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1-24

걱정을 멈추고 폭탄을 사랑할 때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의 새로운 전시
<걱정을 멈추고 폭탄을 사랑하기(Stop Worrying and Love the Bomb)>가 2월 27일까지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에서 진행된다. 전시엔 박아람, 정명우, 정지현, 정희민 총 네 명의 작가가 참여했으며 조각, 회화, 설치, 퍼포먼스에 이르는 작품 20여 점을 만나볼 수 있다.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외관 © 서울시립미술관

 

해당 전시 기획의 시발점이 된 것은 팬데믹이란 사회적 상황. 전시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경계가 모호해지며 점차 물질성을 잃어가는 미술의 부작용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번 전시가 디지털 미디어에 마냥 회의적인 시선을 내비치는 것만은 아니다. 네 작가가 모인 이유는 바로 흐릿해진 작품의 실체를 확고히 하기 위해, 물질과 기술이 서로 상부상조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다.

 

전시 전경 © 서울시립미술관

 

기획 의도는 전시명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언뜻 보기엔 꽤나 생경한 문장인 ‘걱정을 멈추고 폭탄을 사랑하기’. 이는 미술이론가 최종철의 연구논문*에서 따왔다. 해당 표현이 최초로 등장한 건 핵무기의 비극적 결말을 담은 스탠리 큐브릭(Stanley Kubrick)의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 혹은: 우리는 어떻게 걱정을 멈추고 폭탄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나>. 이후, 미술평론가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가 이를 < Under Blue Cup >의 소단락 제목으로 인용했고, 크라우스의 개념을 참조한 최종철이 원래의 용법을 살짝 비튼 뒤 논문 제목으로 썼다.

* 최종철, 「“걱정을 멈추고 폭탄을 사랑하기”: 포스트 미디엄 이론을 통해 본 디지털 이후의 미디어 아트」, 『미학예술학연구』 53권

 

전시 전경 © 서울시립미술관

 

신(新)기술이 정말 우리의 삶을 파괴할 ‘폭탄’이 될지는 결국 우리 두 손에 달려있다. 디지털 미디어의 방향을 올바르게 인지하고, 언제든지 감각을 복원할 수 있는 ‘몸의 지식’을 터득한다면 파괴와 두려움을 넘어선 디지털의 진정한 가치를 마주할 수 있을 것. 그러한 의미에서 이번 전시는 디지털 환경 안에서의 기술 감각을 직접 체득해 볼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인 셈이다.

 

, 2021, 혼합매체(커튼, 배관, 물, 세면대, 비누, 핸드크림, 알사탕 등), 가변크기 © 서울시립미술관

 

가장 먼저 만나볼 수 있는 작품은 박아람 작가의 <휠> 시리즈. 1층부터 계단, 2층까지 이어지는 설치 작업이다. 우선 1층 <휠>은 완전한 현실이자 가상 공간을 의미한다. 비누로 손을 씻거나 알사탕을 먹는 등 작가가 비치한 생활 속 도구를 통해 자신의 감각에 주목해 보자. 배경음악 역시 작품의 일부분. 스마트폰 알림음과 안내 방송이 흘러나오며 가상 세계 속의 일상성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설치된 금색 파이프. 이 역시 박아람 작가의 작품 일부다. © 서울시립미술관
(좌) 정지현, , 2021, (우) 정지현, , 2021

 

정지현 작가의 <해치>와 <에브리 해태 2021>도 같은 층에 위치해 있다. <해치>의 모티프가 된 건 난지도 노을공원에 자리한 동명의 공공조각상 ‘해치’. 조각상 위, 알루미늄 망을 올리고 손으로 일일이 누른 후 모양을 본떠 우레탄 폼을 채운 뒤 깎고 다듬었다고. 마치 거푸집을 사용해 주물을 떠내듯 하는 이 같은 방식은 공간과 반복을 손쉽게 생성하는 디지털 과정(Ctrl+C, Ctrl+V)과도 닮아있다.

<에브리 해태 2021>는 전작 <에브리 해태 2020>를 새롭게 재제작한 작품이다. 평소 정지현 작가 조각 작업의 주된 재료는 폐자재. 작가는 의미와 맥락을 상실한 뒤 버려진 것들을 모아 재조립과 분해를 거쳐 이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곤 한다. <에브리 해태 2021>의 재료가 된 것은 ‘2020 아트 플랜트 아시아’에 출품했던 작가의 지난 작품 <에브리 해태 2020>. 당시의 해태 형상을 지우기 위해 단상을 파낸 뒤 식물을 심거나, 조각으로 잘라(<에브리 해태 2021_손>) 별개로 전시하는 등 여러 변주를 시도했다.

 

© 서울시립미술관

 

신체 움직임을 데이터화하고 움직임의 서사를 다루는 작가, 정명우의 작품 중 눈에 띄었던 건 <.bvh3(슬링샷)>이다. 작품 제목은 모션 캡처 데이터의 확장자명을 의미한다. 하나의 동작이 인터넷 밈(meme)으로 자리 잡는 과정을 영상으로 담아낸 작업. 레슬링의 공격 동작 중 하나인 ‘슬링샷’이 ‘토루’라는 이야기 속 캐릭터와 합쳐져 밈으로 전파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의 또 다른 작품 <.bvh3(업로드)>는 데이터가 유통되는 과정을 관객 스스로 경험해 볼 수 있도록 한 참여형 작업이다. 서울시립미술관 홈페이지를 통해 사전 접수를 받고 있으며, 관객이 모션 캡처 장비를 착용하고 만들어낸 무빙 이미지는 가공을 거쳐 공식 웹사이트와 인스타그램, 틱톡 계정에 업로드될 예정이다. 이는 데이터가 온라인상에서 소유권을 잃고 무명화 되는 과정의 일부이기도 하다.

 

2021, 금색 침구와 매트리스 및 지지대, 55x150x400cm © 서울시립미술관
2층 군데군데 놓인 금색의 택배 박스. 휠 시리즈의 일부로, 1층 에 등징하는 안내 메시지와 맥락이 이어진다. © designpress

 

금색 침구로 덮인 두 개의 침대는 박아람 작가의 작품, <휠(가까이)>. 대칭을 이루고 있는 두 침대가 서로를 비추는 거울처럼 자리 잡았다. 디지털 세계의 ‘미러링’ 현상과도 닮아있는 이곳은 ‘나와 너’, ‘내부와 외부’, ‘존재와 부재’와 같이 대응하는 속성들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공간이다.

 

정희민 작가의 과 . 두 작품의 캔버스가 된 건 다름 아닌 라이트박스다. 단층처럼 쌓아 올린 물감과 손의 흔적이 그대로 드러난다. © 서울시립미술관

 

2층 한편에 놓인 네 점의 회화는 정희민 작가의 <서펜타인 트워크> 시리즈다. ‘꽃’을 모티프해 작업하는 화가,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에게 영감 받았다. 여기에 소설가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가 환각 물질인 ‘메스칼린’을 복용한 채 꽃과 피륙을 묘사한 점을 함께 차용했다. 뱀처럼 춤을 추며 움직이는 듯하는 캔버스의 모습이 독특하다. 찢기고 엮인 물감 덩어리를 통해 디지털 세계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촉각적 심상’에 포커스를 맞췄다.

다락방 내부 전경 © 서울시립미술관

 

한편 이번 전시에는 작품 외에도 여러 참여 프로그램이 준비돼 있다.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VR 조각 워크숍, 정지현 작가가 가상의 오브제를 만들어 내는 과정과 이에 따른 결과물을 관람할 수 있는 다락방 투어가 그 예. 색다른 참여 전시들은 서울시립미술관 홈페이지 사전 예약을 통해서만 진행된다. 매일 13시와 15시, 전시를 보다 가까이 느끼고 싶은 이들을 위해 도슨트 안내도 함께 운영 중이다.

 

지선영 기자

자료 제공 서울시립미술관

장소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주소
서울 관악구 남부순환로 2076
일자
2021.11.30 - 2022.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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