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물이란 무엇인가? 그 시작을 찾아서
〈드래곤볼〉의 TV 애니메이션은 1986년, 〈귀멸의 칼날〉의 TV 애니메이션은 2019년 일본에서 처음 방영됐다. 둘 사이에는 33년의 시간이 있지만, 두 작품에는 공통점이 있다. 두 작품 모두 소년 만화의 산실인 만화 잡지 〈주간 소년 점프〉 연재 만화를 원작으로 한다는 점, 원작 만화의 세계 누적 발행부수가 2억 부를 넘어섰다는 점이다. 두 작품이 시대를 대표하는 소년물임을 증명하는 수치다.
여기서 잠깐. ‘소년물’이란 대체 무엇인가. 사람마다 정의가 다르겠지만 ‘현대 소년 배틀물’의 관점에서 보면 ‘소년물의 아버지’가 바로 〈드래곤볼〉이다. 〈드래곤볼〉은 일곱 개를 모으면 소원이 이루어지는 구슬 ‘드래곤볼’을 찾아 여행하던 소년 손오공의 이야기다. 손오공은 자신보다 강한 상대와 차례로 맞서고, 패배와 수련을 거듭할수록 강해지고, 한때 적이었던 이들과 어느새 동료가 되어 다음 싸움에 함께 나선다. 그렇게 한 소년의 모험은 지구를 넘어 우주의 운명을 건 대결로 커져간다. 수련하고, 어제의 적과 동료가 되며, 더 강한 적을 만나 한계를 넘어서는 구조’를 대중적인 문법으로 정착시킨 게 바로 〈드래곤볼〉이다.
약 30년 뒤 등장한 〈귀멸의 칼날〉은 〈드래곤볼〉이 정립한 소년 배틀물의 문법에 ‘상실’과 ‘연민’, ‘애도’의 감정을 더했다. 주인공 탄지로는 인간을 잡아먹는 도깨비 ‘혈귀’에게 가족을 잃고, 혈귀가 된 동생 네즈코를 인간으로 되돌리기 위해 혈귀를 잡는 집단 ‘귀살대’에 들어간다. 그 역시 수련을 거쳐 강해지고 동료들과 더 강한 적에게 도전하지만, 쓰러뜨린 혈귀의 과거와 슬픔까지 외면하지 않는다.
두 작품은 모두 ‘수련하고, 강해지고, 한계를 뛰어넘는다’는 문법을 공유하지만, 무게를 두는 감정은 다르다. 〈드래곤볼〉은 ‘힘을 합쳐 세계를 구한다’는 공동체의 결의에, 〈귀멸의 칼날〉은 상실한 이를 애도하고 남겨진 이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위로의 마음에 집중한다. 어쩌면 1980~1990년대의 소년들에겐 ‘우리를 지켜야 한다’는 마음이, 2010~2020년대의 소년들에겐 ‘살아남지 못한 이들에 대한 애도’의 마음이 더 강하게 작동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 두 작품의 애니메이션 전시가 성수동에서 같은 시기에 열리고 있다니. 소년물을 사랑하는 팬들에게 어찌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있으랴. 곧장 성수동으로 향했다.
가족을 위한 전시〈드래곤볼 히어로즈 라이즈〉
〈드래곤볼 히어로즈 라이즈〉는 홍콩의 IP 전시 제작사 인큐베이스 스튜디오가 라이선스를 받아 기획한 아시아 순회 전시다. 2025년 8월 태국 방콕의 아이콘시암에서 처음 공개됐고, 2026년 1월 대만 타이베이를 거쳐 서울에 세 번째로 도착했다.
전시는 성수동 ‘스테이지엑스 성수 403’의 2개 층을 사용한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먼저 〈드래곤볼〉 애니메이션의 역사가 시작된다. 소년기 손오공이 동료 부르마를 만난 순간부터, 피콜로 대마왕과의 대결, 사이어인의 습격, 프리저와 셀, 마인 부우와의 전투가 40여 점의 실물 크기 스태츄로 이어진다.
특히 스태츄의 완성도는 기대 이상이었다. 애니메이션 장면 속 근육의 굴곡과 옷자락의 움직임, 각 태릭터의 표정까지 세세하게 구현했다. 마지막에는 〈드래곤볼 슈퍼〉 에서 등장한 손오공의 각성체 ‘무의식의 극의’에 도달한 손오공의 모습이 기다리고 있다. 애니메이션 장면과 함께 실제 스태츄가 등장하는 연출이 인상적이었다.
〈드래곤볼〉을 잘 모르는 관람객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각 구역마다 인물과 사건이 꽤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작품 속 시간순으로 전시가 진행되기 때문에 전시장만 천천히 따라가도 손오공이 누구를 만났고, 왜 싸웠으며, 어떻게 강해졌는지 이해할 수 있다. 작품의 팬을 주 타깃층으로 기획하는 애니메이션 전시와 달리, 이번 전시는 오히려 〈드래곤볼〉을 복습하고, 공부하는 전시에 가깝다.
전시를 둘러보는 내내 ‘아이와 함께 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980~1990년대 〈드래곤볼〉을 보며 자란 소년들은 2026년 현재 ‘아버지’가 되어 있을 확률이 높지 않은가. 아이와 함께 방문해 〈드래곤볼〉을 ‘전수’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실제로 일본 시장조사 기업 모니타스(Monitas)의 2021년 5월 일본 전국의 15세 이상 남녀 50만 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30~40대 남성들이 가장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1위로 고른 작품이〈드래곤볼〉이었다.
〈귀멸의 칼날: 전집중展〉
다음으로 찾은 곳은 성수동 에스팩토리 D동 1층에서 열리는 〈귀멸의 칼날: 전집중展〉이다. 한국 개최는 이번이 처음이다. 2020년 오사카에서 시작해 일본과 아시아 여러 도시를 순회한 끝에 2026년 6월 서울에 도착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귀살대 최종 선별이 열렸던 후지카사네산의 등꽃이 관람객을 맞는다. 귀살대원이 되려는 이들이 혈귀가 돌아다니는 산에서 일주일간 살아남아야 하는 시험 장소다. 관람객인 나까지 귀살대 시험을 보러 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어 귀살대 본부와 무한열차, 유곽 등 작품에서 등장했던 공간들이 차례대로 등장한다. 군데군데 ‘촬영금지’라는 안내 스티커가 붙어 있었지만 문의 결과 “촬영해도 된다”는 답변을 들었다.
이번 전시는 작품을 이미 본 팬들에게 더 와닿는다. 이야기를 처음부터 설명하기보다, 애니메이션 속 공간을 직접 체험하도록 꾸몄다. 포토존도 많다. 등꽃 아래에 서고, 무한열차에 올라타고, 혈귀의 혀 위에서 사진을 찍는 식이다. 포토존 한쪽에는 귀살대 간부인 ‘주’들이 입는 망토가 마련돼 있었다. 스태프가 먼저 다가와 착용을 권하기도 했다.
스틸컷과 영상도 단순히 늘어놓지 않았다. 쇼지문(나무 격자에 반투명한 종이를 붙인 일본식 미닫이문)의 작은 구멍으로 장면을 엿보게 하고, 영상과 구조물을 이용해 최종 보스 무잔의 본거지인 ‘무한성’으로 떨어지는 듯한 감각을 구현했다. 애니메이션에서 보았던 공간에 실제로 숨어든 듯했다.
전시에서 가장 오래 머문 곳은 화려한 무한성도, 포토존도 아니었다. 애니메이션 제작사 유포테이블(ufotable)의 제작진 한 명 한 명이 그린 ‘색지’ 전시였다. ‘색지(色紙)’는 일본에서 그림이나 글씨를 남길 때 사용하는 두꺼운 사각 종이다. 〈귀멸의 칼날〉의 감독과 캐릭터 디자이너, 작화감독 등 작화에 참여한 제작진 68명은 〈전집중展〉을 위해 각자 색지에 그림을 그렸다. 캐릭터 디자인과 총작화감독을 맡은 마쓰시마 아키라의 그림 6점을 포함하면 총 73점이다.
원작 만화가 고토게 코요하루가 그린 만화 원화도 아니고, 애니메이션 콘티나 작화 원본이 아닌, 오로지 애니메이션 제작진이 전시를 위해 새롭게 그린 기념 그림. 〈귀멸의 칼날〉 애니메이션의 성공이 퀄리티 높은 애니메이션 작화 덕분이라는 의견이 많은 만큼, 이번 전시가 ‘왜 만화가 아닌 애니메이션 전시’인지 뚜렷하게 보여주는 그림들이었다.
전시를 보고 나오자 어느 새 귀살대가 되어 있었다. 전시 중 스마트폰을 이용해 ‘귀살대 게임’을 플레이해야 하는 구간이 나오는데, 퇴장할 때 플레이 인증샷을 스태프에게 보여주자 ‘훈련 수료증’을 건네받았다. 무려 귀살대의 수장인 우부야시키 카가야의 공인 수료증이었다. 이제 나도 혈귀와 싸우러 떠나야 하는 걸까? 그건 좀 무섭다.
두 전시를 모두 둘러보고 나니, 각 작품이 관객을 대하는 방식이 확실히 달랐다. 〈드래곤볼〉 전시는 “손오공이 걸어온 길을 처음부터 보여주겠다”고 말한다. 〈귀멸의 칼날〉 전시는 “그날의 장면을 기억하느냐”고 묻는다. 둘 중 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누구와 방문하는지에 따라 선택지가 달라지겠다. 아이와 함께 하는 가족 나들이거나 애니메이션을 잘 모른다면 〈드래곤볼 히어로즈 라이즈〉가 어울린다. 〈귀멸의 칼날〉을 이미 좋아하고, 애니메이션 제작 과정에도 관심이 있다면 〈전집중展〉의 만족도가 더 높을 테다.
같은 팬들이 손오공에서 탄지로로 그대로 이동한 것은 아니다. 다만 한 세대가 만든 소년의 싸움이 다음 세대로 전해지며 새로운 감정과 관객을 얻었다. 두 전시를 보고 싶다면 막을 내리기 전에 서두르자. 성수동에서 소년 애니메이션의 열기가 사라지기 전에 말이다.
글 김은빈 객원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