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22

생선 가게에서 작품을 걸었더니…

뉴욕타임스 1면에 실려버렸다?
변종곤 개인전 <환유(換喩) : 재현되는 아이러니>가 갤러리 구조에서 1월 28일까지 개최된다.
변종곤 작가 ⓒ갤러리 구조

 

변종곤은 1978년, 제1회 동아미술대전 대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세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은 그때였지만, 실상 그는 현대미술 최전선에서 활동했던 미술 운동 단체 ‘에꼴 드 서울(Ecole de Seoul)*’의 일원으로 일찍이 명성을 떨쳤다. 비단길만 펼쳐질 것 같던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사건은 미국 ‘망명’이었다. 미군이 철수한 후 폐허가 된 대구 앞산 비행장을 그린 것이 동아미술대전 출품작이었기 때문. 미군 아버지가 버리고 떠난 혼혈아가 방황하는 거리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그의 작품은, 장발과 미니스커트까지 단속 대상으로 삼았던 당대 군사정권이 죄를 묻기 충분했다. 그는 예술가의 자유를 보장하기는커녕 서슬 푸른 잣대를 들이미는 고국을 떠나기로 했다.

* 에꼴 드 서울은 1975년에 박서보(朴栖甫)가 주축이 되어 창립한 미술 단체다.

 

변종곤 작가 ⓒ갤러리 구조

 

촉망받는 신예에서 한순간 화단의 문제아로 낙인찍힌 변종곤에게는 자유에 대한 절박함이 있었다. 그가 미국행을 택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무엇에도 속박되지 않은 채 생을 만끽하는 히피 문화와 예술혼이 들끓는 도시. 최소한의 생필품과 일인용 전기밥솥, 화구 뭉치를 챙겨 도착한 그곳은 뉴욕의 할렘이었다. 험한 사건이 지천인 할렘이라니! 변종곤은 뉴욕에서 버려진 오브제를 수집해 작품의 주요 매체로 삼았다. 이후 뉴욕타임스와 워싱턴 포스트와 같은 유명 외신이 소개하고, 클리블랜드 미술관(Cleveland Museum of Art), 인디애나 폴리스 미술관(Indianapolis Museum of Art), 국립현대미술관과 같은 국내외 유수의 기관에서 영구 소장하는 작품의 작가로 도약했다. “마치 주머니 속 죽음을 넣고 다닌 듯했다”라고 회고할 정도로 곤궁했던 그가, 뉴욕을 대표하는 한국 작가가 되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Interview with 변종곤 작가

 

변종곤, Miss December, 76x28x43cm, Mixed Media, 2007
변종곤, Things, 76.2x61cm, Pencil Drawing On Paper with Mixed Media, 1999

 

지금까지 목조 예수상과 수신기, 성모마리아와 마릴린 먼로 등 다양한 이미지와 오브제를 합치한 작품을 선보였습니다.

세계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수집한 오브제는 각 지역의 유물이나, 고가의 희귀한 사물인 경우가 많습니다. 나의 작업은 미지의 세계에 접속해 무언가 발견하는 ‘선택적 희열’에서 출발합니다. 오브제의 직관적인 형태, 시간의 흔적, 사물이 거쳐온 역사 등을 고려해 수집합니다. 지극히 사적인 판단, 혹은 감각이지요. 이렇게 수집한 오브제는 나의 공간에서 숙성의 시간을 보냅니다. 각각의 시공간을 거쳐온 오브제를 또 다른 오브제와 조합, 혹은 충돌시키며 재창조합니다.

 

변종곤, The Silent Renaissance, 117x93cm_Oil on Board, 1998
변종곤, From Giorgio de Chirico, 80x27x8cm, Collage, Oil on Violin, Mixed Media, 2021

 

오브제와 영적으로 교감하고 계신 것처럼 보입니다. 과거와 현재 작업의 차이가 있습니까.

한국에서는 확대한 타이프라이터(typewriter*)를 극사실주의로 표현하며 정치적 배경에 따른 시대 비판적 사고를 캔버스에 옮겼습니다. 인간의 발언과 사고(思考), 나아가 출판물까지 검열하던 시대에 반기를 든 것이지요. 문제적 시대에 놓인 한 작가의 혈기 넘치는 투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뉴욕 이주 후에는 수많은 미술관이 위치한 환경의 영향을 받아, 다다이즘(dadaism)과 초현실주의 사조를 가까이 접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경험이 재창조한 오브제의 근간이 되었지요. 그간 해왔던 회화와 오브제를 접목한 것도 자연스러운 시도였습니다.

* 타이프라이터는 손가락으로 자판을 눌러 종이에 글자를 찍는 기계를 뜻한다.

 

2000년 2월 20일, 뉴욕타임스 1면에 게재된 변종곤의 작품

 

뉴욕은 작가 변종곤의 삶을 바꿨습니다. 강렬하게 남은 그곳에서의 사건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뉴욕에 도착한 나에겐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할렘에 정착하게 되었지요. 마치 전쟁 후 폐허가 된 곳에 불시착 한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화구조차 구입할 수 없는 상황에 자존감이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궁핍한 재정 상황을 견디다 못해 생선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습니다. 벌레 하나 죽이지 못했던 내게 펄떡이는 생물을 자르는 일은 지옥이었습니다. 내가 미술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않으려 주방 벽에 작품을 걸어 놓고 버텼지요. 일을 마치고 뼛속까지 파고드는 추위가 있는 방으로 돌아와 신께 “저를 얼마나 위대한 작가로 키우시려고 이런 고난을 주십니까” 하고 묻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헬무트 지츠위츠라고 하는 독일계 유명 갤러리스트가 나의 작품을 알아보고 “뉴욕을 다시 시작하라”며 3만 불(한화 약 3,500만 원)이라는 거금을 쥐여주었습니다. 지금에야 한국이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으나, 당대 동양인 예술가에게는 기적과 같은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후 2000년 2월 20일에는 나의 작품이 뉴욕 타임스 지면에 실리기도 했습니다. 뉴욕에서 참 많은 일이 있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결코 잊지 못합니다.

변종곤, Male Surrealists 69x57x5cm, Mixed Media, 2020
좌측으로 작게 보이는 작품, 변종곤, Rusty Times, 48x 33x18cm, Mixed Media, 2021

 

이번에 개최한 개인전 <환유 : 재현되는 아이러니>에서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공개하는 신작 37점을 전시합니다.

팬데믹의 한 가운데를 살며 인간 실존 같은 본질적 문제를 깊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간 사회 비판적이고 냉소적인 관점으로 작업을 해왔다면, 예상치 못한 코로나 바이러스의 출현으로 삶에 대한 시선이 바뀌었습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삶에 대한 나의 이상(理想)을 보다 직관적으로 표현하는 작품을 전시하기로 했습니다. 밝고 긍정적인 색감을 활용하거나, 희화화된 사물을 등장시킨 것입니다. 이러한 시도가 관람자들과 솔직하게 소통할 수 있는 매개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변종곤 작가가 착용한 반지엔 'SHIFT FREEDOM'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명실상부 세계적인 작가 변종곤의 꿈이 궁금합니다.

글쎄요. 뭐 그리 거창한 꿈이 있을까요? 늘 그랬던 것처럼 아내와 손잡고 브루클린 브릿지 공원(Brooklyn Bridge Park)을 산책하며 일상의 잔잔한 행복을 유지하고 싶습니다.

 

변종곤 작가 ⓒ갤러리 구조

 

세월을 비껴간 변종곤 작가님의 비결은 무엇인지요.

서른 초반의 젊은 나이로 한국을 떠났을 때 머물러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나는 날마다 새로움을 느끼며 무엇이든 간에 도전을 멈추고 싶지 않답니다. 작가는 자신의 나이를 인지하는 순간 생명력을 잃는다고 생각해요. 어쩌면 항상 꼼 데 가르송(COMME des GARÇONS)의 최신 컬렉션을 입고, 발렌시아가(BALENCIAGA)의 재미난 스니커즈를 신고 싶어서일 겁니다.

 

 

 

신은별

자료 협조 갤러리 구조

장소
갤러리 구조 (서울 성동구 뚝섬로 419, 4층)
일자
2021.12.03 - 2022.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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