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6-09

아니카 이의 한국 첫 개인전〈Begin Where You Are〉

자연과 인공의 경계를 허무는 아니카 이의 작품세계
세상에는 우리의 눈에 포착되지 않는 무수한 현상이 있다. 현상은 우리의 눈에 직관적으로 포착되지는 않지만 엄연히 존재하고 있으며, 현상의 이면에 활발한 운동을 하고 있는 무수한 존재들을 증명한다. 여기서 무수한 존재들이란, 아주 작은 존재인 박테리아, 곰팡이, 세균 등 미생물부터 지구 어딘가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다양한 동식물들 그리고 인간까지 모두 포함한다.
Anicka Yi,〈Begin Where You Are〉전시 전경 ©Gladstone Gallery Seoul

우리는 늘 더불어 살아가지만, 다양한 존재는 우리의 눈에 띄지 않기에 쉽게 잊힌다. 그렇게 우리가 망각했을 때, 문제는 발생한다. 대표적인 문제 중 하나가 기후 위기이다. 지구상에 생존해 있는 수많은 존재들을 망각한 채 인류가 저질러 놓은 일들이 기후 위기를 이끌었다. 존재를 파괴하고, 그 존재들이 행하는 운동을 저지한 결과이다. 따라서 이 세상에 살아가는 우리는 보이지 않는 이면일지라도 그것을 들여다보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무수한 현상이 우리의 삶과도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예술은 우리에게 다양한 ‘시선’을 제공한다.

기후 위기 시대, 예술은 어떤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Anicka Yi,〈Begin Where You Are〉전시 전경 ©Gladstone Gallery Seoul

아니카 이(Anicka Yi)는 예술 상상력과 과학적 연구를 접목해 이 시대의 다양한 문제들을 드러내 왔다. 한국에서 출생했으나 두 살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간 그는 브라질의 아마존 밀림과 광대한 해조류들이 포진해 있는 캘리포니아의 해안선 등을 여행했다. 이질적인 문화를 공유한 뒤 일상에 복귀한 작가는 기계와 화면으로 매개된 오늘날의 우리 존재에 대해 사유했다.

©heyPOP

작가의 첫 작업은 냄새였다. 아니카 이 작업에서 냄새는 여전히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시각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작품이 설치된 현장에 방문해야만 그 작품을 온전히 헤아릴 수 있다. 글래드스톤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작가의 개인전에서 역시 ‘냄새’가 강조된다. 전시장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매캐하면서도 강력한 냄새가 관람자를 먼저 맞이한다.

공간을 가득 채운 냄새는 앞으로 펼쳐질 전시에 또 다른 틀이 된다. 3D 프린터로 구현한 버섯 형태의 향수가 관람자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역사적으로 잊혔거나, 역사 속에서 인정받지 못했던 여성 인물이 주제가 됐다. 작품 감상의 또 다른 틀은 녹색 카펫을 통해 더 좁혀진다. 작가는 일종의 이끼를 연상하도록 바닥을 연출했다고 말한다. 냄새와 카펫의 감촉 모두 관람자의 감각을 자극하며 관람 행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Anicka Yi, Ice Water In The Vein, 2022 ©heyPOP

입구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실험실에서 사용하는 비커들이다. 비커 안에는 살아있는 해조류가 들어있다. 해조류는 사실 우리에게 있어 매우 귀중한 존재다. 이들은 지구 생명체 중에서 가장 큰 질량을 차지하고 있기도 하지만 플라스틱 등의 물질을 대체할 수 있는 대안으로 제시된다. 작가는 해조류와 곰팡이, 박테리아 등을 작업에 직접 활용했다. 그는 과학자들과 협업하며, 이 작품을 실험실에서 제작했다. 살아있는 해조류들은 전시장이라는 인위적인 공간 안에서 생명력을 유지한다. 전시의 전반부부터 자연과 인공의 경계의 넘나듦이 시작된다.

Anicka Yi, Soft Power Narcissist, 2022 ©heyPOP

전시장 가장 중앙에 배치된 작품, 〈Soft Power Narcissist〉는 작가가 캘리포니아 곶에서 지내면서 관찰한 대상들을 구현한 작품이다. 나사NASA에서 개발한 자성을 지닌 페로 플루이드를 재료로 사용했다. 페로 플루이드는 구조에 있어 말미잘, 꽃과 유사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작가는 생명체과 비생명체의 구조가 유사하다는 점에 착안해 페로 플루이드로 말미잘, 산호, 아메바 등의 형태를 만들었다.

Anicka Yi, (좌) Two Nervous Systems In A Room, (우) Self Reliance vs Loneliness, 2022 ©Gladstone Gallery Seoul
Anicka Yi, Self Reliance vs Loneliness, 2022 ©heyPOP

동물의 닭살과 털을 표현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꽃의 수술을 형상화한 것 같기도 한 작품도 있다. 아니카 이의 치킨 스킨(Chicken Skin) 시리즈는 그가 브라질 아마존에서 여행했던 경험과 동시에 인류학자인 에두아르도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Eduardo Viveiros de Castro)의 글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했다. 자세히 봤을 때 피부의 모공과 같은 형상이 보인다. 그 자리에 솟아나 있는 수많은 털들은 관람자의 촉각 정서를 자극한다. 하지만 고개를 살짝 돌려 작품의 중앙부에 위치한 꽃에 시선을 뒀을 때 관람자는 당황스러움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은 서양 난의 조화, 즉 가짜 꽃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 역시 경계에 있다. 작품은 동식물 간의 경계, 인공과 자연의 경계부에 있으며 관람자 인식과 감각의 넘나듦을 유도한다.

Anicka Yi, Late Classical, 2022 ©Gladstone Gallery Seoul
Anicka Yi, Late Classical, 2022 ©heyPOP

〈Late Classical〉은 아니카 이의 초기 시리즈에 해당한다. 우아함과 아름다움의 전형 중 하나인 만개한 꽃은 작가의 손을 거치며 바싹하게 튀겨진다. 이후 특유의 밝은 색감이었던 꽃은 튀김 옷을 입은 채 바래고 흐려진다. 그렇게 꽃의 형태는 영구히 고정된 채, 자연물에서 이내 인공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작가는 초기 작업 과정보다 정교히 제작하기 위해 레진을 활용했다. 그는 자연물을 튀기는 행위를 통해 관람자의 미각과 후각을 자극하고자 했으며, 튀기는 과정 속에서 폭력과 불손함을 암시하고자 했다. 아니카 이는 이를 위해 뉴욕에 있는 예술품 보존가와 협업까지 했다.

Anicka Yi,〈Begin Where You Are〉전시 전경 ©Gladstone Gallery Seoul

내부에서 불을 밝히고 있는 작업 네스트(Nest)는 곤충의 집을 연상시킨다. 촘촘한 구멍들 속에는 유충이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작품의 하단에는 디지털시계가 부착돼 있다. 곤충들의 집단지성과 규칙으로 꽉 차 있는 것 같은 형태, 그리고 인류를 통합하는 시간과 디지털이라는 매개체. 이 집합체가 암시하는 것은 무엇일까? 작품을 지탱하고 있는 스틸 소재의 다리는 작품을 매우 불안정하게 지탱하고 있다. 마치 불안한 일이 펼쳐질 것만 같은 형태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다.

글래드스톤 서울 기자 간담회에 참석한 아니카 이 ©heyPOP

아니카 이는 자신의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맥락’과 ‘과정’이라고 말한다. 결과물에 해당하는 작품만큼 작품들 사이의 맥락과 과정도 중요하다. 관람자들은 눈으로 보고, 냄새를 맡고, 몸으로 체감해 보며 미시 생물들의 삶과 인공의 구현 과정 모두를 한꺼번에 떠올려볼 수 있다. 나아가 양립할 수 없는, 다른 대상이라고 여겨졌던 존재들이 사실은 이 세상에 더불어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할 수 있다. 경계들을 허물면서 작가의 언어가 무엇인지 함께 상상해 보기를 권한다. 전시는 오는 7월 8일까지.

하도경 기자

자료 제공 글래드스톤 서울

프로젝트
〈Begin Where You Are〉
장소
글래드스톤 서울
주소
서울 강남구 삼성로 760
일자
2022.05.31 - 2022.07.08
하도경
수집가이자 산책자. “감각만이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현실”이라는 페소아의 문장을 좋아하며, 눈에 들어온 빛나는 것들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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