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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04

시간과 함께 겹겹이 쌓인 기록들

윤현상재〈Narrative on Medium〉展
시간은 이따금 사소한 것을 예술로 만든다. 당시엔 별 뜻 없이 휘갈겨 썼던 10년 전의 일기장, 까마득한 어린 시절 마루에 앉아 벼루 위에 갈던 먹, 상자에 차곡차곡 모아 온 납작한 편지, 습작에 가까운 러프한 스케치들… 일상의 사소한 조각들이 기록이라는 나룻배를 타고 세월의 강을 건너와 고유한 물결을 남긴다. 누군가는 나룻배를 손으로 그리고, 어떤 이는 나무를 깎아 만들고, 또 다른 이는 종이로 접어 만든다. 그리고 무엇을, 왜 기록하고 싶은지 숙고하는 마음을 담아 시간의 강물에 띄워 보낸다. 언젠가 이 사소한 기록들이 예술로서 돌아와, 마음에 잔잔한 감동의 물결을 일으킬 것을 소중히 바라면서.
Narrative on Medium 4층 전시 전경

 

윤현상재의 54번째 전시, 〈Narrative on Medium〉은 시간 위에 묵묵히 남긴 ‘기록’을 조명한다. 작가들이 각기 다른 매체 위에 ‘기록’이라는 행위로서 그려내고, 쌓아내고, 접어내고, 발라낸 연마의 흔적들이 고요한 공간 위에 소복이 쌓였다. 관찰자는 작품 속에 깃든 ‘시간’을 오롯이 상상하며, 완성물 이면에 있는 작가의 부단한 밤낮과 내면을 고스란히 마주하게 된다. 그 은밀한 세계로 이끄는 입구인 4층 전시 공간으로 먼저 안내한다.

 

강동주 작가는 종이라는 공간 위에 변화하고 사라지기 쉬운 환경의 시간을 연필로 복원한다.

 

온통 흑백으로 빼곡히 그려진 패턴들은 강동주 작가의 연필 드로잉 작업이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처럼 보이는 벽면에 걸린 10점은 빗물에 젖은 종이가 마른 뒤 운 질감을 묘사한 작업이다. 비가 오고 그친 뒤까지의 시간이 종이라는 공간 위에 복원되며 남긴 흔적을, 빛과 어둠에 상응하는 흑백 선들로 재현했다.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바닥에 깔린 작업들은 모두 종이를 땅에 얹고 압을 가한 후 새겨진 질감을 떠내어 연필로 그려냈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사라지는 풍경들이 마치 타일을 연상시키는 듯한 고유한 패턴들로 남았다.

 

이혜림 작가는 한지를 켜켜이 쌓아 붙여 시간이라는 비가시적 개념을 기둥으로 형상화 했다.

 

이혜림 작가의 ‘Sequence’ 시리즈는 ‘눈으로 볼 수 없는 시간에 만약 형태가 있다면?’이라는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멀리서 볼 땐 두툼한 질감을 가진 기둥처럼 보이는 이 작품은 가까이서 보면 빈틈없이 차곡차곡 쌓인 수 개의 종이가 엮어진 집합체이다. 작가가 직접 제작한 한지 조각들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며 쌓여 천장에 매달려 있다. 견고하게 쌓인 시간들이 종이라는 물성을 빌려 구체적인 형태로 드러나며 춤추듯 움직이는 유연한 흐름을 만들어 낸다.

 

크리스 로 작가는 종이를 비롯한 다양한 재료에 실크스크린을 실험하며 ‘새로움’과 ‘처음’을 이야기한다.

 

크리스 (Chris Ro) 작가의 작업은 바닥과 벽면이 온통 흑백으로 칠해진 하나의 방 같은 공간과, 형형색색의 거대한 그래픽 포스터가 전시된 지류함 구역으로 나뉜다. 크리스 로 작가는 이민자로서의 경험에서 촉발된 ‘새로움’과 ‘처음’이라는 개념에 주목해, 실크스크린 방식으로 다양한 화면과 재료를 실험해 오고 있다. 벽면부터 각양각색의 종이, 폴리카보네이트에까지 펼쳐진 그의 대담한 손길이 이민자이자 아티스트로서의 그를 증명하는 기록 그 자체다. 어린 시절 직접 남긴 일기를 일련의 시리즈로 전시한 작품은 타이포로 정제되어 쓰인 글과 거침없는 그래픽 화면으로 재구성되어, 과거의 기록을 또 한 번 새로운 맥락으로 마주 보게 한다.

 

조소희 작가는 매일 1,2장의 편지를 쓰는 작업을 15년간 해왔으며,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마치 누군가의 적막한 작업실을 연상시키는 공간에 영문을 알 수 없는 반투명한 편지들과 타자기, 실타래와 의자 등이 놓여 있다. 이 공간에서의 주인공은 단연 편지들, 그 위에 적힌 촘촘한 활자들과 반듯이 접어낸 마음이다. 조소희 작가의 <편지_인생작업>은 2007년부터 지금까지 15년간 이어져 온 작업으로, 매일 1,2장의 편지를 꾸준히 써 온 인고의 결과물 혹은 과정물을 보여 준다. 2019년 말에 무려 10,000장에 다다른 이 방대한 편지들은 어느 임계점에 다다르면 익명의 사람들에게 랜덤으로 발송될 예정이다. 왼쪽 선반에 켜켜이 쌓인 편지 중 유독 눈에 띄는 노란색 편지는 세월호 사건이 발생했던 시기에 쓰였다. 또한 편지와 더불어 작가가 매일 3cm씩 짜 온 형광 컬러의 직물은 편지 위의 활자가 그려낸 패턴과도 닮아 있다. 오른쪽 구석의 검은 연기 같은 형상은 작가가 파리 유학 시 살던 집의 라디에이터에 그을린 벽면을 재현한 작품이다. 이외에도 휴지 위에 쓴 글 등 다양한 형태의 흥미로운 기록들이 구석구석 숨어 있다.

 

건축적인 그리드가 두드러지는 책가도 위에 여러 작가, 브랜드의 작업이 어우러져 있다.

 

전시실 끝에 장엄하게 자리 잡은 책가도는 6명(팀)의 창작자와 브랜드가 손잡고 탄생시킨 작업이다. 책가도와 탁자는 최경덕 작가의 작품으로, 오침안정법이라는 책 제본 방식에서 드러나는 선과 그리드를 차용해 건축적인 레이어가 돋보이는 가구를 만들어 냈다. 책가도 곳곳에는 박경윤 작가가 시간의 무늬를 하나하나 새긴 목재 기물들이 놓여 중후한 멋을 자아내고, 기대훈 작가의 도자 화분에 연출된 분재는 야생초목을 다루는 가드닝 스튜디오 사사막의 작업으로, 분재의 선과 면이 책가도의 그리드 위를 자유롭게 흐르며 조화를 이룬다.

 

능화지를 사용해 제작한 포갑과 기록을 위한 노트가 탁자 위에 전시되어 있다.

 

책가도 뒤의 푸른 벽면은 국가무형문화재 배첩장인 강성찬 선생님과 이은희 제자의 도배로 완성되었다. 이번 배첩에 사용된 ‘능화지’는 밀랍을 바른 한지에 문양이 새겨진 나무판을 얹고 돌로 문질러 나온 문양을 새긴 종이로, 경복궁 향원정 내부에도 도배되어 있을 정도로 왕실에서 즐겨 사용했다. 탁자 위에 능화지로 만든 현대적인 포갑과 노트도 함께 전시되어 있다.

*배첩: 서화의 뒷면에 종이나 비단을 덧붙여 두루마리, 병풍, 책 등 다양한 형태로 꾸미는 전통 처리 기법

 

지난달 오대산 월정사로 출가하여 한 달간 묵언 수련을 한 유태근 작가는 그때의 경험을 공간에 표현했다.

 

흑백으로 먹칠되어 압도적인 에너지를 풍기는 이 공간은 먹으로 칠한 방이라는 의미에서 ‘먹방’이라고도 불린다. 유태근 도예가는 산수화와 탑, 반야심경이 그려져 있던 벽면을 투박하고도 기운 넘치는 먹칠로 덮은 라이브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거대한 달 항아리가 그려진 바닥 위에는 그가 한지 위에 꾸준히 써 온 일기가 펼쳐져 있으며 이 기록은 무려 90권에 달할 정도로 방대한 양을 자랑한다.

 

전시장에 놓인 한상묵 장인이 만든 2000개의 송연먹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노동의 집약이다.

 

오른쪽에 차곡차곡 쌓여 있는 검은 것의 정체는 다름 아닌 ‘먹’이다. 한상묵 장인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전통 먹을 만드는 먹 장인이다. ‘송연먹’은 이름 그대로 소나무를 태워 연기에서 얻은 재에 아교를 섞어 만드는 전통 먹으로, 잡히지 않는 무형의 연기에서 단단한 먹을 만들어 내는 이 과정은 그야말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노동이다. 밀도 높은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송연먹은 소나무의 짙은 향을 고스란히 품게 되며, 그 빛깔은 해 뜨기 직전의 푸른빛이 감도는 까만 밤하늘을 연상시킨다.

 

Narrative on Medium 3층 전시 전경
시각 예술을 다루는 출판사 닻프레스가 출간한 다양한 작가의 기록들

 

이어 3층에는 기록의 도구들에 집중한 다양한 창작자와 브랜드들의 기록들을 만날 수 있다. 테이블과 벽면 위에 가지런히 전시된 일련의 기록들은 닻프레스의 출간물이다. 사진과 디자인을 중심으로 시각 예술을 선보이는 출판사로, 이번 전시에서는 ‘자연’을 담은 기록들을 전시했다.

 

3층에는 다양한 창작자의 기록의 도구들과 이야기가 담긴 소장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외에도 IT 업계에서 일하는 테크 마케터이자 2,500여 개의 연필을 수집해 온 함은혜 작가의 기록에 함께해 온 100개의 연필, 이예지 작가의 함, 트롤스페이퍼의 노트들, 이승희 마케터의 기록자로서의 시간들을 엿볼 수 있는 영감노트를 비롯한 여러 작가의 다양한 기록을 한꺼번에 감상할 수 있다. 기록이 새겨질 ‘바탕’을 만들고, 기록을 써 내려 갈 ‘집기’를 만들고, 기록이 이어져 온 ‘과정’을 보여주는 등 기록을 둘러싼 창작자들의 다각적인 시도가 한데 어우러져 독특한 내러티브를 만들고 있다. 이들의 작업은 관찰자에게 ‘무엇을 기록하고 싶은지’, ‘무엇으로 기록하고 싶은지’, ‘왜 기록하는지’와 같이 기록에 대한 사적인 질문을 촉발시키며 자신만의 기록을 시작하게끔 이끈다.

 

 

사소한 기록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는 것은 그저 시간의 흐름이 아니다. 그 흐름에 제 속도로 꾸준히 발맞춰 온 우리 각자의 반복적인 노력과 매일의 습관이다. ‘나’를 찾아가는 기록의 여정은 이 순간에도 차곡차곡, 사각사각 새겨지며 또 한 겹의 시간을 건너가고 있다.

 

소원 기자

자료 출처 Space B-E Gallery

프로젝트
〈Narrative on Medium〉
장소
Space B-E 갤러리
주소
서울시 강남구 학동로26길 14
일자
2022.04.06 - 2022.06.01
크리에이터
강동주, 강성찬, 김대성, 김연임, 기대훈, 크리스 로, 박경윤, 유태근, 신영희, 이승희, 이예지, 이은희, 이혜림, 조소희, 최경덕, 한상묵, 함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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