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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14

벽 전체를 채운 14개의 대형 캔버스!

루시 맥켄지가 전하는 벽화 속 미묘한 메시지
에르메스 재단 라 베리에흐(La Verriére)의 시리즈 전시 <재료의 사안(Matières à Panser/Matters of Concern)>의 마지막 전시로 선택한 아티스트는 벨기에에서 활동하는 스코틀랜드 작가 ‘루시 맥켄지(Lucy McKenzie)’다. 이미 테이트 리버풀과 뉴욕 모마에서 전시를 가진 적이 있으며, 최근 런던 지하철역 공공 예술 프로젝트에 참여한 떠오르는 신진 예술가의 첫 벨기에 개인전은 그 자체로도 이목이 집중되지만 화이트큐브가 아닌 독특한 ‘라 베리에흐’ 갤러리 공간을 대형 벽화로 가득 채운 세노그래피 방식은 <재료의 사안>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하려는 큐레이터 기욤 데상쥬(Guillaume Désanges)의 의도도 엿보인다.
전시전경 © Isabelle Arthuis / Fondation d'entreprise Hermès

루시 맥켄지는 1977년 스코틀랜드 글라스고에서 태어났다. 던디(Dundee)에서 미술공부를 마치고 그림 실력을 키우기 위해 브뤼셀로 이주해 미술학교를 다닌 그녀는 누구보다 숙련된 회화 실력을 갖춘 작가로 통한다. 동유럽의 선전 벽화, 냉전 도상학, 산업 타이포그래피 등을 바탕으로 그린 그림들이 유명한데 포스터처럼 보이는 벽화 그림들이 미술과 디자인의 경계를 아우르는 것이 재미있다.

벽화를 다루는 작가답게 전시 방식 역시 세 면의 벽 전체를 14개의 대형 캔버스를 붙여 프레스코(벽화)처럼 보이게 했다. 벽화로 꽉 찬 공간과 마주하는 일은, 특히나 에르메스 매장 뒤편에 숨어있는 거대한 공간에서라면 압도적인 시각적 즐거움을 경험하게 되는데, 작년 3월에 시작해 약 열 달의 시간이 걸린 직접 손으로 칠한 정교한 작업들은 보는 순간 경외심을 불러 일으킨다. 거대한 트롱프뢰유* 기법으로 그려진 출입구, 환풍기 등을 표현한 방식과 그것들의 아름답고 세련된 디자인, 그리고 그림이 보여주는 인물들의 스타일과 장면마다 담고 있는 우아한 색조와 색상은 패션 일러스트를 보는 듯 즐겁다. 하지만 숨을 고르고 난 후 가까이 다가와 그림 속 디테일들을 바라보면 단순 패션 일러스트가 아닌 새로운 메시지가 읽혀진다. 다양한 역사가 현재와 충돌하고 있고, 이데올로기가 패션을 만나고 정치가 미학을 결정하고 이론이 신체를 왜곡하는 문제가 도사리고 있으니 말이다. 벽화란 원래 사회 및 정치 논평의 도구이기도 했으니 작가의 의도가 점차 이해되기 시작한다. 전통 벽화(멕시코의 디에고 리베라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미국 자본주의 리얼리즘에 이르기까지)에서 영감을 받은 루시 맥켄지는 인식을 높이는 도구로서 벽화를 선택한 것이다.

* 트롱프뢰유(trompe l’oeil) ‘눈속임’이라는 의미의 프랑스어로 그림을 실제 사물로 혼동하게 만드는 매우 사실적인 표현 기법을 일컫는 말.
전시장 세 면을 채운 14개의 대형 캔버스
© Isabelle Arthuis / Fondation d’entreprise Hermès

전 세계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트롱프뢰유 기술을 가르치는 130년이 넘는 전통을 보유한 브뤼셀 반 데 켈렌-로겔랭 국립 회화 학교(Institut Supérieur de Peinture de Bruxelles Van Der Kelen-Logelain)에 입학해 따로 기법을 배울 만큼 간절했던 그녀의 트롱프뢰유 회화를 향한 열정은 어디에서 온 걸까? 가짜 하늘, 가짜 창문같은 눈속임 기법을 통해 아티스트와 관람객 간의 권력관계가 형성되는 것. 그리고 그것이 진지한 방식이 아닌 평범하면서 키치하고, 누구나 길에서 본 적 있는 기술이지만 현실에서는 가질 수 없는 장식과 화려함을 더하고 있다는 점이 루시 멕켄지를 매료시켰다. 많은 예술가들이 정치적 메시지를 매우 진지한 방식으로 보여주지만 그녀는 미학적인 접근을 원했다. 어릴 적 좋아했던 인형의 집과 팝업북에서 느꼈던 독창적 아름다움과 이것을 연결시키는 수단이 트롱프뢰유가 된 것이다.

트롱프뢰유 기법으로 그려진 중앙에 위치한 문
코코 샤넬과 르 코르뷔지에가 우크라이나 전통 의상을 입은 여성의 땋은 머리를 자르는 모습 © Isabelle Arthuis / Fondation d’entreprise Hermès

전시장 세 면의 벽을 채운 14개 패널이 만든 거대한 프레스코는 각 벽마다 여러 캐릭터와 에피소드를 담고 있다. 전시장에 들어오자마자 바로 보이는 중앙의 벽이 가장 두드러지는데 한쪽에는 독일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게오르그 짐멜(Georg Simmel)이 한 무리의 학생들에게 여성의 몸을 압박하는 코르셋에 대해 설명하고 있고 그와 비슷하게 패션에 대한 매우 가부장적인 시각을 가진 또 다른 이론가 아돌프 로스(Adolf Loos)는 그의 아내를 상징하는 어른으로 성장하지 못한 여자의 모습의 인형을 들고 있다. 그런 다음 코코 샤넬과 르 코르뷔지에가 우크라이나 전통 의상을 입은 여성의 땋은 머리를 자르는 모습이 보인다. 일종의 모더니즘 연구실에서 과학자들의 시선 아래 여성들은 설거지와 청소를 하고있으니, 현실의 돌발이 어떻게 유토피아와 초기의 이상주의를 좌절 시키는지 점점 모호해지는 부분이다.

해방된 패션의 비전
© Isabelle Arthuis / Fondation d’entreprise Hermès

그리고 오른쪽에는 루시 맥켄지와 그녀의 파트너이자 텍스타일 디자이너인 베카 립콤브(Beca Lipscomb)가 등장하며 베로니크 브라퀸호(Véronique Branquinho)와 같은 현재의 디자이너와 대화하는 마들렌 비오네(Madeleine Vionnet), 쟌느 랑방(Jeanne Lanvin)과 같은 인물들을 보여주면서 보다 평화롭고 해방된 패션의 비전으로 전환하고 있다. 그렇게 여성들의 유토피아 같은 세계를 이룩하고 여행을 연상시키는 지도와 창작에 대한 메시지를 보여주는 이미지들이 오른쪽으로 이어진다.

유토피아와 창작의 세계로의 여행
© Isabelle Arthuis / Fondation d’entreprise Hermès

반대로 왼쪽 벽은 소비에트 연방의 패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정치가들에게 의해 의상이 선택되고 그렇게 샵에 걸려진 옷이 마음에 들지 않아 자신의 옷을 직접 만드는 행복한 사람들의 마지막 장면이 미묘한 비전을 제공한다. 서방의 패션잡지를 보는 것이 불법이었던 시기 몰래 보그와 바자 같은 잡지를 숨어서 보던 사람들의 모습도 재미있다. 그리고 전시장 한편에 루시 맥킨지와 그녀의 파트너가 함께 설립하고 운영중인 브랜드 ‘아뜰리에 E.B’의 쇼케이스를 발견할 수 있다.

소비에트 연방의 패션 역사를 보여주는 부분
© Isabelle Arthuis / Fondation d’entreprise Hermès
‘아뜰리에 E.B’의 쇼케이스

대형 프레스코에 담긴 큰 줄기의 메시지는 이렇게 설명이 되지만 곳곳에 숨어있는 작은 디테일들을 발견하는 것은 관람객의 몫이다. 살짝 들린 치마 안에 보이는 신발의 모습, 여성 디자이너들이 앉아있는 모더니즘을 보여주는 테이블과 철재 의자, 구멍 난 양말에서 빠져 나온 빨간 매니큐어의 발톱 이라던가 패션잡지를 숨기려는 순간 손가락을 입술에 댄 여성의 제스처 등 작가의 상상력을 따라다니려면 무척 분주해진다. 전체적으로 <벨기에의 건물, 석유의 건물, 실크의 건물(Buildings in Belgium, Buildings in Oil, Buildings in Silk)>이라는 긴 제목의 전시는 젊은 작가가 가진 테크닉 수준과 창의력에 놀라고 압도당한다. 혹시 이 전시를 실제로 볼 기회가 생긴다면 서두르지 말라고 충고하고 싶다. 시간을 내어 천천히 탐험 하듯 볼 것. 그렇게 이 매력적인 아티스트를 발견해야 벽화의 아름다운 미학과 메시지가 아주 오래 기억에 남을 것이다.

양윤정 기자 

일자
2022.01.21 - 2022.03.26
링크
홈페이지
헤이팝
공간 큐레이션 플랫폼, 헤이팝은 공간을 만드는 사람들과 그 공간을 채우는 콘텐츠와 브랜드에 주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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