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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7

서체 뒤편의 이야기

한국-스위스 수교 60주년 기념 서체 '쓔이써60'
결과물을 보고, 과정에 대해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디자인의 시작과 끝만큼이나 흥미로운 것이 바로 디자인 프로세스다. 존재하지 않았던 대상이 무형의 대상으로, 무형의 대상이 유형으로 거듭나기까지의 시행착오 그리고 그 사이를 메운 질문들은 본질을 향해 있는 경우가 많다. 이에 한국과 스위스 수교 60주년 기념 서체인 ‘쓔이써60’의 디자인 과정에 대해 들여다봤다.
[쓔이써60] 볼드 | 이미지: 한글타이포그라피학교 제공

한국-스위스 수교 60주년을 기념하는 서체 개발 프로젝트는 두 나라를 연결해야 한다는 목적성을 갖는다. 그리고 그 목적은 두 나라의 유산을 접합하는 과정으로 나아간다. 스위스를 대표하는 폰트인 헬베티카를 우리 한글에 적용하는 것. 이른바 ‘헬베티카 같은 한글’이다. 과정을 추적하니 사이사이에 오간 다양한 질문들이 선명하게 다가온다. 결과만큼이나 많은 것들을 함의하고 있는 과정 중의 물음들은 어떻게 흔적을 남기며 형태를 만들어냈을까?

[쓔이써60] 미디엄 | 이미지: 한글타이포그라피학교 제공

서체 개발은 어떻게 시작됐나?

국내외에서 그래픽 디자인과 더불어 디자인 교육을 하고 있는 박경식 디자이너는 한국과 스위스 수교 60주년을 맞아 헬베티카와 어울리는 한글 폰트 제작을 떠올렸다. “작년에 스위스 대사관에서 수교 6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디자인 중심의 재미있는 프로젝트를 제안해 달라는 의뢰가 들어왔어요. 저는 지나가는 이야기로 ‘스위스 디자인’하면 헬리티카 서체가 유명하니까 서체를 개발하면 어떻겠냐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랬더니 대사관 반응이 엄청 좋더라고요. 한두 달 정도 지나 대사관은 제게 메일을 보내왔습니다. 일을 추진해 보자고요.”

 

박경식 디자이너는 한글을 디자인하며, 활자 디자인을 가르치고 있는 이용제 디자이너에게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그렇게 2022년 7월, 본격적인 기획이 시작됐다. “2007년에 개봉한 헬베티카 다큐멘터리 영화가 국내에 상영됐던 때, 헬베티카를 이야기하는 자리에 패널로 몇 번 참여했어요. 당시에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이 한글에 헬베티카 같은 폰트가 있냐는 것이었죠. 그때 한글로 헬베티카나 유니버스 같은 폰트를 만들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한 적이 있었어요.”

 

한국-스위스 60주년 수교 기념 서체 개발을 위해 이용제 디자이너는 윈도에 해당하는 대표 글자와 더불어 디렉터를 맡았다. 그리고 한글타이포그라피학교에서 이용제 디자이너에게 활자 디자인을 배운 김민기, 신유림, 정근호 세 디자이너는 이용제 디자이너가 그린 대표 글자를 바탕으로 쓔이써 볼드와 미디엄, 레귤러, 울트라-라이트를 나눠 맡았다.

이미지: 한글타이포그라피학교 제공

한글과 알파벳의 간극,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한글과 알파벳의 문자 구조는 완전히 상이하다. 게다가 알파벳은 대문자와 소문자의 크기가 다르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한글은 또 어떤가? 한글은 한국의 고난, 시련의 역사와 함께하기 때문에 지난 100년 동안 다양한 글자체가 개발되지 못했다. 디자이너들에게 두 문자가 지니는 형태와 맥락, 역사가 너무 달라 조화롭게 섞는 일이 난제였다.

 

그렇게 이들은 헬베티카에 어울리는 한글을 상상하며 몇 가지 질문을 던지게 된다. 첫 번째 질문은 ‘헬베티카의 역사적 조형적 맥락을 한글에 접목할 수 있는지’의 여부였다. 이는 헬베티카에 대한 ‘역사적인 맥락을 재검토’하는 과정으로 이어졌다. 연이어 또 다른 질문을 떠올렸다. ‘한글의 글자체 중에 알파벳 폰트처럼 그로테스크와 네오-그로테스크라고 할 만한 글자체가 있는지’ 여부였다. 이외에 ‘서로 다른 구조의 알파벳과 한글이 어떤 기준으로 조화를 이룰 수 있을지’ 질문하는 과정이 있었고, ‘헬베티카의 표현을 한글에 그대로 반영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이미지: 한글타이포그라피학교 제공

재점검과 재인식의 과정

헬베티카는 네오-그로테스크라는 양식의 글자체다. 그로테스크 서체에서 더 현대적인 디자인으로 발전한 서체가 네오-그로테스크다. 그로테스크 양식은 글씨의 특징을 없애는 것을 지향하기 때문에 글자 너비가 비교적 일정하고, 줄기의 강약 변화가 없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런 글자체를 더 균질하게 다듬으면 네오-그로테스크 양식이 된다.

 

그렇다면 헬베티카의 특징은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이용제 디자이너를 비롯한 세 디자이너는 일정한 글자 너비와 단순한 글자 구조, 수직과 수평의 터미널 등 ‘특징이 없다는 점’을 특징으로 떠올렸다. 떠올린 특징에 기반을 두고 한글을 디자인했더니 기하학적인 글자체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기하학적 글자체가 네오 그로테스크 양식이라기보다는 완벽한 원이나 정사각형 등을 요소로 삼고 있는 지오메트릭 산세리프 양식에 가까웠다는 점이다.

 

그렇게 이용제 디자이너는 재점검과 재인식의 과정을 거친다. “우리는 헬베티카를 과거와 단절된 채, 새로이 태어난 그 무언가처럼 인식하곤 합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 말이죠. 저희는 서체의 구조와 표현을 자세히 관찰하지 않고, 서체를 이루는 관념적인 특징만 고려했다는 점을 깨닫고 반성했습니다. 단지 역사책에 기입된 것들에 동의하고 속단한 것이죠. 결국 저희는 약 두 달 동안 작업한 것들을 엎고 다시 그리기 시작했어요. 헬베티카를 다시 출력해 이전 글자체와 비교하는 과정을 거쳤고, 2007년에 제작된 헬베티카 다큐멘터리를 다시 보면서 왜곡된 이해를 바로잡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헬베티카 다큐멘터리 영화를 감상하고 있는 디자이너들 | 이미지: 한글타이포그라피학교 제공

이후 디자이너들은 한글의 역사와 맥락에 대해서도 연구했다. 그리고 한글 글자체 역사에서 고딕체의 등장과 변화를 살펴봄으로써 쓔이써60의 출발점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1933년에 만들어진 동아일보의 고딕체에서 착안했다. “동아일보에서 고딕체인 ‘고짓구체’를 발표하기 이전에 한글 형태에는 특징이 있었고, 필기구의 흔적도 있었어요. 그런데 동아일보 고딕체는 마치 알파벳의 그로테스크처럼 글자의 높이와 너비 비율을 물리적으로 일정하게 제작했습니다. 한글의 원래 모습은 어떠했고, 고딕체라고 불리는 서체는 언제부터 어떻게 만들어져서 변해왔는지 등을 개관하면서 한글의 그로테스크와 네오 그로테스크 범위를 설정하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한글의 곡률은 무엇인지 연구하면서 최대한 그것을 가져와보자고 생각했습니다.”

(왼쪽부터) sm중고딕, 동아일보 고딕, 윤고딕320 | 이미지: 한글타이포그라피학교 제공

왜 ‘쓔이써60’인가?

서체를 디자인할 때 염두 해야 할 부분은 글자 크기에 따라 활자 조형과 공간이 섬세하게 조정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글자의 기준 크기를 설정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디자이너들은 서체 개발을 기획하면서 서체가 제목용 또는 디스플레이용으로 많이 쓰일 것이라 예상했다. 그렇게 수교 60주년을 기념한다는 의미까지 담기 위해 기준 크기를 60포인트로 설정했다. 

서체의 이름이 ‘쓔이써’인 이유는 과거에 우리가 스위스를 발음한 방식에서 기인한다. “헬베티카가 라틴어로 스위스라는 뜻이에요. 서체 이름을 짓기 위해 스위스 지역도 찾아보고, 각종 어원들도 찾아봤어요. 그런데 딱히 와닿는 게 없더라고요. 그렇게 한참을 찾아보다가 우리가 스위스를 뭐라고 불렀는지 알아봤어요. 한자를 쓰던 우리는 스위스를 ‘서사국’이라고 표기했다고 해요. 상서 ‘서’ 선비 ‘사’ 즉, 복되고 길할 조짐이 있다는 뜻의 상서러운 선비의 나라라고 표기한 것이죠. ‘서사’의 동국정운식 발음을 찾아 이를 현대 국어로 적어봤더니 ‘쓔이써’에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쓔이써라는 이름이 탄생하게 된 것이죠.”

이미지: 한글타이포그라피학교 제공

과정 헤아리기를 통해 보이는 것들

박경식 디자이너는 우리가 매일매일 사용하는 서체들 뒤편에 있는 노고에 대해 강조한다. “폰트 제작이 얼마나 까다롭고 오래 걸리는 일인지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아요. 폰트는 파일 형태로 간편하게 전달이 되지만 그 안에는 서체 개발자의 노고와 함께 시간적 요소와 금전적인 요소 등 질적, 물적 요소가 함께 얽혀 있지요. 사용자는 문서 작업을 하면서 쉬이 서체를 활용하곤 하지만, 제작 과정에 대해 헤아려보는 사람은 많지 않죠.” 

 

미시적인 과정과 거시적인 과정을 아우르는 서체 개발의 과정은 서체의 역사와 맥락을 연구하고 조사하는 것을 넘어 서체의 세부 항목들을 조정하고 그것들의 전체적인 조화와 균형을 살피며 전개된다. 이에 프로젝트 과정을 이룬 질문의 줄기를 따라가보는 것이 필요한 이유는 결과물을 이루는 역사와 맥락을 들여다보는 것을 넘어 본질에 대한 전문가의 시각과 고찰까지 살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결과물을 통해서는 온전히 들여다보기 어려운 핵심적인 논의들에 맞닿아 있다.

[슈이써60] 울트라-라이트 | 이미지: 한글타이포그라피학교 제공 ​

그리하여 쓔이써60의 디자인 프로세스를 살피는 일은 헬베티카와 한글의 접점을 찾는 과정 이상의 중요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한 나라를 넘어 세계의 유산이 된 서체와 우리의 한글 사이의 형태적, 역사적 간극을 살펴봄으로써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성에 대한 통찰력까지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박경식 디자이너는 주한스위스대사관 협력으로 ‘헬베티카를 사용해 디자인한 포스터’와 ‘쓔이써를 사용한 포스터’ 그리고 ‘쓔이써 개발 과정’을 오는 9월 초부터 약 두 달 동안 한국국제교류재단 KF 갤러리에서 전시할 예정이다. 서체는 단순히 글에 활용되는 도구를 넘어 독립적인 정체성을 가질 수 있으며 사용하는 이들의 삶과 태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과정을 들여다봄으로써 서체의 검은 면 뒤편에 대해서도 사유해 보기를 권한다.

 하도경 기자

취재 협조 및 자료 제공 박경식, 이용제 디자이너, 한글타이포그라피학교

하도경
수집가이자 산책자. “감각만이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현실”이라는 페소아의 문장을 좋아하며, 눈에 들어온 빛나는 것들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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