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2-03

싹이 움트고 생명이 요동치는

고사리 개인전 <드는봄>
도시에서 살다 보면 눈치챌 새도 없이 계절이 바뀐다. 기다리던 사람처럼, 때로는 불청객처럼 고개를 내미는 사계절은 우리 곁에 맴돌다 부지불식간에 자취를 감춘다. 가로수의 싹이 돋아 잎이 물들고 다시 지기까지의 모습을 유심히 살피지 않는다면 오로지 살결을 스치는 바람이 지표일 터. "해가 길어졌네, 짧아졌네"와 같은 이야기와 함께 매달 치르는 의례처럼 달력을 넘기다 보면 어느새 마지막 장을 맞닥뜨린다.
고사리 개인전 전시 전경 © CR Collective

 

한 해가 가고, 다시 시작된다. 우리는 반복되는 리듬 속에서 살아간다. 인간에게 호흡과 맥박, 감정과 같은 신체적, 정신적 리듬이 있듯 지구 역시 마찬가지다. 자전과 공전이라는 순환을 통해 하루의 낮과 밤, 계절의 흐름이 바뀐다. 선조들은 기후에 따라 변모하는 만물의 움직임을 24절기로 나누어 농사를 준비했다. 매번 때가 되면 절기에 맞춰 농사 채비를 하고, 수확물을 거둬 농사의 마침표를 찍었다. 절기는 ‘농사 달력’이었던 셈이다.

 

고사리 작가가 농사 짓는 강북마을 텃밭 © 고사리

 

24절기의 시작인 ‘입춘(立春)’은 봄의 첫머리를 알리며 농사의 흉풍을 점치는 중요한 절기였다. 조상들은 이 시기를 ‘땅이 움직인다’거나 ‘물고기가 얼음 봇짐 진다’와 같은 아름다운 언어로 묘사한다. 주변을 면밀히 살피지 않으면 알아채기 어려운 일이다.

고사리 작가는 실제 농사를 지으며 체감한 자연의 순환 구조를 조명했다. 흙과 씨름하며 자연 속에 움트고 생동하는 생명의 리듬을 탐색했다. 작가가 시선을 두고 애정을 가지는 것들을 한데 모아 전시한 개인전 <드는봄*>이 연남동 씨알콜렉티브에서 한창이다. 대한(1월 20일)과 입춘(2월 4일) 사이, 고사리 작가와의 따뜻한 만남으로 나눈 대화를 소개한다. 참고로 작가의 작품 중 ‘퇴비 언덕’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으니 싱그러운 자연을 관찰하고 싶다면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

* 공식적인 전시명이 ‘드는봄’이므로 띄어쓰기 없이 그대로 사용합니다.

 

 

Interview with

씨알콜렉티브 현민혜 큐레이터(이하 현), 고사리 작가(이하 고)

 

고사리, 무제, 2019-2021 © CR Collective

 

전시 질문에 앞서 무례하지만, ‘고사리’가 작가님 예명이 아니라 본명이라는 사실에 조금 놀랐습니다. 너무 고운 이름이에요.

– 현, 고 많이 물어보시더라고요. (일동 웃음)

 

 

전시명이 ‘드는봄’ 입니다. 마침 대한과 입춘 사이라 계절과도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 현 전시명은 고사리 작가님이 제안하셨는데요. 작가님이 농사를 짓고 작물을 거둬들여 먹으면서 ‘절기’에 관한 이야기를 꼭 한번 해보고 싶었다고 하더군요. 농사에서는 24절기가 무척 중요하니까요. 전시를 일 년 중 가장 큰 추위를 뜻하는 ‘대한(1월 20일)’이 물러나고, 따스한 봄을 맞이하는 ‘입춘(2월 4일)’ 사이에 열게 됐어요. 봄은 만물이 태동하는 시기이니 생의 주기와 순환에 관한 화두를 던져 보면 어떨까 했습니다.

 

– 고 전시명인 <드는봄>이 절기로 말하면 ‘입춘(立春)’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입’이 입구(入口)의 ‘들 입(入)’이 아니라 ‘설 립(立)’이잖아요. 봄이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찾아오는 게 아니라 사람도, 동식물도, 모두 다 같이 봄을 세워 일으킨다는 뜻으로 인식했어요. 지난 몇년 간 코로나로 움츠러든 사회 전반의 분위기를 겨울이라고 본다면 힘든 시기를 타개해 따뜻한 봄을 함께 세워보자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겠죠.

 

고사리, 무제, 2019-2021 © CR Collective

 

계절을 상징하는 동시에 희망적인 미래를 은유한 장치라고 느껴지네요.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무엇인가요?

− 현 인위적인 요소를 덜어낸 ‘자연스러움’이 키워드라고 볼 수 있어요. 작가님은 그동안 쓰임을 다한 사물과 흔히 지나치기 쉬운 현상을 관찰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해 왔는데요. 이번 전시 역시 우리 곁에 늘 존재하지만 놓치기 쉬운 것들을 다시 들여다보고, 돌보며 마음에 되새기자는 취지로 마련했습니다. 이번 전시의 중심 소재 중 하나가 작가님이 직접 수확한 유기농 작물이에요. 먹었던 음식에서 나온 부산물을 말려 전시하기도 했고 살펴보시면 귤껍질부터 밤송이, 무청에 고사리까지 있죠. 보통은 하나의 전시를 준비하며 소모되는 물건이 정말 많아요. 일회적으로 사용되고, 순식간에 소진된 각종 폐기물량이 어마어마한 거죠. 그래서 <드는봄>을 기획하며 어떻게 하면 최대한 인공적인 재료를 쓰지 않고 작품을 설치할 수 있을지 작가님과 함께 깊이 고민했어요.

 

 

‘땅의 별’

다양한 말린 식물, 2022

 

고사리 개인전 전시 전경 © CR Collective, 고사리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천장에 주렁주렁 열매처럼 매달린 식물이 눈길을 끕니다. 직접 농사지어 수확한 작물이라고요.

− 고 자급자족의 삶을 꿈꾸며 지난 3년간 북한산 기슭 우이동에 머물며 농사를 짓고 있어요. 그곳에 거주도 하고, 작업도 하면서 동시에 공동체로 운영되는 마을 텃밭에서 농사일도 한답니다. 직접 공들여 수확한 곡식이나 채소로 음식을 해 먹고, 알맹이 외의 껍질이나 부산물은 퇴비 간에 보관해 나중에 거름으로 활용해요. 저는 그때 주워 온 것들을 씻어서 집에 걸어 두고 가만히 지켜보곤 했죠. 이렇게 하나둘 모은 다양한 식물이 많이 쌓이면서 전시까지 열게 됐고요. ‘땅의 별’처럼 땅에서 솓아 나고 자란 생명이 다시 땅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로, 작물을 별처럼 전시장에 걸어 뒀습니다.

고사리 작가가 농사 짓는 강북마을 텃밭에서 채집한 작물 © 고사리

 

일상적인 행동이 전시로 확장됐네요. 걸어 둔 말린 식물을 응시하면서 어떤 미감을 탐구하셨을지 궁금해요.

− 고 의도가 없었던 행위에서 파생된 작업인 셈이죠. 제가 농사짓기 전부터 집에서 생기는 쓰레기나 길거리에서 주운 물건, 사람이 더는 살지 않는 빈집처럼 소외되고 방치된 사물과 공간을 주제로 작업했는데요. 농사를 지어도 마찬가지였어요. 아담한 씨앗이 너무 사랑스럽고요. 발아한 새싹과 결실을 본 열매 역시 아름답지만, 정작 마지막에 제가 시선을 두는 건 부산물들이더라고요. 생명이 땅에서 자라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중간 상태에 주목하게 돼요.

 

고사리 개인전 전시 전경 © 고사리

 

전시장에 걸려 있는 작물을 몇 가지 소개해 주신다면요?

− 고 정말 다양한데 배추, 무, 감자 등 우리에게 익숙하면서 친근한 작물의 뿌리부터 줄기까지 다채롭게 구성했어요. 보통 시장에서 판매될 때 줄기는 제거된 상태라 만나 보기 어려운 당근 줄기도 있고요. 한 편에는 큐레이터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까먹은 귤껍질도 차곡차곡 쌓아 실로 꿰어 전시했어요. 만져 보시면 제각각 말린 시간의 정도에 따라 촉감도 다르답니다.

 

부서지지 않을까요? (웃음)

− 고 그마저도 자연스러운 상태인 거니까요. (웃음)

 

 

해와 달

조명, 나무, 전동 장치, 2022

 

고사리 개인전 전시전경, 2022 © CR Collective

 

구획 별로 크게 세 종류의 설치 작품이 있어요. 특히 전시장 전면의 가장 넓은 공간은 많은 걸 보여줄 수 있음에도 오직 해와 달의 움직임으로만 채운 영상을 전시한 점이 과감하게 느껴져요.

− 현 씨알콜렉티브는 올해 비정형이라는 키워드를 주제로 1년간의 전시를 선보일 예정인데요. 정형화되고 통제된 형식보다 자유로운 설치 작품을 선보이고자 했어요. 저희도 영상이 재생되는 공간이 관람자의 시선이 가장 먼저 집중되는 메인홀이기에 주목해야 할 작품을 정면에 배치하는 편인데요. 고사리 작가님의 작품을 전시할 때는 대표님이 전시를 아우를 수 있는 영상을 틀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주셨고, 작가님과 의논 끝에 ‘해와 달’이라는 작품을 통해 자전과 공전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게 됐어요. 프로젝터에서 나오는 빛이 무형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공간의 중심을 잡아주면서 전시 주제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작품이기도 합니다.

 

고사리, 해와 달, 2022 © CR Collective

 

− 고 인간이 호흡, 맥박, 감정에 이르기까지 반복적인 바이오리듬을 지닌 채 살아가듯 지구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어요. ‘해와 달’이라는 작품의 움직임을 통해 자전과 공전이라는 현상을 주목하여 우리는 거대한 우주의 리듬 속에서 살아간다는 은유를 담았어요. 낮에는 달이 보이지 않고 밤에는 해가 보이지 않지만, 분명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순환은 계속된다는 걸 상기시키죠.

 

 

물 흐르는 소리, 바람 소리 영상과 함께 잔잔한 사운드도 들려요.

− 고 선조들이 입춘에 대해 기록해 놓은 글에서 착안했어요. 입춘에는 ‘동쪽에서 따뜻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또 ‘땅이 움직인다’라고 서술되어있어요. 흙 속에 있던 곤충이 깨어나면서 움직이면 땅이 절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을 테니까요. 덧붙여 얼었던 얼음이 녹아 갈라진 틈 사이로 물고기가 헤엄치는 모습을 ‘물고기가 얼음을 봇짐 지듯이 헤엄치고 있다’라고 아름답게 표현한 거예요. 이러한 묘사에서 연상되는 소리를 음향 작업을 하시는 성상식님의 도움을 받아 녹음했어요.

 

 

퇴비 언덕

1~3년간 발효한 퇴비, 2022

 

고사리, 퇴비 언덕, 2022

 

농사에 이용하는 퇴비를 직접 가져오셨다고요. 양이 상당한데 무게가 어느 정도인가요?

− 고 생태 텃밭을 꾸리고 있기 때문에 화학 비료가 첨가되지 않은 흙이에요. 대략 35포대, 600~700kg 정도 될 것 같아요. 과거에는 푸세식 화장실에서 비료를 직접 만들어 사용했지만, 수세식 화장실이 보편화하면서 요즘에는 화학 비료를 대부분 사용하고 있지요. 퇴비를 만드는 방식은 정말 다양합니다. 저희 마을에는 생태 화장실*이 있어서 대변과 음식물 쓰레기, 톱밥, 나뭇가지, 나뭇잎 등을 섞어 퇴비를 만들어요. 소변은 그 자체로 순수한 액비(물거름)가 되고, 대변은 말려서 가루로 넣고 계속 섞어주고 환기시키는 과정을 거치면 유용한 자원이 됩니다. 길게는 3년까지 발효를 시키는데 화학 비료가 함유된 퇴비와는 달리 흙냄새가 물씬 납니다.

*생태 화장실: 물을 사용하지 않고도 간단하게 대소변을 분리할 수 있도록 이루어져 있는 친환경 화장실. 대소변은 미생물 분해를 거쳐 냄새가 거의 나지 않으며, 발효 퇴비로 만들어져 농사의 거름으로 사용된다.

 

퇴비 언덕에서 자란 정체모를 새싹 © 고사리

 

오히려 재래식 퇴비가 냄새가 없다는 뜻이군요. 전시장의 흙더미 여기저기서 새싹이 움트고 있는데, 모양새가 조금씩 달라요. 정체가 궁금한데요?

− 고 퇴비에 씨앗이 섞여서 자란 거예요. 좀 더 지켜봐야 종자를 아는데 ‘달래’, ‘냉이’, ‘부추’, ‘콩’ 종류 같아요. 아직은 추측만 가능할 뿐이죠. 퇴비를 퍼서 전시장으로 가져온 직후에는 날씨가 워낙 추우니 흙이 꽁꽁 얼어 있었어요. 시간이 흐르며 점차 굳었던 흙이 녹고 퇴비에서 새싹이 돋고 곤충이 알을 깨고 나오더군요. 무당벌레, 개미, 달팽이부터 제가 모르는 곤충도 엄청 많아서 요즘 공부하고 있어요. 평범한 흙더미 같지만, 가만히 지켜보면 이 안에서 다양한 생물이 공존하고 있답니다.

 

 

진짜 ‘드는봄’이네요. (웃음)

− 고 그렇죠? 도심에서는 유심히 살펴야 봄이 왔다는 걸 알아채잖아요. 관객분들이 전시장에서 조금이나마 생동하는 생물을 들여다보고, 바깥에서도 주변을 둘러볼 여유를 갖길 바랐어요.

 

 

도시에서 생활하다 보니 산을 찾아가지 않는 이상 이 정도 규모의 흙을 볼 일이 자주 없어서 무척 인상적인데요. 다른 관람객 반응이 어땠는지 궁금해요.

− 고 전시장에서 싹을 틔웠다는 이야기를 듣고 생명을 다시금 생각해보게 됐다는 분이 계셨어요. 작은 흙더미지만, 이 안에서 다양한 개체들이 살면서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하나의 세계를 이루잖아요. 작은 공간에서 거대한 세상을 맞닥뜨린 것 같다고 말씀하신 분도 기억에 남아요.

 

 

전시가 2월 26일까지인데, 마지막 날이면 또 다른 풍경이겠어요. 매주 변화를 촬영해서 기록하고 있다고요. 퇴비를 배경으로 한 영상이 그것이고요.

− 고 변화된 모습이 궁금해서 다시 찾아와 주신다는 분이 꽤 있어요. 전시장이 실내라 햇빛은 없지만, 온습도가 적절해서 식물이 잘 자라는 편이에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새싹이 부쩍 늘고 곤충의 개체도 많아진 것 같더라고요. 너무 빨리 변화하니 아쉽기도 하고, 그저 흙더미처럼 보일 수도 있어서 이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세밀하게 들여다볼 수 있도록 영상을 함께 보여드리고 있어요. 이 안에 지렁이도 많은데, 지렁이는 비옥한 토양일수록 많잖아요. 건강한 흙이라는 증거에요. 영상을 보시면 지렁이 장이 흙으로 가득 차 있지요? 흙을 먹고 영양분이 가득한 흙배설물을 배출할 거예요.

 

고사리 작가가 농사 짓는 강북마을 텃밭 © 고사리

 

양질을 흙을 다시 내보내는군요. 듣고 보니 ‘순환’의 의미를 되새기게 돼요. 작가님은 평소에 농사를 짓고 살면서 어떤 것을 배우나요?

− 고 유년 시절부터 자급자족하는 삶을 동경했는데 도심에 거주할 때는 옥상에서 작은 텃밭을 꾸려서 토마토, 상추, 고추 정도만 키웠어요. 이제는 운 좋게 땅에서 작물을 재배하지만, 작업을 위한 행위나 농사를 짓고 있다는 느낌보다는 삶의 일부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다 보면 계절의 흐름을 숫자로 인식하는 게 아니라, 기후나 환경의 변화에 촉각을 세우고 몸으로 느끼죠. 우리는 결국 자연에 속하는 존재임을 자각하고 인위적이지 않은 삶을 꾸려나가고 싶다고 생각해요.

 

 

저 역시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사는 것 같아요. 제가 만들어내는 건 인공물이 대부분이니까요. 마지막으로 작가님은 농사를 토대로 어떤 청사진을 그리고 계시는지 궁금해요.

− 고 아직 3년차 초보 농부라 지구과학, 생태, 환경, 곤충 등 공부해야 할 분야가 끝도 없더라고요. 그럼에도 매번 자연의 순환 구조를 익히고 몸소 체감하면 늘 벅차요. 지금 제가 배운 것들을 잊지 않고 또 다른 삶의 영역에도 적용해보고 싶어요.

 

 

김세음 기자

자료 제공 씨알콜렉티브, 고사리 작가

장소
씨알콜렉티브
주소
서울 마포구 성미산로 120 일심빌딩 2층
일자
2022.01.25 - 2022.02.26
링크
전시 예약
Art
김세음
글쓰기를 즐기는 디자인 전공자.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아름다움과 크고 작은 이야기들을 면면이 조명하고자 한다.

콘텐츠가 유용하셨나요?

0.0

Discover More
싹이 움트고 생명이 요동치는

SHARE

공유 창 닫기
주소 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