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봤던 세계지도는 1569년에 항해용으로 제작된 것으로, 각 대륙의 크기가 실제와 다르다. 심지어 지도가 만들어진 16세기의 세계관이 담겨있어 유럽은 실제보다 크게, 식민지국들은 실제보다 작게 그려졌다. 그래서 현재까지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고 있어도 틀렸다는 딱지가 붙어 다닌다.
이렇게 축소되고 변형된 지도에는 다 담지 못할 정도로 우리 사회는 다양한 문화로 이뤄져 있다. 그리고 21세기 현재,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소수 문화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어디 그뿐일까, 개인들도 각자의 개성을 마음껏 표현하고 있다. 다양하지만 복잡해진 세상에서 모두가 수용할 수 있는 디자인을 만들기란 결코 쉽지 않다. 책 <디자인 정치학>에서 그랬듯이 이제 디자이너는 모든 독자가 동일한 시각언어와 가치관을 공유할 거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세계가 긴밀히 연결되고 국경이라는 보이지 않는 벽이 허물어지면서 디자이너의 활동 범위도 전 세계로 넓어졌다. 이제 아시아 디자이너가 유럽 혹은 미국의 브랜드를 디자인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디자이너가 다른 나라 혹은 문화권에 적용되는 디자인을 작업할 때는 그 지역의 문화를 이해하는 건 필수다. 똑같은 심볼이나 색이 문화권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고, 외부에서 온 디자이너가 그 지역의 정서와 가치관을 정확하게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디자인 정치학>은 여러 사례를 통해 문화적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 디자이너들의 실수를 보여준다. 그리고 공감대가 형성되는 디자인을 위해서 현지 디자이너와의 협업은 물론 현지인에게 반복적인 검증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문화 불이해로 인해서 벌어진 사태 중 대표적인 것이 문화적 요소를 허락 없이 사용하는 ‘문화 도용’이다. 주로 주류 문화가 변방 문화의 일부를 도용함으로써 생기는 문제다. 소수 민족의 전통 패턴을 그 민족과 어떠한 상의도 없이, 의미도 모른 채 패션이나 제품에 적용하여 상업화하는 행위를 예로 들 수 있다.
<디자인 정치학>은 우리가 간과했던 디자인 속 과오들을 다양한 예시를 들어 설명한다. 그 예 중에서는 서구중심주의 사상으로 인해 벌어진 잘못이 많다. 저자 뤼번 파터르는 지금까지 우리가 보편적이고 정상이라고 생각했던 기준들은 무의식적으로 습득한 결과이며, 그는 주로 서구 백인 남성이자 비장애인의 시각에서 바라본 것이라고 지적한다. 디자인을 이루는 여러 요소들 – 서체, 아이콘, 사진 심지어 색까지. 이 모든 것에는 차별, 희화화, 고정관념이 숨어있다.
어떤 장르보다 보편적이고 평등하다고 여겨진 디자인에 이런 모순들이 숨어 있는 이유는 디자이너가 ‘00답다’고 느끼는 인상이 디자인에 반영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로 아프리카 원주민의 사진을 들 수 있다. 우리가 흔히 보는 아프리카 원주민의 사진은 화려한 패턴이 그려진 전통의상을 입고 아프리카 초원에서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을 담고 있다. 아프리카 원주민을 대표하는 이 이미지들은 교육용 책부터 신문과 방송 같은 매체, 이미지 공유 사이트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서구의 시선으로 바라본 아프리카의 모습으로서, 서구 문화가 원하는 ‘아프리카 원주민다운 순간’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이미지들은 원주민의 실제 삶을 담아내지 못한다. 디자이너와 아티스트의 결과물은 때때로 문화적 특징을 반영하지 못하고, 심지어 왜곡하는 결과까지 초래한다.
책 <디자인 정치학>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디자인은 정치적이며, 그 이유는 디자이너가 이 사회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디자이너의 작업물에는 그가 성장하면서 습득한 사회·문화적 가치관이 반영된다. 그리고 디자인이란 동료 디자이너 혹은 클라이언트와의 협업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들의 시각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디자이너는 더 넓은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이제까지 당연하게 생각해왔던 것들을 의심하고 재확인하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디자인 정치학>의 한국어판을 출간한 출판사 고트GOAT는 ‘시각 커뮤니케이션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한 사람으로서 무궁무진한 시각 자료를 읽고 이해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싶어서’ 이 책을 출간했다고 밝혔다. 이미지의 힘이 점점 강해지는 시대에서 <디자인 정치학>은 시각 요소로 정보와 메시지를 전달하는 디자이너와 아티스트가 한 번쯤은 읽어봐야 할 책이다. 책이 던지는 질문들, 당연하게 여겼던 것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의문들은 자아 반성은 물론 창조 활동에도 영감을 줄 것이다.
글 허영은 기자
자료 제공 GOA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