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07

방송국에는 디자이너가 산다 ②

KBS 프로그램 브랜딩 & 그래픽팀 총괄감독 김지혜
인스타그램의 알고리즘은 무섭다. 어느 날 불현듯 뜬 계정 하나 ‘@zzzzzzz_zi’. 계정 소개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KBS 프로그램 브랜딩 & 그래픽 디렉터 김지혜’ 그리고 ‘KBS 프로그램 브랜딩의 과거와 현재 이야기 기록자’. 방송국에도 으레 디자이너가 있겠거니 생각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들이 방송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제대로 들어본 적은 없었다. 더욱이 오늘날 영상 매체와 플랫폼이 다양해지면서 디자인과 브랜딩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진 상황. 공영방송 KBS가 송출하는 프로그램의 브랜딩과 그래픽을 담당하는 김지혜 총괄감독에게 방송국에서 일하는 디자이너의 업무와 역할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운영하는 프로그램 브랜딩 아카이빙 계정에 대한 궁금증을 물었다.

Interview with 김지혜

KBS 아트비전 디자인부 프로그램 브랜딩 & 그래픽팀 총괄 감독
프로그램의 전체적인 비주얼을 디렉팅하는 김지혜 총괄 감독

방송국에서 업무 일과는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궁금합니다.

업무 프로세스를 간단히 소개해 드리자면 프로그램 구성안이 나오면 프로그램 내용에 대한 설명을 듣게 됩니다. 프로그램의 특징, 중심이 될 만한 이미지들과 컬러에 대한 견해를 조율하죠. 그 내용을 토대로 디자인팀 내부에서 2차 회의를 진행하고, 이후 디자인팀에서 시안이 나오면 내부에서 디자인 수정 및 조율의 과정이 있고요. 이를 반영한 시안을 가지고 제작진과 3차 디자인 회의를 가집니다. 제작진과는 몇 차례 협의를 거쳐 보다 디테일하게 수정과 보완 작업을 진행합니다.

프로그램 디자인 디렉팅 과정

확정된 타이틀 디자인은 웹 제작, 자막 CG, 홍보팀에게 전달되고, 포스터 제작과 오프닝 CG 제작에 들어가게 됩니다. 방송마다 스케줄과 인원 배치가 다르지만 대게 한 프로그램 당 브랜딩 팀(타이틀 디자인, 포스터 디자인, 키 비주얼 등) 5명과 CG 제작(오프닝, 엔딩, 범퍼, LED) 팀 2명이 진행합니다. 기간은 난이도에 따라 다르지만 타이틀 디자인 1~2주, 포스터 디자인 1주, CG 제작 2~3주 정도의 일정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단면적으로 타이틀 글자 수가 몇 자 되지는 않지만, 여러 사람들이 함께 고민하고 노력을 기울여 만들고 있습니다.

프로그램 곳곳에서 활용되는 디자인과 브랜딩 작업들

방송이라는 특성 때문인지 디자인 작업의 호흡이 빠른 것처럼 느껴지네요.

다른 분야의 디자이너와 방송 디자이너의 차이점이라면 시간 여유가 없다는 점입니다. 보통 디자인 작업은 몇 개월 혹은 몇 년에 걸쳐 데이터를 수집하고, 계획하고, 회의하는 단계가 있는데 저희 팀에서는 이러한 과정을 빠르면 3일 아니면 일주일 안에 처리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요. 여유가 있다면 한 달 정도의 시간을 두고서 제작하지만 프로그램 수에 비해 디자이너 인원이 적은 편이에요. 매달 디자이너 한 명이 3개 이상의 프로그램의 디자인 작업을 동시에 진행하기에 고도의 집중력과 순발력이 필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업무 외적으로는 어떻게 시간을 보내시는지도 궁금합니다.

기본적으로는 매일을 디자인 업무, 회의, 통화의 반복 속에서 살고 있어요. 업무가 바빠도 건강은 챙겨야 하니 점심시간이나 퇴근 후에 운동을 하고 있고, 트렌드와 자기 개발을 위해서 독서와 문화생활도 챙기는 편입니다. 방송국에서는 디자인팀 총괄 감독이지만 집에서는 8살 아이를 둔 엄마라서 엄마로서의 역할도 해야 하죠.(웃음)

평소 무엇으로부터 디자인 작업의 영감을 얻으시는지도 궁금합니다.

책, 음악, 전시, 영화, 광고, 패션 등 제 주변의 모든 것에서 느끼고 배움을 얻습니다. 현시대에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고 좋아하는 것을 유심히 지켜보기도 하고요. 또, 소소한 것에서 특별함을 발견하는 공식을 읽어 내는 것에 대해서도 늘 고민하는 편인데요. 평소 가득 담아둔 것을 지우고 비워내는 과정을 통해서 남겨진 것들에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KBS 프로그램 타이틀 디자인 아카이빙

최근 인스타그램을 통해서 흥미로운 활동도 하고 계시더라고요. KBS 프로그램의 과거 타이틀 디자인부터 최신 프로그램 디자인까지 아카이빙을 하고 계시던데. 피드를 보면서 이 많은 과거 자료는 어디서 발견하는지도 궁금하더라고요.

선배님들의 손 때 묻은 작업물이에요. 주로 선배님들의 책꽂이에서, 그리고 먼지 쌓인 서류 창고에서 찾아내고 있습니다. 80년대는 컴퓨터가 상용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디자이너가 직접 모눈종이에 손으로 디자인을 했어요. 컴퓨터 작업의 정교함에 따라갈 수 없지만, 자간의 간격이나 기울기가 어색해서 오히려 더 정감 가는 형태에요. 인간미가 있어요.

KBS 프로그램 타이틀 디자인 아카이빙

방송 타이틀 디자인은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에 안정적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고 보는데요. 이 시점부터 차츰 방송 타이틀 디자인의 형식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이후에는 트렌드에 맞게 캐릭터나 프로그램을 대표하는 아이콘을 곁들이기도 하고, 평면적이고 단순한 스타일과 캘리그래피 등 프로그램 특성에 맞춰서 가독성은 유지하면서 개성이 묻어나는 형태의 디자인을 볼 수 있어요.

과거부터 오늘날까지의 KBS 디자인을 아카이빙하는 김지혜 감독의 인스타그램 계정 @zzzzzzz_zi

한편 공영 방송과 대중 매체라는 점을 생각하면 대중적인 취향을 맞춰야 하는 부분에서 디자이너로서 고민이 깊을 것 같거든요. 익숙함을 벗어나 새로운 디자인을 선보일 때 어려운 점은 없는지도 궁금합니다.

KBS에는 장수 프로그램이 많습니다. <누가누가 잘 하나>(1964), <가요무대>(1985), <6시 내 고향>(1991), <아침마당>(1991), <연예가중계>(1984) 등 역사가 깊은 프로그램부터 새로운 시도를 하는 프로그램도 계속 만들어가는 중이에요. KBS는 전통성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현대성을 함께 풀어가는 것이 특징인데요. 인스타그램에 아카이빙을 하기 시작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아요. 온고지신(溫故知新). ‘옛 것을 익히면 앞으로의 것을 알 수 있다’라는 뜻의 사자성어처럼 선배님들의 디자인을 되짚어 보며 다시 공부하자는 마음으로 아카이빙을 시작했어요. 옛 선배님들을 따라 제가 KBS 디자인을 이어가고 있다는 기록물을 남기는 것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고요. 인스타그램을 통해서 프로그램 디자인에 대해 이야기하며 KBS 디자인을 알리는 역할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간 많은 프로그램의 디자인을 디렉팅 해 오셨는데요.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 프로그램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1984)입니다. 프로그램에 대한 어린 시절의 향수와 빈티지한 디자인에 타이포와 동물 그림이 함께 있는 것이 너무 좋더라고요!(웃음)

방송국에는 디자이너가 산다 ①

이정훈 기자

취재 협조 및 자료 제공 김지혜 KBS 프로그램 브랜딩 & 그래픽팀 총괄감독

이정훈
독일 베를린에서 20대를 보냈다. 낯선 것에 강한 호기심을 느끼며 쉽게 감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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