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재는 독일 베를린에서 글꼴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계세요. 베를린에 오시기 전에는 네덜란드 왕립예술대학에서 타입 미디어를 공부하셨다고. 네덜란드가 아닌 독일에서 디자이너로 정착하게 된 배경도 궁금합니다.
네덜란드에서 공부를 마친 뒤에 1년간 직업을 구할 수 있는 ‘잡서칭(job searching) 비자’가 주어지는데요. 처음에는 그걸 활용해 유럽에서 1년 더 생활할 계획이었어요. 그런데 그래픽 디자이너 얀 미덴도르프(Jan Middendorp)의 인턴 제안으로 베를린으로 오게 됐어요. 이후 베를린에서 폰트 기업인 모노타입(Monotype)과 인연이 닿아 프리랜서로 자리 잡을 수 있었어요. 그렇게 지내다 보니까 베를린이 디자이너가 살기 좋은 도시인 것 같아서 정착하게 됐어요.
— 베를린의 어떤 점이 디자이너에게 매력으로 다가오는 걸까요?
디자인, 예술 등 비슷한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전시회, 콘서트, 길거리 행사 등 문화 행사가 많은 것 같아요.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달라지긴 했지만, 생활비도 뉴욕이나 파리 같은 도시보다 저렴한 편이고 젊은 친구들이 많아서 플랫 셰어 문화도 있고요. 다양한 사람들이 조화롭게 섞여서 하는 느낌이에요.
— 유럽에서 프리랜서로 활동하시면서 라틴 문자가 아닌 한글을 다루시는 것도 남다른 선택이라고 생각이 들더라고요. 한글 서체에 매력을 느끼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타입 미디어를 공부하면서 배우고 느낀 것을 한글 디자인에 적용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한글에 더 집중하게 된 것 같아요. 둥켈산스도 비슷한 접근으로 나온 결과물이고요. 한글 폰트들은 볼드도 굵기가 굵지 않고, 제목용 폰트의 종류가 다양하지 않은 게 항상 의문이었거든요.
— 평소 디자인 작업을 위한 영감이나 아이디어는 어디서 캐치하시는 편이세요?
음, 저는 사용자들이 폰트를 사용하는 걸 보면서 영감을 많이 얻어요. 예를 들어, 본문에 사용하는 폰트를 포스터나 제목용으로 사용하는 걸 보면서 ‘쓸만한 제목용 폰트가 별로 없나?’, ‘저기에 저 폰트 대신 어울릴만한 형태가 있을까?’ 등 질문하고 고민하면서 구체적인 방향을 잡는 편이에요.
— 글꼴 디자이너의 하루 일과는 어떻게 흘러가는 지도 궁금합니다.
서체 디자이너의 하루’ 제가 유튜브 비디오로 만들어 볼게요. (웃음) 최근에 ‘타입서클‘이라고 유튜브 채널을 만들었거든요. 앞으로 이 채널에서 글립스 정보와 글자체 디자인 콘텐츠를 공유할 계획입니다.
—제가 말을 하다 보니까 헷갈리는 지점인데요. 서체 디자이너, 글꼴 디자이너, 타이포 디자이너… 꽤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것 같아요. 용어가 혼재되어 있는 느낌이기도 한데. 여러 명칭 사이에 차이점이 있나요?
얼마 전에 노은유 디자이너와 비슷한 이야기를 나눴어요. 저희는 가능하면 ‘글자체 디자이너’로 사용하기로 했어요. 서체 디자이너, 타입 디자이너, 글자체 디자이너 모두 같이 사용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은데, 그래도 이름이 너무 다양하면 혼란스러울 것 같긴 해요.
— 한 번은 넷플릭스 〈Abstrat: The Artt of Design〉 시리즈에서 글자체 디자이너 조나단 회플러(Johnathan Hoefler)의 에피소드를 본 적이 있는데요. 글자체 디자인을 다루는 디자이너의 습관이나 직업병이 있는 것 같더라고요. 예컨대, 길거리 간판을 유심히 보면서 머릿속에서 고쳐보는 식인 거죠. 디자이너님에게도 이런 경험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항상 무의식적으로 관심이 제일 먼저 가는 곳이 글자체인 것 같아요. 서점이나 길거리 간판이나 글자체가 있는 곳에서는 조금 더 머물면서 관찰하게 돼요. 어떤 포스터를 봐도 그걸 만든 그래픽 디자이너를 상상해 보기도 하죠. 왜 이 폰트를 선택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보기도 하고요.
— 작업 이외의 시간은 어떻게 보내세요?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아서 산책을 자주 하려고 노력해요. 저녁에는 요가를 한 시간 다녀오고요. 사실 작업 외에도 할 일이 꽤 많아요. 인터뷰, 원고 의뢰, 각종 회의, 컨설팅 등등.. 정작 작업할 시간이 점점 줄어들어서 걱정이에요.
— 베를린에는 곳곳에 디자인 스튜디오가 자리하잖아요. 글자체 디자이너를 포함해 디자이너들 사이의 교류가 있다면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도 궁금하더라고요.
티포스탐티쉬(Typostammtisch)에 가거나 타입썰스데이(Type Thursday) 같은 행사가 종종 있는데, 여기에 글자체에 관심 있는 디자이너와 예술가들이 많이 모여요. 이 외에도 관심 있는 전시회와 디자이너 토크 행사가 있으면 챙겨 보려고 노력하는데 그런 장소에서 디자이너들과 주로 교류하는 편이에요. 베를린에 퓨터 폰트 타입 디자이너들이 꽤 많이 살고 있는데 이 친구들과 종종 피크닉도 하면서 교류하기도 해요.
— 최근 개발한 서체들도 흥미롭더라고요. 블레이즈페이스, 뉴트로닉, 함렡 모두 개성이 뚜렷하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신선하면서 쓸만한 서체를 만드는 게 제 목표예요. 아마 그래서 개성이 분명하다고 느끼셨을 것 같아요. 가장 최근에 발표한 함렡은 제 파트너인 마크 프륌베르크(Mark Frömberg)와 함께 만들었는데요. 한글을 먼저 그린 뒤에 거기에 어울리는 영문을 그렸어요. 저는 영문이 한글에 잘 어울리고 디자인도 굉장히 멋진데, 실제로 사용하시는 분들은 한글만 사용하시고 영문은 다른 폰트를 사용하시더라고요. 제 생각에는 한국에서 한글 폰트, 영문 폰트 따로 섞어서 사용하는 관습이 있어서 그런 것 같아요. 함렡 뿐만 아니라 뉴트로닉이나 둥켈산스도 그런 경우를 종종 봤어요. 영문도 같이 사용해 보시고 판단하셨으면 좋겠어요.
— 가장 아끼는 서체를 하나 꼽자면요? 물론 아주 어렵겠지만.
예상하셨겠지만 ‘둥켈산스’요. 저의 첫 개인 서체이고, 세상에 제 이름을 알리고 가장 많은 관심을 받은 서체예요. 글자체 디자이너의 보람을 느끼게 해 준 서체이기도 해요. 앞으로 계속 활동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해 줬어요.
— 근미래에 선보일 서체에 대한 힌트를 주자면요?
앞으로도 신선하고, 탄탄한 서체를 많이 그리고 싶어요. 자주 사용되는 종류의 글자체 스타일이더라도 저만의 해석으로 그려내고 싶습니다.
글 이정훈 에디터
취재 협조 및 자료 제공 함민주 글자체 디자이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