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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14

사춘기의 화법으로, 엔초비

십대 시절 보고 듣고 느꼈던 어느 것들.
브랜드 엔초비는 김근혁 디렉터의 청소년기를 오롯이 반영한다. 그 시절 보고, 듣고, 느꼈던 그 어떤 것도 소재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유는 명쾌하다. 잊혀 가는 무언가를 사람들이 기억했으면 하니까. 그는 켜켜이 쌓인 시간을 걷어내고 꺼낸 이야기에 자신의 색을 칠한다. 선명한 색상, 정교한 패턴, 다소 직관적인 디자인으로 재치 있게 콘셉트를 풀어낸다. 그의 컬렉션을 찬찬히 살펴보면 모두 다른 지점에서 시작했지만, 결국 하나의 관통하는 이미지가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소년의 일탈, 소년 검투사, 어린 황제의 다사다난한 삶, 어린 눈으로 봤던 사회의 모습. 그의 아카이빙은 매 시즌 새로운 컬렉션으로 현재 진행 중이다.

Interview 김근혁

엔초비 디렉터

‘엔초비’라는 발음이 독특한데요. 어떻게 정한 브랜드명인가요?

이름에 큰 의미를 두진 않았어요. 쉽고 단순하면서 쿨한 느낌이었으면 했거든요. 2개, 3개 음절로 이루어진 단어들 중에서 고민했어요. 간결하면서 사람들에게 낯익은 인상을 주는 단어를 찾던 와중에 어머니가 해주신 멸치 반찬이 생각났어요. 멸치anchovy는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인데 어감도 정겹잖아요. 무엇보다 영문 발음이 무척 귀엽더라고요. 스펠링을 약간 변형해서 ‘엔초비ANCHOVI’가 된 거예요. 추구하는 옷의 분위기와도 잘 맞아서 다행이죠.

사춘기 청소년의 이미지를 뮤즈로 삼는다는 브랜드 소개를 봤어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브랜드는 결국 자신을 반영한 것이잖아요. 엔초비는 제가 직접 경험한 10대 생활의 아카이빙이라고 볼 수 있어요. 사춘기 시절의 이미지를 모티브로 하기 때문에 과거의 인물이나 물건처럼 향수를 자아내는 요소들을 컬렉션으로 풀어내고 있어요. 특히 예전에는 많이 사용했지만, 지금 쓰이지 않는 것들을 조명하고자 해요. 예를 들어, 카세트테이프가 음반 시장을 장악했지만 지금은 디지털 음원이 등장하면서 상황이 바뀌었잖아요. 이런 옛 물건들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제 이야기를 담아 디자인에 접목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이 늘 궁금해요.

 

2021 SS 컬렉션에서도 과거의 향수를 자극하는 소품을 사용했어요.

동묘나 풍물시장에서 구했어요. 과거의 멋을 지닌 도자기, 골동품, 각종 소품을 만나볼 수 있어서 자주 찾는 곳이에요. 그렇게 구해온 물건들에 현대적인 멋을 더하기 위해 리터치 작업을 해요. 기본적인 형태는 유지하고 원하는 색으로 락카를 뿌리거나 디테일에 약간의 변형을 주는 식으로요. 참, 촛대는 중고 마켓에서 구매했어요(웃음). 가끔 독특한 물건을 발견할 수 있어서 주의 깊게 보고 있어요.

​브랜드가 두 시즌만에 주목받기 시작했어요. 올해 이탈리아 <보그>에서 차세대 신진 디자이너로 소개되기도 했죠.

영광스러운 일이었어요. 한때 종일 탐독했던 매거진이거든요. 처음 제 브랜드를 소개하고 싶다는 내용의 메일을 받았는데 스팸 메일인 줄 알았어요. 다행히 아니더라고요(웃음). 세계에서 활동하는 10여 개 신진 브랜드들을 꼽아 소개하는 내용이었어요. 어떤 브랜드 스토리를 지니는지, 어떤 디자인을 하고 있는지 알릴 수 있는 기회였죠.

2018년에는 ‘도쿄 뉴 디자이너 패션 그랑프리’ 파이널리스트로 참가했어요. 어떻게 보면 첫 쇼라고 볼 수 있는데, 소회가 남달랐을 것 같아요.

아시아권에서 제법 규모가 큰 편인 대회라 엄청 떨렸어요. 최종 선정된 파이널리스트만 쇼를 할 기회를 얻는데 디자이너로서 굉장히 뿌듯했죠. 제 옷을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 보여줄 수 있는 자리잖아요.

콘테스트 의상이면 화려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에요. 당시 의상은 어떻게 디자인했나요?

소재나 실루엣, 스토리텔링 면에서 튀는 부분이 있어야 했어요. 콘셉트가 가장 중요했죠. 평소 영화에서 영감을 많이 얻는 편인데, 영화 <빌리 엘리어트>를 보고 복싱과 발레가 어우러지는 이미지를 떠올렸어요. 색다른 조합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이거다 싶더라고요. 복싱 가운이나 글러브 같은 요소는 외형적인 디자인으로, 발레를 연상시키는 백조 깃털은 페더 소재로 표현했어요. 그때 했던 작업을 바탕으로 현재도 크로셰처럼 수공예적인 기법을 활용하고 있어요.

 

매 시즌 직접 디자인한 패턴이 눈에 띄어요. 콘셉트와 연결되는 디테일이 있다고 들었는데.

패턴 개발에 많은 공을 들이는 편이에요. 보통 시즌 콘셉트에 맞는 큰 틀 안에서 세부 디자인을 하는데요. 2021 SS 컬렉션은 영화 <마지막 황제>의 ‘푸이’라는 인물에서 영감을 받았어요. 푸이는 어린 나이에 황제로 즉위해 극진한 보살핌을 받다가 나중에 정원사가 돼요. 이를 자립이라는 제목을 붙여 ‘청나라, 밀리터리, 정원사’ 세 가지 키워드로 컬렉션을 풀어냈어요.

식물이나 꽃, 절단 가위를 하나하나 그린 후 배열해서 식물도감 느낌의 패턴을 완성했죠. 그리고 청자 패턴을 자세히 살펴보면 총과 용, 견장 디테일을 발견할 수 있어요. 직관적으로 청자 무늬를 전달하되 그 안에서 재밌는 요소를 찾아가는 거죠.

 

간혹 우리가 많이 입는 체크, 스트라이프를 변형하기도 해요. 첫 시즌에서는 영화에서 영감을 받아 ‘소년 검투사’라는 제목으로 컬렉션을 전개했는데요. 이때, 콜로세움의 건축 양식을 본떠 스트라이프에 적용했어요. 가장 최근에 선보인 2021 FW 컬렉션에서는 엑셀 표를 활용해 체크 패턴을 만들기도 했답니다.

 

컬렉션을 구상할 때 무엇에 중점을 두나요?

개인적으로 옷은 ‘입는’ 것이니 쉬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다시 말해, 쉽게 입고 즐길 수 있는 형태의 옷을 선호하는 편이에요. 물론 저도 예술적이고 구조적인 옷들을 좋아해요. 그렇지만 제가 추구하는 디자인 방향은 아닌 것 같아요. ‘단순하게 시작하고, 재밌는 요소를 끌어내자’라는 모토를 바탕으로 작업하고 있어요. 의상 디자인이나 연출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콘셉트를 느낄 수 있게끔 하는 것이 목표예요.

엔초비의 시그니처 디자인이 있다면요?

저번 시즌에 선보인 ‘세라믹백’. 가방의 패턴이나 형태가 이전에 없던 느낌이라고 생각해요. 세라믹백 공정 과정이 복잡해서 단가나 제작 기간을 맞추는 게 까다로운데, 조금 단순화해서 꾸준히 출시할 계획이에요.

영감을 주는 아티스트나 디자이너가 있나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조나단 앤더슨Jonathan Anderson을 좋아해요. 그의 디렉팅을 거친 작업은 왠지 밝고 긍정적인 느낌이거든요. 요즘은 극사실주의 작가 듀안 핸슨Duane Hanson의 작업도 많이 봐요. 유리섬유로 사람의 형상을 만드는데 사회적인 메시지와 일상의 모습을 절묘하게 담아내서 놀라워요.

며칠 전 새 시즌 캠페인을 공개했는데, 소개를 부탁드려요.

이번 2021FW 콘셉트는 ‘오피스office’에요. 90년대의 사무실에서 영감을 받아 컬렉션을 전개했어요. 캠페인에서는 과거의 경직된 계급 문화를 블랙 코미디처럼 표현하려고 했는데요. 부장, 대리, 신입사원의 직급별 특징을 바탕으로 연출했어요. 이 회사의 CEO는 앵무새예요. 섭외가 가장 어려웠죠(웃음). 무엇보다 이번 의상에는 90년대 무드가 배어 있는데요. window98 excel 프로그램을 활용한 체크 패턴이 대표적이에요. 또한 배색으로 빈티지한 느낌을 더했어요.

​​

마지막 질문이에요. 브랜드 엔초비를 세 가지 단어로 표현하면?

저희의 브랜드명처럼 ‘easy’, ‘light’, ‘cool’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positive’.

 

 

김세음

자료 협조 엔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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