편집장

취재 협조 및 자료 제공 프리츠커 재단

김만나
15년간 피처 기자로 일했고, 현재는 네이버 디자인판 편집장으로 온라인 미디어를 경험하고 있다. 유머 감각 있고 일하는 80세 할머니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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