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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22

2022년 어느 봄, 운경고택 걷기

나의 아름다운 21세기, <최정화: 당신은 나의 집> 전시
소설을 읽다가 봄밤, 연애라는 단어가 떠올랐는데 표지를 다시 보니 제목이 ‘춘야’, 봄밤이었다. 연애 상대는 운경고택이다. 한옥 구석구석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고, 수십 년간 어느 곳에서 묵혀 있던 이야기가 홀연히 실체를 드러내고 뚜벅뚜벅 다가오는 느낌이다. 운경고택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최정화: 당신은 나의 집>을 소개한다.

이색 포인트 3

최정화,
최정화,

 

인왕산 자락에 둥지를 튼 운경고택은 300여 평 남짓한 땅에 연못과 안채, 사랑채와 대문채가 아늑하게 자리를 잡은 모습이다. 400년 역사를 가진 한옥이지만 이곳의 존재를 모르는 이들도 많다. 12대 국회의장을 지낸 운경 이재형(1914~1992) 선생이 1953년에 매입해 작고할 때까지 이곳에 살았다. 고인의 유지에 따라 후손들은 비영리 공익 재단을 설립하고, 운경고택을 활용한 다양한 문화ᐧ예술 프로그램과 공익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운경고택의 문을 활짝 열고 대중에게 공개한 것은 2019년부터다. 그 해에 장응복, 하지훈 디자이너와 함께 한 전시 <차경(借景), 운경고택을 즐기다>를 시작으로 2021년에는 플로리스트 무구와 <운경미감(雲耕美感) 2021, 꽃, 집>전을 진행했다. 그리고 2022년 봄. 작가 최정화와 함께 우리 모두의 ‘집’에 대한 사유를 펼치는 전시를 선보인다. 올해는 운경 이재형 30주기이자, 최정화 작가가 활동 30주년을 맞는 해다. 전시 오픈 일에 만난 최정화는 “30년 작업을 돌아볼 수 있었던 기회로, 어쩌면 미니 회고전 격의 전시”라 말했다.

 

최정화,
최정화,
최정화,

 

알록달록 플라스틱 바구니나 폐현수막, 비닐, 철사, 전구 등을 거대하게 뻥튀기하여 일찍이 ‘아줌마’의 위대함을 설파해온 최정화의 작품은 파리 퐁피두센터나 모리미술관 같은 세계 유수 미술관, 유럽의 대성당과 동네 갤러리를 장식해왔다. 그의 작품이 정갈한 한옥에 들어간다면 어떤 느낌일까. 그의 까다로운 감식안으로 수집된, 그러니까 희귀하면서도 세상에서 가장 흔하디흔한 물건들이 한옥 사랑방과 마당, 뒤뜰까지 ‘점령’한 형국인데 그 모습이 생경하면서도 절묘하다. 어디서 많이 본듯한 익숙함, 한옥 그 자리에 원래 있었던 풍경이라는 생각도 든다.

저의 작업에 무언가 미학적인 것이 나타난다면, 그것은 ‘질문하게 하는 아름다움’일 거라 생각합니다. “아름다움이란 과연 무엇일까?” 이러한 아름다움은 아카데믹한 교육을 통해 보여주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는 미술관 대신 재래시장으로 나갔습니다. 그곳에는 다이내믹하고 밝은 에너지가 있었고, 저는 그것을 건강한 아름다움이라 느꼈습니다. 부엌에서 쓰게 될 온갖 그릇들, 플라스틱 소쿠리, 알록달록한 색, 삐까번쩍한 빛, 자유롭지만 구조적인 공간. 그 전위적 아름다움은 차오르는 아름다움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시장에 있는 것들로 높게 탑을 쌓았습니다. (중략) 

_ 야메 프로젝트를 대표해 최정화가 쓴 글의 일부 (도록 p123 중에서)

 

최정화,

 

전시에 맞추어 출간된 <춘야(春夜)>는 최정화 작가의 작품을 모티프로 쓰인 소설이다. 최정화 작가와 소설가 최영으로 구성된 ‘야메 프로젝트’팀이 메타픽션 형식으로 쓴 <춘야>는 새로운 형식의 도록이자 소설로, 미술과 문학을 결합한 신선한 시도다. 소설에는 ‘복지오’라는 한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1983년생 돼지띠이며, 모 대학 경제학과 교수인데 그가 어느 봄밤 운경고택을 찾은 후에 겪은 경이로운 이야기가 한옥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 글은 소설이다. 방금 이 말을 듣고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소설이라고 티를 내고 쓰는 소설이 어디 있느냐고. 그런 소설도 있다. 메타 픽션(meta fiction)이라고도 하는데, 대문호 보르헤스의 소설이 대표적이다. 우리나라에선 이인성의 소설이 잘 알려져 있다. 한마디로 ‘소설 쓰는 소설’을 말한다. 본문의 텍스트뿐 아니라, 전시 사진 그리고 각주까지도 모두 소설이다. 따라서 이 소설의 각주들은 완전한 진실이자 대체로 사실이 된다. 뭔가 포스트모던 머시기의 스멜이 나면서, 머리가 지끈거리는가? 그렇다면, 우선 이 소설을 읽으려는 당신에게, 잠깐 동안 눈을 감도록 권하겠다.

_ 도록 p15 중에서

 

 

요즘 핫한 소설가 최영은 ‘로메리고 주식회사’로 2019년 수림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다. 그는 “소설을 읽은 후에 운경고택에 다시 오시는 게 좋습니다. 그리고 잔잔히 다시 걸어보세요”라고 말했다.

 

최정화,

 

문이 활짝 열리면 누군가 당신을 맞이할 것이다. 경찰이다. 다행히 실제 경찰이 아니라 마네킹이다. 최정화의 1998년작 <퍼니 게임(Funny Game)>이다. 작가는 원래 대문 밖에 조각을 두려 했는데, 동네 주민의 정서를 감안해 마당에 배치했다. 1990년대를 살았던 이들이라면 이 경찰관이 낯설지 않을 수 있겠다. 1990년대에 도로 곳곳에 세워졌다가 아쉽게도 퇴장한 마네킹이다! 고속도로와 국도 곳곳에서 사람들을 겁주던 감시의 아이콘. 작가는 쓰임을 다하고 땅에 파묻혀 있던 경찰 마네킹 일부를 끄집어냈고 독일과 프랑스, 영국 등 세계 갤러리에서 전시되는 동안 각광을 받기도 했다. 저 마네킹을 만들었을, 익명의 경찰 관계자가 정말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랑방 가운데에는 금빛 달마와 은빛 비너스가 빙글빙글 춤을 추고 있다. 달마는 입이 함지박처럼 벌어졌다. 눈의 각도 또한 예사롭지 않았다. (중략) 백색 소음 같은 모터 소리는 춤곡이 되었다. 금색의 달마와 은색의 비너스, 동양과 서양, 중국과 그리스, 남자와 여자로 구분된 세상이 쉼 없이 회전하며 미와 추, 성과 속의 경계를 사라지게 하고 있었다.

_ 도록 p40 중에서

 

창가에는 의자 여섯 개가 놓여 있는데 그중 용이 양각된 의자는 원래 운경고택 사랑채에 있던 의자다. 권위가 느껴지는 안락의자 옆으로 작가는 파랑, 보라, 분홍, 황금색으로 치장한 바로크적 느낌의 의자를 만들었다. 플라스틱 의자에 조악한 색을 입힌 이 <왕좌의 게임>에 실제로 앉아 이 풍경을 감상하라고 작가는 권한다. 사랑애 안쪽에는 피라미드 모양으로 바구니를 높게 쌓고 그 위로 황금 여신을 층층이 올렸다. 최정화의 작업 중에는 바구니가 많이 등장하는데, 작가는 1992년 당시 이 작품을 시작으로 바구니를 쌓기 시작했다고. 플라스틱 제단 위에는 황금빛 트로피가 올려져 있다. 역사와 시간은 피라미드처럼 켜켜이 쌓여 지금의 우리가 되었고 트로피는 1980년대, 90년대 그 시간을 극복해 온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그들이 일궈온 가족이 받아 마땅한 상을 은유한다.

 

최정화, 신전으로 화한 플라스틱 바구니에 승리의 여신 니케가 날개를 펼치고 있다. 두 팔을 하늘로 쭉 뻗은 모습은 승리의 희열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최정화,

 

신발을 벗고 대청에 들어서면 <인피니티(Infinity)>라는 작품이 반긴다. 때깔 좋게 금칠한 안온한 빛들은 유기와 플라스틱 그릇에 담겨 끊임없이 순환한다. 밥그릇을 연결해 뫼비우스 띠 형태로 만든 조각으로, 끈끈하면서도 징글징글한 가족이라는 인연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조각 뒤로는 운경고택에 살았던 몇 대에 걸친 인물들의 초상화가 놓여 있다. 그리고 방 안에는 ‘거대한 밥상’이 차려져 있다. 실제로 이 방은 운경고택에 살았던 이들이 모여 밥을 먹었던 공간이라도 한다.

이 안에 놓인 다양한 그릇들은 공공예술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운경재단과 인연을 맺은 사람들로부터 기증받은 일상의 식기로 꾸민 거대한 밥상으로, ‘운경’이라는 이름으로 맺은 가족의 의미로 범위를 확장한다. 운경고택의 역사, 최정화 작가의 예술관, 그리고 운경(雲耕)이라는 이름으로 맺어진 사람들이 향유했던 경험이 한데 어우러져 감동적인 텍스처를 직조한다. 식기에 얽힌 사연은 작품의 일부가 되어 도록에 기록되어 있다.

 

최정화, . 정화수의 이미지를 통해 구현한 은 꽃과 빛의 향연이 되어 참가자들을 서로서로 비춰 준다. 예술은 ‘아무것도 아닌 동시에 세상의 전부’이므로 모든 것이 예술, 모두가 예술가가 될 수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함께 밥을 나누듯 함께 그릇 속 사연을 나눔으로써 이웃을 넘어 ‘더 거대한 식구’가 되고자 하는 소망이 담겨 있다.
최정화,

 

밥이 익어가며 내뿜는 숨은 운무가 되어 부엌 가득 퍼진다. 밥 짓는 사이 국과 찌개도 끓이고 찬도 준비한다. 방이 다 익으면 그릇에 옮겨져 상에 담긴다. 이 모든 음식은 정화수가 되고, 이 모든 그릇은 정화수 사발이 된다. 음식에 마음이, 소망이 담긴다. 밥 잘 먹고 건강하길, 밥 잘 먹고 씩씩하길, 밥 잘 먹고 슬기롭기를.

_ 도록 p95 중에서

 

최정화,

 

우물과 장독대 사이에서 배추가 자라고 있었다. 4미터나 되는 초록 배추와 그에 못지않은 전 배추는 싱싱하기에 이를 데 없었다. 실제로 숨을 쉬기까지 했다. 그 엄청난 크기가 주는 ‘터무니없음의 미학’에 압도당한 채로 나는 입을 벌리고 섰다. 또 어떻게 보니 통통한 것이 귀엽게 느껴지기도 했다. 네 포기의 ‘배추 가족’이었다.

_ 도록 p116 중에서
 

 

이번 전시는 한국 현대 정치사의 한 부분을 차지했던 운경고택의 공간을 배경으로, 우리의 삶으로부터 방사된 ‘모든 것들’을 예술의 형태로 빚어낸 최정화의 대표 작품과 24점이 그야말로 찬란하게 펼쳐진다. 나와 너의 아름다운 21세기를 이곳에서 만나보길. 마지막으로 도록 말미에 있는 글을 소개한다. 그릇을 기증한 이들이 보낸 사연 중 몇 가지다.

* 처음 자취를 하게 되었을 때, 큰언니가 사준 식기 세트. 살림이 늘어가면서 새로운 식기 세트 식구들이 들어오고 ‘너’를 그만 찬장 한구석에 모셔두었구나! 많이 외로웠지? 미안~

* 시집오셔서 돌아가시기 전까지 쓰셨던 엄마의 오래된 냄비입니다. 엄마 덕분에 따뜻한 음식 먹었어요.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 40년 전 언제가 결혼할 딸을 위해 엄마가 준비했던 밥그릇. 엄마의 국그릇과 함께

* 아가들의 그릇, 알뜰살뜰 산다며 챙겨두었던 컵. 생활에 큰 힘이 되어준 벗들을 이제야 떠나보냅니다.

* 얼마 동안 사용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 한의원의 골동품이 왜 버린 팬입니다. 벌써 22년 차 중견 한의사가 되어버린 운경 장학생이 이 그릇과 함께 운경 선생의 소중한 뜻을 간직하며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감사합니다.

* 킨츠키를 배워 깨진 접시를 수리했습니다. 서툰 작업이지만 접시는 다시 음식을 담아내고 제 역할을 다했습니다. 부서진 마음도 단단히 붙어 다시 뜨거운 삶을 담아내길 바라며 수리한 접시를 전합니다.

 

최정화,

김만나 기자

취재 협조 및 자료 제공 운경재단

프로젝트
<최정화: 당신은 나의 집>
장소
운경고택
주소
서울 종로구 인왕산로 7
일자
2022.04.15 - 2022.06.17
시간
오전 9시 30분, 오전 11시, 오후 12시 30분, 오후 2시, 오후 3시 30분
야간 개장: 5월 13일(금), 5월 31일(화) 오후 5시, 오후 6시 30분
김만나
15년간 피처 기자로 일했고, 현재는 네이버 디자인판 편집장으로 온라인 미디어를 경험하고 있다. 유머 감각 있고 일하는 80세 할머니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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