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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06

사라진 을지로를 그림으로 기록하다

정재호 작가 개인전 <나는 이곳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과거 한국의 경제 성장기에 힘입어 도심 산업의 메카로 떠오른 을지로. 역동적인 현대사의 흔적이 남아있던 이곳은 도심 재개발 및 정비 사업이 추진과 함께 그 옛 모습을 하나 둘 잃어가고 있다. 정재호 작가는 이처럼 사라져 가는 을지로 일대의 풍경을 수년 전부터 그림으로 차곡차곡 기록했다. 그 일련의 풍경화를 볼 수 있는 작가의 개인전 <나는 이곳에서 얼마나 오랫동안>이 삼청동에 자리한 초이앤초이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모습 Guise, 2022, 캔버스에 오일, 194 x 130.3 cm

정재호 작가는 그간 사라질 위기에 처한 혹은 사라질 예정인 도심 속 시범 아파트 단지에 관심을 가져왔다. 1960~70년대 국가 주도의 경제 성장 및 부흥과 함께 ‘산업화’ 그리고 ‘도시화’를 상징했던 아파트 건축물은 어느새 도심 속 흉물로 전락했다. 애써 감추고 싶어 하는 도시의 이면을 작가는 묵묵히 그림으로 기록했다. 카메라로 직접 찍은 사진과 국가기록원에서 찾은 과거 아파트 모습을 참고해 그는 자신만의 언어로 도시의 그늘을 그렸다. 2018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후보 작가로 소개한 ‘난장의 공'(2018)과 오랜 아파트를 기록해 온 〈아파트 연작〉은 그의 대표 작품이다.

최근 작가의 관심은 을지로 일대로 옮겨왔다. 지난 15개월간 그는 을지로 일대에 자리한 세운 상가, 대림 상가, 동대문 아파트 등을 오르내리며 마주한 풍경을 그림으로 기록했다. ‘모습(Guise)’이라는 제목의 그림은 시계 골목으로 유명했던 세운 4구역 예지동의 재개발 풍경을 담았다. 화면 속 우두커니 서 있는 연분홍색 건물은 최근 철거되었고,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연분홍색의 건물은 이제 그의 그림 속에서만 존재하는 셈이다.

동대문 아파트 Dongdaemun Apartment, 2022, 캔버스에 오일, 194 x 130.3 cm

이처럼 작가는 재개발로 사라지는 을지로 풍경을 기록하지만 이를 통해 사회적 메시지를 던지지 않는다. 그는 풍경은 그저 풍경으로 머무를 때가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아울러 이러한 풍경을 우울하고, 슬프게 바라보지도 않는다. 오히려 작가는 자신이 그린 그림 속 풍경을 낭만적이라고 생각한다고. 이름 모를 이들의 삶의 흔적과 그 마지막을 기록하는 소중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그가 기록한 마지막 풍경들은 어둡고, 음침하기보다는 되려 포근하고 따뜻한 기운이 맴돈다. 1967년에 완공해 지금까지도 보존되고 있는 동대문 아파트를 담은 그림이 대표적이다. 작가는 자신이 경험한 다양한 시간대 중에서도 중정으로 햇빛이 쏟아지는 순간을 포착했다.

이곳은 쇠락하여 사라지는 곳이기도 했지만, 수많은 세부들이 나와 다름없는 삶의 부침을 겪는 곳이기도 했다.

 

– 작가 노트 중

서울의 눈, snow in seoul, 2023, 캔버스에 오일, 200 x 150 cm
하이케와 나 Heike and I, 2022, 캔버스에 오일, 162 x 112 cm

한편, 정재호 작가는 자신의 그림 속 풍경을 사진 그대로 담아내지 않는다. 그가 사진을 참고하는 것은 객관성과 세밀함을 높이기 위함이지 단순히 재현과 묘사를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 전시 오프닝 직전에 완성한 ‘서울의 눈'(2023)과 비 오는 여름 세운 상가 5층 데크에서 서쪽을 바라본 장면을 그린 ‘하이케와 나'(2022)에서는 그의 회화적 표현력이 돋보인다. 눈과 비가 내리는 상황과 환경을 감안해 그는 멀리 보이는 풍경을 희미하게 그려냈고, 관객이 바라보는 시점을 고려해 눈송이와 빗줄기를 세밀하게 표현했다. 이를 통해 계절의 감각 그리고 시공간에 흐르는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다는 점도 그가 기록한 풍경화의 특징이다.

유령들 Ghosts, 2021, 캔버스에 오일, 91 x 65 cm

어떤 장소는 그곳을 바라보는 누군가의 시선이 있을 때 비로소 풍경이 된다.

그 시선은 세속적 욕망에서 빗겨 나 있는, 응어리진 마음의 한구석에 자리 잡은 정서적인 것일 테고,

또 언젠가는 사라질 장소의 운명적 속성을

영원성 속에 붙잡아두려는 희구 속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움직임을 의미하기도 한다.

-작가 노트 중

 

 
(왼쪽) 끝여름 End of summer, 2022, 캔버스에 오일, 72.8 x 60.8 cm (오른쪽) 새의 말 Bird's word, 2022, 캔버스에 오일, 72.8 x 60.8 cm

작가는 때로는 그림 속에서 풍경에 자리한 사물과 생명체를 유심히 바라본다. 그가 자신의 작가 노트에도 남긴 것처럼 사라져 가는 풍경 속에 자리한 세부들은 이곳을 동정의 눈으로 바라보지 못하도록 한다. ‘유령들'(2021)과 ‘새의 말'(2022)에 등장하는 의자, 천막, 그리고 비둘기 등은 폐허의 틈에서 ‘여기, 나 아직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어!’라고 외치는 듯한 모습이다. 이처럼 재개발과 철거 현장의 더미에서 발견한 을지로의 흔적과 체취가 궁금하다면 오는 2월 25일까지 열리는 전시를 찾아볼 것.

정재호
정재호(1971~)는 서울대학교에서 동양화를, 동대학교 대학원에서 동양화를 전공했다. 2018년 올해의 작가상의 최종 후보에 올랐으며, 현재는 세종대학교 회화과 동양화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23년 1월 초이앤초이 갤러리 서울에서 개인전을 개최한 것을 비롯해, 상업화랑, 갤러리현대, 갤러리소소, 금호미술관 등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이외에 쾰른ㆍ베를린ㆍ요르단ㆍ서울 등에서 진행된 단체전에 참여했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제주도립미술관, 금호미술관을 비롯해 여러 곳의 주요 미술관ㆍ기관ㆍ개인 컬렉션 등에 소장되었으며, 작가는 현재 고양에 거주하며 작품 활동 중이다.

발행 heyPOP 편집부

자료 제공 초이앤초이갤러리

프로젝트
<나는 이곳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장소
초이앤초이 갤러리
주소
서울 종로구 팔판길 42
일자
2023.01.13 - 2023.02.25
헤이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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