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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and 2022-12-23

와인 라벨은 어떻게 디자인될까?

전통과 예술이 담긴 와인 라벨 이야기

연말 모임 테이블 위에 자주 오르는 와인. 다채로운 라벨이 붙은 와인병은 디너 파티 분위기에 한 몫을 하며, 다 마신 빈 병은 인테리어 아이템으로도 종종 활용된다. 와인을 잘 아는 사람에게는 브랜드를 확실하게 알리고,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맛에 대한 기대치를 높여주는 와인 라벨. 어떻게 디자인되는 걸까?

올라퍼 엘리아슨이 그린 2019년 빈티지 샤토 무통 로칠드 와인 라벨. 엘리아슨의 그림은 상징으로 가득하다. 그림 중앙에 있는 선 위의 금빛 부분은 낮을, 선 아래의 파란 부분은 밤을 나타낸다. 가운데 구멍을 둘러싼 흰색 테두리는 태양의 경로다. 이 그림은 포도가 밤낮으로 자라는 것을 표현하여 와인의 맛과 자연 사이의 밀접한 연관 관계를 보여준다.|이미지: Château Mouton Rothschild 인스타그램

오랜 기간 식문화의 중심에 있어온 식품인 만큼, 와인의 라벨 디자인도 전통과 시대적 트렌드 사이에서 흥미롭게 발전해왔다. 세계적으로 와인 생산 비중이 높은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 유럽 지역에서는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와이너리들이 자신들이 이어 온 유산을 고풍스러운 로고와 그림으로 표현한다. 물론 상대적으로 역사가 짧은 기업들도 제품의 브랜드 가치를 표현하기 위해 클래식한 스타일의 와인 라벨을 만들기도 한다. 포도 수확 연도에 따라 라벨에 각 해의 테마를 담은 회화 작품이나 사진을 넣는 경우도 있으며, 최근 들어서는 와인 판매대에서 미니멀하고 모던한 디자인의 라벨들이 점점 많이 눈에 띄고 있다.

전통과 유산을 강조하는 라벨

리카솔리의 2019년 빈티지 와인 라벨들|이미지: Barone Ricasoli 인스타그램
코도르뉴 ‘안나(ANNA)’ 스파클링 와인|이미지: Anna de Codorniu 인스타그램

와인 라벨 디자인은 크게 전통적인 유형과 현대적인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통적인 와인 라벨은 와이너리의 역사와 브랜드의 유산을 강조한다. 신뢰를 주기 위해 수세기 전 손글씨처럼 장식적인 서체와 고풍스러운 로고, 그리고 주로 목가적인 풍경을 그린 스케치화가 담긴다. 이탈리아의 바론 리카솔리(Barone Ricasoli)는 900년 가까이 와인을 만들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와인 기업 중 하나가 된 곳이다. 리카솔리가 올해 가을 출시한 2019년 빈티지(수확) 와인들은 전통적인 라벨 디자인을 보여준다. 고전적인 서체와 풍경화가 그려져 있고, 로고에는 크라운 그림과 리카솔리의 설립 연도인 1141이 포함되어 있다. 16세기에 창업한 스페인 와인 기업 코도르뉴의 대표 제품 ‘안나’ 스파클링 와인의 라벨도 마찬가지로 클래식한 분위기를 살린 로고, 고전적인 서체, 그리고 와인의 이름을 따온 인물인 안나 드 코도르뉴의 초상 스케치로 구성되어 있다.

생태적인 메시지를 담은 라벨

땅 속 미생물의 활동을 표현한 비오디나미 와인, 슈란 와인 라벨|이미지: Studio Tumpić/Prenc 사진: Dejan Hren

모던한 디자인은 다양하다. 점 몇 개, 혹은 선 몇 개의 극도의 미니멀함을 추구하거나, 내용물을 드러내고 시선을 사로잡기 위해 컷아웃을 활용하기도 한다. 비행기 티켓처럼 만들어 출발지와 목적지에 와인 종류와 생산지 등의 정보를 적어 재미를 주는 라벨들도 있다. 미학이 변화하는 만큼이나 그 안에 담긴 메시지가 달라지기도 한다. 이전 세대의 와인들이 생산자의 장인 정신과 전통을 강조했다면, 최근에는 생산자가 전하고 싶은 환경에 관한 메시지를 표현하는 경우도 있다. 크로아티아의 디자인 스튜디오 T/PTumpić/Prenc가 디자인한 슈란 와인(Šuran Wine)의 라벨은 비오디나미(biodynamic) 와인 특유의 생산 방식을 강조했다. 화학물질이 담긴 제초제나 살충제 등을 사용하는 대신 토양 속 미생물을 활성화시키는 생태친화적 포도 재배 방식을 미적으로 표현해 올해 뉴욕 아트 디렉터스 클럽(ADC) 어워드와 영국 펜트어워드 등을 수상했다. 라벨에는 토양의 여러 층이 역동적인 곡선으로 맞물려 있고, 그 사이에 아주 작은 글씨들이 있다. 미생물이 토양 활동을 증대시키는,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라벨 위에도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작은 글씨 크기를 선택했다. 와인 포장에는 돋보기가 동봉되어 있어 글씨의 내용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이탈리아 기자이자 활동가인 카를로 페트리니가 쓴 글로, 식품 대량 생산을 지적하고 환경 위기에 대한 인식을 제고하는 내용이다.

동물이 등장하는 라벨

개구리 마스코트가 그려진 애로건트 프로그의 와인들|이미지: Arrogant Frog 인스타그램

캥거루와 독수리, 펭귄과 파랑새, 강아지와 고양이, 돼지와 사슴까지. 동물은 와인 라벨에 꾸준히 등장하는 소재 중 하나다. 프랑스 브랜드 애로건트 프로그(Arrogant Frog)의 와인병에는 늘 개구리가 등장한다. 19세기부터 와인을 만들어 온 애로건트 프로그는 스스로를 ‘유머 감각이 있는 겸손한 프랑스 와인메이커’라고 소개한다. 프랑스에는 자신감이 지나친 콧대 높은 와이너리들만 있는 것이 아니고, 겸손 역시 프랑스 와인의 스타일이라고 말하며 그 상징으로 우화에서 볼 법한, 신사의 옷차림에 익살스런 표정을 한 개구리를 마스코트로 내세우고 있다.

거장 화가들의 작품을 담은 라벨

윌리엄 켄트리지가 그린 2016년 빈티지 샤토 무통 로칠드 와인 라벨. '바쿠스의 승리'라는 제목의 이 작품에서 켄트리지는 술의 신 바쿠스의 승리를 축하하는 행렬의 실루엣을 그렸다.|이미지: Château Mouton Rothschild 인스타그램

전통 있는 프랑스 와인 브랜드 샤토 무통 로칠드(Château Mouton Rothschild)는 아티스트 라벨을 꾸준히 제작한다. 해마다 거장 화가들의 그림으로 라벨을 만들며, 이 그림들을 전시한 미술관을 운영하고 세계를 돌며 전시를 하기도 한다. 샤토 무통 로칠드가 처음 화가의 그림을 라벨에 넣기 시작한 것은 1945년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난 것을 기념하기 위해, 필립 드 로칠드 남작이 당시 무명이었던 화가 필립 줄리앙에게 평화가 찾아온 것을 기념하는 그림을 맡긴 것이다. 이것이 전통이 되어 이후 샤토 무통 로칠드는 윌리엄 켄트리지, 파블로 피카소, 데이비드 호크니, 이우환, 제프 쿤스, 아니쉬 카푸어, 프란시스 베이컨, 키스 해링, 앤디 워홀, 도로시아 태닝 등 동시대 유명 아티스트들에게 라벨 그림을 의뢰했다.

피터 도이그가 그린 샤토 무통 로칠드 2020년 빈티지 와인 라벨. 그림 속 악기는 현이 4개인 콰트로 기타다.|이미지: Château Mouton Rothschild

이달 초 공개된 샤토 무통 로칠드의 2020년 빈티지 와인 라벨은 와인을 즐기는 사람, 와인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이어 와인을 만드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피터 도이그가 그린 이 그림에는 달이 밝게 뜬 한밤의 포도밭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과 그 주위로 꽉 차게 열린 포도들, 그리고 멀리 뒤로 걸어가는 사람이 보인다. 고요한 가운데 음악 소리가 존재하고, 차가운 밤공기 사이로 따뜻한 달빛이 느껴지는 시적인 풍경이다. 도이그는 와인을 마시는 사람들에게 직접 보이지 않는 생산 과정을 병 위에 표현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포도를 키우는 이들부터 와인을 최종적으로 병에 담는 이들까지, 테이블 위의 와인을 만드는 데 참여한 모든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라벨이다.

박수진 객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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