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11

브루탈리즘이 음식으로 탄생하는 레스토랑

브루탈리스트 주방 선언서 13가지 원칙을 따르는 곳
건축 사조의 하나인 브루탈리즘(Brutalism)은 이름부터 프랑스어로 ‘생콘크리트’를 뜻하는 '베통 부르(Béton Brut)'에서 유래되었기에 가공하지 않은 자재, 구조 등을 사용하며 비형식주의를 특징으로 한다. 덕분에 브루탈리즘 건축물은 섬세한 아름다움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그래서 짧은 시간 동안 유행했고, 브루탈리즘으로 지어진 건물들은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상태에 있는 경우가 많았다.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하지만 최근 불어오는 친환경 열풍과 더불어 도시재생사업을 통해 이 사조는 새롭게 사람들에게 각광받게 된다. 브루탈리즘이 재조명되면서 건축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이 사조가 스며들며 인기를 얻고 있는 중이다. 화려한 장식이나 군더더기 없이 소재 그 자체에 집중하는 디자인 철학은 화려하지만 실속은 다소 없었던 디자인이 난무하는 현재에 신선한 충격을 주기 충분했다. 그래서 인테리어, 제품 등 다양한 곳에서 브루탈리즘을 만나볼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 요리에서도 이 사조가 인기를 끄는 것이 흥미로울 정도다.

사진 출처: brutalisten.com

이 시작은 과학과 예술을 결합한 대규모 설치 작업으로 유명한 현대미술 작가 카스텐 휠러(Carsten Höller)가 이끌었다. 그는 브루탈리즘을 주제로 한 레스토랑 ‘브루탈리스텐(Brutalisten)’을 열었고, <브루탈리스트 주방 선언서(Brutalist Kitchen Manifesto)>의 13가지 원칙을 준수하며 운영하고 있다.

이 레스토랑을 연 카스텐 휠러는 과연 누구인가?

사진 출처: instagram.com/brutalisten/

마우리치오 카텔란(Maurizio Cattelan), 피에르 위그(Pierre Huyghe), 필립 파레노(Philippe Parreno) 등과 함께 예술가 집단을 이루며 현대 미술계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는 카스텐 휠러의 이력을 보면 꽤나 독특하다. 일단 그는 미술을 전공하지 않았다. 독일인 부모 아래에서 태어난 그는 유년 시절을 브뤼셀에서 보냈으며, 곤충의 후각 커뮤니케이션 전략 분야를 전문으로 하는 농업 과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0년대 후반부터 미술을 시작했지만, 1994년까지 곤충학 연구원으로 일했다. 이런 그의 이력 때문인지, 그의 작품에는 여러 분야가 걸쳐져 있으며 실험적인 시도가 난무한다.

그는 주로 우리가 흔히 보는 미끄럼틀, 회전목마, 놀이 기구, 침대 등과 같은 친숙한 형태의 인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동시에, 관람객 스스로가 작품을 실험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든다. 전시장에서 이미 알고 있는 물체들을 경험한다는 것에 대해 사람들은 당혹스러움을 느끼게 되는데, 이 또한 작가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고정관념을 통해 행동을 예견하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이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가지길 바라는 것이다.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친숙한 형태의 물건들은 전시가 되면서 그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존재가 된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인 미끄럼틀 시리즈가 이를 증명하는 좋은 예시가 된다. 금속 재질로 만들어져 은빛으로 빛나는 소용돌이 모양의 미끄럼틀은 관람객으로 하여금 계단, 엘리베이터 등 이동 과정에서 겪는 경험보다 더 효율적이고 재밌다는 것을 알려준다. 작가는 작품을 선보이면서 미끄럼틀을 건축물에 도입하는 것을 주장했다. 매번 느낄 수 있는 짜릿한 경험이 사람들을 바뀌게 하고, 이런 경험을 통해 사회 전체가 바뀔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의견이다.

사진 출처: centrobotin.org

제50회 베니스비엔날레 이탈리아관에서 처음 선보인 작품 ‘Y'(2003)는 Y 형태를 따라 사람이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의 크기를 지닌 원형 틀이 일정하게 배치되어 있고, 각 틀에는 놀이 기구처럼 전구가 박혀있는 작품이다. 전구의 깜빡거리는 시간이 일정치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통로를 어떻게 지나가야 할지 고민하게 된다. 관람객 모두는 그때 순간에 따라 통로를 지나가는 경험을 하게 되지만, 모든 관객이 동일한 경험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지나갈 때 불의 깜빡임과, 각자 선택한 통로가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모든 사실과 경험에 대해 의문을 품고 이를 실험하듯 작품을 만드는 작가의 철학이 녹아든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 출처: instagram.com/brutalisten/

친숙하면서도 색다른 느낌을 선사하는 작품을 만들어온 작가이기에, 그의 새로운 레스토랑인 브루탈리스텐 또한 그와 결을 같이한다. 그가 레스토랑을 운영하면서 지키고 있는 선언서에는 요즘 레스토랑에서 보기 힘든 방침이 담겨 있어 흥미롭다.

 

<브루탈리스트 주방 선언서>

 

1. 브루탈리스트 주방은 특정 규칙이 적용되는 독단적인 주방이다.

2. 브루탈리스트 주방은 직선적이고 블록 같은 외관으로 유명한 브루탈리스트 건축에 영향을 받아 이름 지어졌다.

3. 재료는 특정 요리에 단독으로 사용된다. : 오직 물과 소금만이 추가될 수 있다.

4. 정통 브루탈리스트 요리에서는 물(또는 소금)이 첨가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요리법보다는 재료 준비를 찾는 데 중점을 둔다.

5. 어머니의 모유가 본질적으로 브루탈리스트이기 때문에 우리는 브루탈리스트로 태어났다.

6. 한 재료는 종종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나누어 요리한 다음 같은 접시에 다시 추가한다.

7. 브루탈리스트 주방에서는 일반적으로 버려지는, 간과되고 구하기 힘든 희귀 재료를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8. 브루탈리스트 요리는 세련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다른 재료들의 조합에 대한 부족과 순도에 대한 약속이다.

9. 날 것 또는 빨리 데워진 음식과 같이 정교한 요리 기술이 허용된다.

10. 접시 안에서 장식은 피해야 한다.

11. 다른 재료들이 한 접시에 있는 것은 허락되지 않으며, 이들은 다른 유닛으로 있어야 한다.

다른 접시들이 한 번에 서빙될 수도 있다.

12. 먹는 사람은 먹는 동안 다른 재료들을 조합해서 맛볼 수 있다.

셰프가 함께 먹어야 할 것과 주어진 서빙에 대한 양을 부과하는 대신 먹는 사람이 이러한 결정을 내린다.

13. 지속 가능성을 고려한 사이즈로 만들어야 한다.

 

사진 출처: instagram.com/brutalisten/

주방 선언서를 지키며 만든 음식들을 보면, 대체적으로 재료의 신선함을 그대로 살린 것을 볼 수 있다. 단순하게 조리된 음식임에도 불구하고 음식을 보며 저절로 군침이 도는 이유는 재료가 가진 기본의 맛을 살렸기 때문이 아닐까? 음식에 첨가된 것은 대체로 물과 소금 밖에 없기 때문에 보다 건강한 맛을 즐길 수 있을 것만 같다. 이렇게 신선하고 간결한 맛을 즐기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다. 이 레스토랑이 화제가 된 이유는 그동안 화려하게 겉만 치장하고 맛에는 신경 쓰지 않았던 음식들-예를 들면 ‘인스타그래머블한’ 음식들-에 질린 사람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진 출처: instagram.com/brutalisten/

나는 여러 가지 재료로 정교하게 조리된 복잡한 요리를 싫어하지 않지만,

지금 모두가 접시에 수 톤의 물건을 쌓아놓고 재료를 레이어링 하는 것만 같다.

우리는 반대 방향으로 간다.

목표는 주어진 재료의 맛을 깊이 파고들어 배경 소음을 없애는 것이다.

카스텐 휠러

사진 출처: fondazioneprada.org

카스텐 휠러가 레스토랑에 도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는 이전에 프라다가 운영하는 문화 재단 폰다지오네 프라다(Fondazione Prada)와 협업으로 레스토랑 겸 나이트 클럽인 ‘더블 클럽(The Double Club)’을 운영한 적이 있었다. 이곳에서는 서양과 아프리카 콩고의 음식, 음악, 가구 등을 녹여낸 각각의 공간이 양립해있었다. 휠러는 더블 클럽과 브루탈리스텐 모두 사회적 실험이며, 두 프로젝트 모두 ‘분열’이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밝혔다. 더블 클럽에서는 서양 문화와 아프리카 문화의 분열을 다뤘다면, 브루탈리스텐에서는 재료 간의 분열을 다루고 있는 것이 다른 점이다.

사진 출처: instagram.com/brutalisten/

작가의 이런 개념을 담은 요리를 선보이기 위해서 전문 셰프가 참여했다. 셰프는 세 가지 버전으로 메뉴를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브루탈리즘의 맛을 서서히 익숙하게 만들려 노력했다. 세미 브루탈리스트 메뉴는 기름이나 다른 양념들을 최소한 사용한 버전이고, 브루탈리스트 메뉴는 선언서 그대로 물과 소금만 사용한 음식들로 구성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정통 브루탈리스트 메뉴에는 추가 양념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순수한 그대로의 재료만을 가지고 만든 음식들이 선보인다. 음료는 홉 없이 곡물 맥아만으로 양조한 브루탈리스트 맥주와 함께 과일, 해조류, 버섯으로 만든 다양한 브루탈리스트 무알코올 음료가 구비되어 있다.

사진 출처: noma.dk

브루탈리스텐을 보면 어딘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이 든다. 바로 ‘미식계의 오스카상’이라 불리는 ‘세계 50대 베스트 레스토랑’에서 4번 이상 1위를 차지한 덴마크 레스토랑 노마(NOMA)와 요리법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천재 셰프 르네 레드제피(Rene Redzepi)가 ‘북유럽의 공간과 시간을 요리에 담는다’라는 콘셉트로 운영하는 이 식당은 제철 재료만을 사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아무도 사용하지 않았던 자연 재료를 찾아내 음식으로 선보인다. 그런 철학 덕분에 언제나 예약이 어려울 만큼 인기가 높은 레스토랑이다.

사진 출처: instagram.com/brutalisten/

노마와 브루스탈리스텐이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인기를 얻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기본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꾸밈없이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리기 위해서는 재료 자체가 좋아야 한다. 화려한 양념과 소스, 레시피가 난무하는 이 때에 맛의 순수함을 지킨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이를 지켰고, 그래서 사람들은 이들이 선보이는 맛에 열광하는 게 아닐까 싶다.

박민정 객원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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