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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11

‘우리 동네’를 더 아끼게 만드는 곳, 베스퍼

골목의 밤을 밝히는 모퉁이 그 바
베스퍼(Vesper). 이 칵테일이 처음 등장한 건 1953년, 작가 이언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 시리즈 중 〈카지노 로얄(Casino Royale)〉에서다. 제임스 본드는 평소 마시던 마티니가 아니라 새로운 레시피로 마티니를 주문하고 이 칵테일을 ‘베스퍼’라 부른다. 그가 사랑한 여자, 베스퍼 린드(Vesper Lynd)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베스퍼가 이 잔에 자신의 이름을 붙인 이유를 묻자 본드는 말한다. “한 번 마시면, 이것만 마시게 될 테니까.”
베스퍼 정문. 너무 정석적이지도, 너무 캐주얼하지도 않은 길쭉한 세리프 서체를 사용했다. 분위기는 편안하되 맛과 서비스는 제대로, 라는 지향이 담겼다. ⓒ heyPOP

서울 서래마을 어느 골목, 같은 이름을 붙인 바(bar)가 있다. “지금 당장은 욕심이겠지만 길게 보려고요. 20년, 30년이 지나서 더 성숙한 가게가 된다면, 누군가는 ‘여기 말고 다른 곳은 못 가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잖아요. 그런 바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담아 이름을 지었어요.” 김동선 오너 바텐더·대표가 말했다. 무어든 비뚜름하게 보는 이에겐 객기로 들릴지도 모르는 말,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김동선 바텐더의 목소리는 또렷하고 눈빛엔 흔들림이 없었다. 그 말에서 드러난 기운은 호기와 결기 사이 어딘가에 있다고 해야 더 옳을 것이다.

커다란 창밖으로는 주택이 보인다. ⓒ heyPOP

동네

김동선 바텐더는 일본에 갔다가 경험한 바 문화에서 어떤 울림을 느낀다. 도쿄의 긴자(銀座)처럼 화려하고 번화한 지역은 물론이고, 어느 소도시를 가도 동네마다 크고 작은 바가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바 문화가 생활 깊숙이 침투해 있는 듯했어요. 동네 사람들이 한 잔씩 하고 가는 모습이 참 좋더라고요. 자연스레 ‘동네 바’ 같은 바를 만들겠다고 생각하게 됐죠.” 식료품점이며 동네 의원이 자리 잡고, 하교하는 학생들과 퇴근하는 직장인들이 오가는 거리에 바를 연 건 그래서였다. “여러 분야 전문가들이 완벽하게 기획해 만드는 가게들도 멋지지만, 제 가게는 그저 사랑방 같기를 바랐어요. 트레이닝복 입고 슬리퍼 신고 와도 아무렇지 않은 곳 말이에요.”

바깥과 연결되는 모든 면에 통창이 있다. ⓒ heyPOP
ⓒ heyPOP

안팎으로 열린 바

바, 하면 숨겨진 아지트 같은 공간이 먼저 떠오르기도 한다. 베스퍼는 이러한 이미지와는 완전히 결을 달리한다. 베스퍼의 외벽과 문은 차분하되 무겁지 않은 청록색으로 칠했다. 산뜻한 컬러가 오가는 사람의 시선을 자연스레 모은다. 외부와 맞닿는 벽마다 커다란 창이 뚫려 있다. 비밀스럽다기보다는 안과 밖의 눈길이 마주치는 공간인 셈이다. “골목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이곳이 뭐 하는 곳인지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집 근처잖아요, 베스퍼를 개업하던 4년 전만 해도 동네 주택가에 자리한 바가 드물었어요. 자리 잡은 동네와 친해지는 게 우선이었죠.” 건물 구조상 유일하게 창을 뚫을 수 없는 벽과 나란하게 바 테이블을 놓은 이유도 확실했다. “바 테이블을 이 위치에 설치해야만 바텐더가 모든 창문을 다 바라볼 수 있어요. 창밖으로 익숙한 얼굴이 보이면 눈인사를 건네거나,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손님을 빠르게 인지할 수 있는 배치이기도 하죠.”

백바에 진열된 술 ⓒ heyPOP

통나무

마음이 동하는 언제든 편안히 들를 수 있는 공간이길 바랐기에, 개성 강한 인테리어 요소를 부러 넣지 않았다. 인테리어에 ‘공들이지 않기 위해’ 공을 들인 것. 자꾸만 무언가 더하고 싶은 욕심을 누르며 있어야 하는 것만 제대로 갖추려 했다. 김동선 바텐더는 다만 ‘툭툭 끊기는 느낌이 없는’ 바를 만들기를 원했다. 그러므로 바 테이블과 술을 진열하는 백바(backbar)에 대해서만큼은 확고한 기준을 세웠다.

ⓒ heyPOP

바 테이블로 쓸 만한 ‘통으로 된 나무’를 구하려 인천 제재소 곳곳을 쏘다녔다. 알맞은 통나무 판을 구하기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저희 바 테이블이 5m 정도 되거든요. 2.5m쯤 되는 나무판 두 개를 사서 이어 붙여도 되지만 그게 싫었어요. 이음매나 접합선이 드러나지 않길 바랐습니다.” 발품 팔기를 한참, 결국 꿈에 그리던 나무를 만난다. 마침 모 기업 회장이 그 나무의 제일 중심부를 가져간 뒤 남은 부분이 있었다. 단단하고 결이 아름다운 호두나무였다. 어디에도 톱을 댈 필요가 없을 만큼 자연스럽게 근사했다. “예산의 범위를 한참 넘는 나무였는데, 이걸 본 이후로는 다른 걸 아무리 봐도 눈에 차지가 않았어요. 큰맘을 먹었습니다.”

어렵게 구한 나무로 만든 바 탑. 나뭇결이 그대로 느껴진다. 가운데 부분이 더 둥그렇다. ⓒ heyPOP

이 나무는 드물게도 가지를 뻗는 위쪽이나 뿌리와 가까운 아래쪽보다 가운데, 몸통 부분이 널찍했다. “베스퍼에서는 바 가운데쯤 바텐더가 서서 칵테일을 만들어요. 메이킹에 필요한 공간만큼 그 앞에 앉은 손님 자리가 좁아지는 거죠. 그런데 이 나무는 가운데 부분이 오히려 더 넓으니까, 손님의 공간을 고스란히 남겨드릴 수 있습니다. 귀하지요.”

중간에 기둥 없이 이어지는 백바 ⓒ heyPOP

백바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로 보이는 백바 역시 끊기는 부분 없이 한 줄로 이어진다. 백바는 묵직한 술병을 촘촘히 올려 두는 선반이자 장(欌)이므로 사이사이 기둥을 세워 내구성을 높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베스퍼의 백바엔 기둥이 없다. “바 인테리어에선 백바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바 테이블과 백바는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졌으면 했어요. 백바를 짜는 목수님과 함께 고민했지요. 나무 안에 철근을 넣었으니 무너질 리는 없는데, 운영한 지 4년쯤 되니 지금 보시면 양쪽 끝보다 중간 부분이 살짝 아래로 내려와 있죠? 시간이 더 지나면 보수를 하긴 해야 할 듯합니다.”(웃음)

테이블 좌석 ⓒ heyPOP
얼마 전 마련한 다른 층의 프라이빗 공간. 프라이빗 바(좌), 프라이빗 룸 중 한 곳에 설치된 벽난로(우) ⓒ heyPOP

테이블

베스퍼에는 바 좌석 외에도 크고 작은 테이블 좌석이 있다. ‘동네’라는 입지에서는 좌석 형태를 보다 다양화할 필요가 있었다.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방문하는 이들이 많기 때문. “처음엔 테이블 자리가 있는 바를 꿈꾸진 않았어요. 바에 가면 바 자리에 앉아서 바텐더가 음료 만드는 모습도 보고, 백바를 살펴보면서 위스키를 고르거나 추천을 받는 게 바에서의 재미라고 믿어 왔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이건 오직 바텐더의 시각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좋은 곳을 알고 나면 소중한 사람과 함께 가고 싶어지는 마음도 있잖아요. 기쁜 날 여럿이서 유쾌하게 즐기고 싶을 수도 있고요.” 그 생각이 이어져 테이블을 계획했고, 얼마 전엔 같은 건물에 더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프라이빗 룸을 만들어 운영 중이다.

어둑해지는 골목과 잘 어울리는 조도 ⓒ heyPOP

빛과 음악

밤이 깊으면 바가 선 골목이 고요해진다. 캄캄한 거리에 베스퍼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오도카니 고인다. 베스퍼는 바 중에서는 비교적 밝은 조도를 유지한다. “문밖에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문을 여는 분들이 계세요. 바라는 공간이 처음이라서, 혹은 낯선 가게라 들어오기 머뭇거리는 경우도 있고요. 부담 없이 드나드는 가벼운 공간으로 다가가고 싶어서 조도를 좀 높였습니다. 아무래도 실내가 밝다면 심적 부담이 조금이라도 줄어들지 않을까요?”

 

조명 기구를 굵직하게 써서 실내를 밝히기보다는, 벽의 컬러를 화이트 톤으로 맞춘 후 조명을 벽으로 향하게 해 반사되도록 한다. 그 결과 환하되 은은한 분위기가 완성됐다. 음악 역시 조도를 정하듯 골랐다. 흥겨운 빅밴드 재즈 위주로 튼다. 밝고 열린 공간으로 향하는 걸음을 가뿐하게 만드는 선곡이다.

벽 한 면에 놓인 일본 위스키 병 ⓒ heyPOP

일본

일본에서 접한 바 문화는 김동선 바텐더에게 날카로운 인상으로 남았다. 바 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떠나야 하는지 고민하던 때, 저명한 일본의 바텐더 요시후미 츠보이(Yoshifumi Tsuboi)가 서울 신사동의 바 폴스타(Polestar)의 헤드 바텐더로 영입됐다는 소식을 듣는다. 김동선 바텐더는 그 기회를 꼭 붙들었다. 폴스타에서 일하며 스승에게 재패니즈 바텐딩을 배운 것. “일본의 바 역사는 굉장히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요. 다소 거칠게 요약하자면, 일본식 바텐딩은 유럽이나 미국의 것과 비교했을 때 술을 엄청나게 귀하게 사용하는 편이에요. 한두 방울 차이로 맛이 좋아지고 나빠진다고 생각하죠. 어찌 보면 당연한 일 아닐까요? 바텐딩에 쓰이는 위스키 등의 주류가, 일본 입장에서는 값비싼 수입품이었을 테니까요. 얼마나 귀했겠어요.”

ⓒ heyPOP

김동선 바텐더의 말에 따르면, 자신의 스승은 재패니즈 바텐딩의 정통을 알면서도 다양하게 시도하는 사람이었다. 이를테면 재패니즈 바텐딩, 하면 ‘정성을 충분히 들이는 만큼 속도도 느리다’라는 이미지가 따라오는데, 그의 스승은 그걸 깨고 싶어 했다고. 빨리 제공하는 것 역시 훌륭한 서비스의 요소라는 게 스승의 지론이었다. 정성을 들이되 속도를 높이려면 기본기를 철저하게 쌓아야만 했다. 정교하면서도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줄 알았던 스승의 DNA는 그에게 퍽 짙게 남았다. “스승은 일본인이지만 재패니즈 스타일에만 갇히지 않아요. 다른 스타일을 성실히 살피면서 좋은 게 있으면 충분히 배우고 가져오죠. 저 역시 기본을 탄탄하게 갖춰 놓으면 그 위에 어떤 걸 얹어도 자신만의 스타일로 풀어낼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 heyPOP

일본 브랜드의 잔을 많이 쓰게 된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서구권과 일본은 칵테일의 기본 양도 좀 다르기 때문이란다. 잔이 어디서 생산되었느냐에 따라 같은 하이볼 잔이라도 용량이 다르다는 것. 기무라, 소키치 등을 자주 쓰지만, 일본 브랜드만 사용하는 건 아니다. 바카라, 리델 등 여러 브랜드를 음료에 맞춰 쓴다. “잔은 타협하지 못하겠어요. 진품과 모조품은 눈으로 봐서는 바로 분간하기 어려울지도 몰라요. 그런데 손으로 쥐자마자 완전히 다르다는 게 느껴집니다.”

Ι 각별한 잔

ⓒ heyPOP

1

 

유일하게 깨지지 않은 잔

4년 전 베스퍼를 개업하며 샀던 수많은 잔 중에서 이것 하나만 남았다. 다른 것은 모두 깨졌다. 가게를 준비할 때의 마음과 추억을 떠오르게 하는 잔.

2

 

멕시코 산 빈티지 샷 잔

1980~90년대 사이, 멕시코에서 만들어진 샷 잔이다. 빈티지 시장을 돌다 발견한 것. 멕시코는 데낄라로 유명한 만큼 샷 잔을 탁월하게 만든다. 이 잔을 쥐면 그 무게 중심이나 감촉이 기분 좋게 알맞다고. 칵테일 니콜라시카(Nikolaschka)를 서브할 때 쓴다.

ⓒ heyPOP
ⓒ heyPOP

어떤 맛의 칵테일을 추구하느냐고 묻자 바텐더가 웃었다. “디스틸 대표님 인터뷰를 감명 깊게 읽었어요. 재료를 A, B, C로 표현하셨길래 저도 그걸 빌려오자면, 저는 A, B, C라는 재료로 만들었다는 게 명백히 드러나지 않는 맛을 좋아해요. A, B, C라는 재료를 가지고 새로운 ‘D’를 만들고 싶은 거예요.” 이 얘기를 하면서 그가 덧붙였다. 바텐더는 이미 맛있는 재료를 가져다 ‘굳이’ 섞는 사람이라고. 그냥 먹어도 맛있는 재료를 구태여 섞는다면 그 이상의 새로운 맛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느냐면서. “제 기준에서는 사이드카(Sidecar)를 마셨는데 꼬냑, 꼬앵트로(Cointreau), 레몬만 딱 딱 딱 느껴진다면 싫죠.”

Ι 베스퍼의 칵테일

색감마저 싱그러운 칵테일 ⓒ heyPOP

쉬는 날 Day off

다 같이 쉬는 날 말고, ‘나 혼자’ 쉬는 날 느끼는 기분을 담은 칵테일. 자연스러운 단맛 사이로 위스키가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다. 낮에도 벌컥벌컥 들이켤 수 있을 것처럼 어렵지 않은 맛. 나른하고 여유로운 휴일을 닮은 칵테일이다.

재료 불릿 라이, 소다, 바질, 오렌지, 레몬, 꿀
왼쪽부터 최성원 바텐더, 정윤식 바텐더, 김동선 오너 바텐더, 장영록 바텐더(매니저), 정경종 바텐더, 연준서 바텐더. 촬영 당일 이정석 바텐더와 이도헌 바텐더는 휴무였다. ⓒ heyPOP

바텐더

김동선 바텐더 외에도 베스퍼에는 각기 다른 개성을 품은 직원이 일하고 있다. 매니저로 근무하는 장영록 바텐더. 그는 도쿄 긴자의 저명한 바 ‘텐더’의 바텐더 우에다 카즈오(Uyeda Kazuo)가 세운 기준에 부합했다는 증서를 획득했다. 재패니즈 클래식을 보여주는 바텐더다. 정윤식 바텐더는 그와 또 다른 스타일을 가졌다. 자유롭고 생동감 넘치는 칵테일을 선보이는 이태원의 바 ‘버뮤다’에서 일한 만큼, 모히토 등 트로피컬 칵테일과 유러피언 칵테일에 능란하다. 다채로운 배경과 취향을 지닌 직원이 모여 흥미롭되 단정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메이킹을 준비하는 김동선 오너 바텐더 ⓒ heyPOP

오픈한 지 4년. 30년 넘도록 이어지는 바를 만들고 싶다고 했으니 이제 막 출발선을 떠난 셈이다. 출발선 뒤에 섰을 때와 거침없이 달리기 시작한 때의 마음은 어떻게 다를까. “아무리 준비를 했어도 상상과 현실은 너무 달랐어요. 타협이랄까, 물러선다고 할까,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이 끊임없이 달려들더군요. 지금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일은, 물러설 수 없다고 생각했던 가치들을 잊지 않는 겁니다.”

김유영 기자

사진 김세음 기자

장소
베스퍼
주소
서울 서초구 사평대로22길 17
김유영
에디터. 이야기를 듣고 기사를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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