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화면을 구성하는 최소 단위 사각형, 픽셀(Pixel)로 그림 그리며 스타벅스, 디올, 현대 모터스, 아메바컬쳐 등 셀 수 없이 많은 기업 및 브랜드와 협업한 인물. 현대 미술과 디자인에 관심 있다면 '주재범'이란 이름이 낯설지 않을테다.
주재범은 지난달 NFT 작품을 판매하는 옥션 ‘스탠바이비(STANbyB)’에서 픽셀로 표현한 모나리자 작품을 9.8 이더리움(ETH)에 판매하기도 했다. 이는 원화 환산 시 약 4,800만 원에 달하는 가격이지만 이보다 흥미로운 사실은 따로 있다. 판매한 작품 <모나 바이러스(Mona Virus)>는 그의 과거 작품 중 <픽셀 모나리자(Pixel Monalisa)>를 도용한 유저인 모나스(Monas)를 패러디 한 것. 급변하는 최신 기술을 픽셀 아트에 적극 접목하는 다작의 귀재와 이야기 나눴다.
Interview with 주재범 작가
전직 애니메이터였다.
외동이라 함께 놀던 친구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H2>나 <슬램덩크> 등을 좋아하는 고교 동창생과 몰려다니며 동아리에 가입했다. 애니메이션으로 대학에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열심히 공부해 관련 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학교에서 배우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고인돌’이라는 이름의 스튜디오를 결성해 애니메이션 기반의 실험적인 작업을 했다. 월급 수준의 연봉으로 일했지만 세계적인 애니메이터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밤낮없이 일했다. 하지만 아동용 애니메이션이 활성화된 국내 시장에서 성인을 위한 멋진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대중의 반응을 알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픽셀 아트를 시작한 계기는.
애니메이션 작업에 회의를 느끼며 ‘내가 잘하는 게 뭘까?’ 물었다. 그때 내가 구글 블로그스팟(Blogspot)에 올려둔 음악, 그림과 관련한 게시글에 하나 둘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대중의 반응에 목말라 있던 내게 반가운 일이었다. 해당 채널에서 본격 활동하고자 내가 그린 그림을 프로필 사진으로 등록했지만 모작처럼 느껴져 고민하던 차에 포토샵에 켜진 흰색 레이어를 보게 됐다. 무심코 그곳에 점 찍어 내 얼굴 그린 것이 시작이었다. 그림을 본 사람들이 재미있어하며 자신의 얼굴도 그려 달라 했다. 픽셀 아트를 나의 주요 장르로 택한 시점일 뿐만 아니라 그림 그리는 원초적 즐거움을 느낀 순간이었다.
세밀한 작화를 요구하는 애니메이션 대신 픽셀아트를 하게 된 데 아쉬움은 없나.
내가 속해있던 ‘고인돌 스튜디오’는 메이플 스토리 오프닝과 같은 멋진 작업을 했다. 때로 애니메이터의 길을 쉽게 포기한 것은 아닌가 스스로 묻기도 한다. 지금은 넷플릭스나 왓챠플레이와 같은 다양한 OTT 플랫폼이 등장해 애니메이션을 상영관에서 개봉하거나 대중의 반응을 알기까지 오래 기다릴 필요 없다. 버텼다면 꿈꿨던 애니메이션 작품을 만들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기억에 남는 최근 작업은.
몰입형 아트 플랫폼 ‘다이브인’과의 협업이 기억에 남는다. 다양한 아티스트의 작품을 배치해 각 객실을 전시 공간으로 꾸미는 방식으로 ‘RPGREst in pixel GroundGo!’라는 제목 아래 아날로그 향수를 자극하는 게임기와 러그, 그리고 조명 등을 전시했다. NFT 작품을 판매하는 ‘스탠바이비(STANbyB)’에서 <오프 투 픽세럴 월드(OFF TO PIXELLEL WORLD)>개인전을 개최 중이기도 하다. 이는 가상화폐로 NFT 작품을 구매하는 새로운 형태의 전시로, 나는 평행 우주를 다루는 미국 과학 미스터리 드라마 <프린지(FRINGE)>에서 영감을 얻어 NFT를 또 다른 우주 즉, 가상 공간이라고 해석했다. <얼터-에고(Alterego)> 작품에 등장하는 두 명은 가상 공간과 현실에 서 있는 나다. 가상 공간에 있는 주재범은 현실 세계의 내 그림을 착취하는 해커라는 설정이다. 해당 작품의 QR코드를 촬영하면 힙합 뮤지션인 ‘19xx’가 직접 쓴 가사 전문이 나오는데 좋아하는 음악가와 협업하고자 했던 나의 소망을 이뤄 뜻깊다. NFT 작품 구매는 고유의 트래픽 주소를 사는 것이므로 모든 과정이 온라인에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작가와 컬렉터가 직접 만날 수 있는 공간도 필요하다고 생각했기에 오프라인 전시를 기획했다.
실제 모델과 픽셀 아트가 겹치는 <메타 모델(Meta-Model)>시리즈가 흥미롭다.
뉴욕 패션계에서 활동하는 비디오 아티스트 다닐로(Danilo)가 인스타그램 메시지를 보내 협업을 제안했다. 의견을 주고받으며 그가 찍은 유명 모델의 비디오에 픽셀 아트를 접목하기로 하고 시리즈의 제목을 <메타 모델(Meta-Model)>로 정했다. 내게 없는 그의 사진 및 비디오 촬영 기술과, 픽셀 아트를 합쳐 만든 작품이라는 의의가 있다. 무엇보다 다른 국가에 거주하는 두 명의 아티스트가 인스타그램이라는 플랫폼에서 만나 가상 전시를 진행했다는 점이 놀랍다.
많은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는 현시대를 바라보는 작가의 생각은.
내가 잘하는 것의 기반을 단단히 다지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한다. 그 후 새로운 기술을 작업에 하나씩 적용해 보는 것이다. 모든 작업을 혼자 할 수는 없기에 협업의 중요함을 잘 이해해야 한다. 갑자기 출연한 것만이 ‘새로운 것’이 아니라, 각자의 재능과 기술을 조합해 만든 것 역시 ‘새로운 것’이라 생각한다. 온·오프라인으로 다양한 사람과 교류하며 작업 영역을 확장하는 것이 필요하다.
—다작의 귀재, 주재범의 시간관리법이 있다면.
잠을 안 잔다? (웃음) 사실 작업에 필요한 과정 설계만 잘 해놓으면 많은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 그리고 대화를 잘 해야 한다. 너무 바빠 연락이 늦을 때는 마음을 다해 큰 목소리로 “죄송합니다”라고 말한다. 그럼 진심이 전달되는 듯하다.
주재범 작가의 픽셀아트 작업 과정
미술계가 주목하는 픽셀 아티스트로서의 소회는.
한때 애니메이터 시절 습득했던 세밀한 작화, 연출, 스토리텔링 같은 모든 기술을 버린 채 픽셀 아티스트로 새로이 시작하려 했다. 하지만 결국 지금의 주재범을 완성한 것은 켜켜이 쌓은 과거의 경험과 기술이라는 사실이 많은 것을 시사한다. 애니메이터 시절을 떠올리면 내게 보여주는 모든 관심이 참 고맙다. 재미있어서 시작한 픽셀 아트가 다양한 협업으로 연계되니 고맙지 않을 수 없다. 신은별 기자와 나도 두 번째 인터뷰를 진행 중이지 않나. 모든 작업의 끝이 다음 작업의 가교라 생각하고 인연을 소중히 생각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