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오후 해운대 구름, SNS 속 낯선 인물, 간식을 조르는 고양이의 울음소리, 식탁 위에서 기묘한 모습으로 시든 백합… 박정원 작가는 일상에서 마주치는 다양한 장면을 통해 인간의 보이지 않는 감정과 심리를 포착한다. 시들어가는 꽃은 작가가 오래전부터 그려왔던 소재로, 그림 속 백합은 실제보다 과장된 모습으로 표현된다. 캔버스 위에 물감을 부어 문지르고 긁어낸 흔적, 온갖 샌들이 번지고 엉켜 겹쳐진 자국이 중첩되어 기이한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과장된 색은 작가가 살아가면서 느끼는 일상의 익숙한 고통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생기를 머금었던 꽃이 서서히 메말라가는 모습을 보면 왠지 모르게 초조해진다. 처음과는 다르게 바싹 마른 자태로 후드득 고개를 떨구는 운명이 참 처량하다.”
집 앞을 산책하며 만나게 되는 변화무쌍한 구름 모양을 담은 <지나가는 하늘>(2021) 시리즈는 자연을 보며 삶의 긴장을 일순간 승화시켰던 짧은 감흥을 담고 있다. <걸프롬 서울(Girl from seoul)>(2017) 시리즈는 인스타그램에 등장하는 젊은 여성들의 공허한 표정을 그려낸다. 엷은 수채화로 여러 번 칠한 인물의 피부 표현은 빠른 유행과 변화하는 삶에 적응하는 동시대인의 초조한 감정을 나타낸다.
작가님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화가 박정원입니다. 저는 일상에서 마주치는 다양한 장면을 통해 인간의 보이지 않는 감정과 심리를 포착하는 구상회화를 그려왔습니다. 제 그림은 문명이라는 단단한 외투 속에 숨겨진 현대인의 연약한 심리와 감정을 포착합니다. 공중목욕탕 거울 앞에서 몸치장을 하는 여성의 모습으로 그리기도 했고, 감정에 도취된 채 사교춤을 추는 남녀의 표정을 통해, 때론 시들어가는 꽃의 모습을 통해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인간의 야릇한 감정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심리의 층위를 드로잉 수채화 유화에 이르는 다양한 회화적 재료의 표현으로 담아내고 싶습니다.
시들어가는 화병을 오래도록 그려왔다고 들었는데, 이유는 무엇인가요?
시들어가는 화병은 제가 결혼하고 나서 10년 가까이 다루어 왔던 소재입니다. 어릴 적 서울 변두리 지역의 아파트에서 성장했는데요. 뻥 뚫린 하늘을 보는 것도, 자연을 체험하는 일도 익숙치 않았습니다. 시골 출신인 남편은 꽃을 너무 좋아해서 신혼집 빌라 뒷마당에 장미 농사까지 지었는데요. 초여름부터 가을까지 장미꽃을 매일 화병에 꽂아 두곤 했습니다. 덕분에 처음으로 자연을 곁에 두고 천천히 감상하는 시간을 가졌죠. 완벽한 자태의 꽃이 서서히 본래의 색과 생기를 잃고 죽음으로 곤두박질치며 변해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 찰나를 붙잡고 싶다는 마음이 들더군요. 그래서 이 소재로 수채화를 자주 그렸습니다. 초라하게 시들어가는 화병 속 꽃은 마치 우리의 연약한 삶처럼 느껴졌습니다.
이번 전시의 그림 속 꽃은 시들어가는 백합입니다. 저게 백합은 그 어떤 꽃보다도 우아하지만, 시들어가는 모습만큼은 가장 그로테스크하게 다가오는 꽃입니다. 가늘고 긴 손가락처럼 앙상하게 뒤틀린 시든 백합의 형태, 빛바랜 꽃잎의 색감은 두려운 동시에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이러한 백합의 죽음을 최대한 거대한 크기로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실제보다 꽃잎을 더 과장되고 과감하게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캔버스에 물감을 붓고, 비비고 닦아내고, 긁어내는 방식으로 작업했어요. 제가 느낀 일상 속 죽음의 단상을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했습니다.
주로 자연물과 일상의 풍경을 화폭에 담습니다. 당신이 포착하고자 하는 순간은 언제입니까?
대학을 졸업한 이후 저는 그림을 통해 비일상적이고, 몽상적이며, 드라마틱한 순간을 포착했던 것 같습니다. 당시 감정 기복이 심했고 자신에게 매몰되어 있었죠. 작가로서 일상적인 소재보다 더 특별한 장면을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30대 중반부터 작가로서의 삶보다, 일상적인 순간을 소재로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주로 하루 일과를 마치고 홀로 휴식할 때나 산책할 때, 그날그날에 마주치는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그렸죠. 모아둔 아카이브가 제 감정과 맞아떨어지는 연결고리가 있다고 느낄 때 그림을 그립니다.
4년 전 서울에서 부산으로 이주해서 해운대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해운대 해변을 저녁에 혼자 산책하는 시간이 많았는데, 이번 전시에 보여준 <지나가는 하늘> 2021 시리즈는 그때의 경험을 담은 그림입니다. 뻥 뚫린 하늘과 해안선을 보면 예나 지금이나 인간이 느끼는 보편적인 감정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구름의 모양을 바라보는 사색의 시간은 하루의 긴장과 복잡한 생각을 완화시키는 순간이었고, 그 짧은 카타르시스를 그림으로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걸프롬서울> 2019 시리즈는 SNS에서 마주친 20대 여성 피팅 광고모델들이나 인플루언서들의 사진을 보고, 그린 초상화입니다. 도시에서 사는 젊은 여성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저의 시선이 담겨있는 작업입니다. 빠르게 변화하는 서울이라는 곳에서 동시대의 유행을 몸에 걸치고 긴장과 초조함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그림에 담아내고 싶었습니다. 수채화로 엷게 겹쳐 칠한 피부의 표현은 이러한 동시대의 연약한 심리와 감정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알려주십시오.
이번 〈Beautiful Mess〉 전시명을 직역하면 ‘아름다운 엉망’인데요. 제이슨 므라즈의 노래 제목에서 모티브를 얻었습니다. 살면서 마주쳤다 사라지는 수많은 풍경과 사람, 그리고 그 안에 벌어지는 사건들은 대부분 그 의미를 스쳐 지나가는 불규칙적인 인상입니다. 때때로 이러한 삶의 단상은 모순되고 엉망진창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인생의 모순 속에서 의미를 부여하고 삶의 애틋함을 느끼는 것은 각자의 몫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 그림 역시 삶의 작은 단상들로부터 일말의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이었습니다. 평소 시들어가는 꽃을 보며 자연의 연약함을 느끼다가도 이내 밥 달라고 성가시게 조르는 반려묘를 보고 웃음이 터지곤 하는데요. 그 엇박자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관객이 각자의 삶에 의미를 발견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발행 heyPOP 편집부
자료 제공 플레이스막, 박정원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