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9-20

디스토피아의 기묘한 아름다움

AES+F의 국내 최초 단독 전시.
지난 3월 개관한 전남도립미술관에서 러시아의 콜렉티브 그룹 'AES+F'의 작업을 소개하는 특별기획전 가 열린다. 2007년과 2009년 베니스 비엔날레 러시아관에 각각 출품한 <최후의 반란(Last Riot)>, <트리말키오의 연회(The Feast of Trimalchio)>로 국제적 주목을 받아온 AES+F는 국내에 몇 차례 소개된 바 있지만 단독 기획 전시로는 이번이 처음이다.

 

AES+F는 각기 다른 분야를 전공한 네 명의 아티스트가 모여 각자의 이름 이니셜을 조합한 그룹명이다. 건축을 전공한 타티아나 아르자마소바(Tatiana Arzamasova1955~), 레프 예브조비치(Lev Evzovich, 1958~)와 그래픽 예술을 전공한 예브게니 스비야츠키(Evgeny Svyatsky, 1957~), 그리고 가장 마지막으로 합류한 멤버이자 패션 사진작가로 활동하던 블라디미르 프리드케스(Vladimir Fridkes, 1956~)가 그들 멤버이다. AES+F는 자신들의 작업을 ‘사회적 정신분석‘이라고 정의하는데, 동시대 글로벌 문화 속의 가치, 악, 갈등을 탐색하고 밝혀내는 행위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뒤집힌 세상

전시를 여는 2전시장에는 <뒤집힌 세상(Inverso Mundus)>(2015)시리즈가 소개된다.
이번 전시에서는 사진 12점과 영상에 사용되었던 오브제 중 케이지(CAGE)를 선보인다.
 
뒤집힌 세상, 전남도립미술관 설치전경, 사진 오정은

 

“우리만의 방식으로 종말Apocalypse을 보여주고자 했다.

우리가 제시하는 종말 퍼레이드는 오래된 세상의 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새로운 세상의 시작이다.”

 

가치가 전복되고 혼란스러운 시대의 독특한 미감을 드러내온 AES+F 작업의 주된 모티프는 수 세기 전 고전에서부터 온 것이다. <뒤집힌 세상(Inverso Mundus)>은 19세기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출판된 책의 삽화인 <거꾸로 세상(El Mundo Al Revés)>에서 영감을 받았다. 총 48개로 이루어진 이 삽화는 사람과 동물, 여성과 남성, 귀족과 거지의 역할이 서로 바뀌어 있고, 해와 달이 땅속에 있거나 물고기가 하늘을 날고 육지동물이 바다에 사는 등 상식에 맞지 않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요한묵시록에 등장하는 ‘아포칼립스(세상의 종말)’의 상황을 해석하고 당대를 풍자했던 삽화의 아이디어로부터 AES+F는 한발 나아가 동시대에 도래한 혼종(hybrid)과 종말의 이미지를 조합하고 디지털 기술로 극화해 표현한다.

 

천사와 악마

선과 악, 인종과 성별이 ‘유아’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공존하는 듯한 조형 작품 시리즈.새로운 세계의 시작을 예고한다.

 

AES+F, 천사-악마 #2, 2009, 알루미늄, 파이버글래스, 에나멜페인트, 144x80x183cm, Courtesy of Collection of Ulyana & Alexander Kurgansky, AES+F

 

“악마는 천사처럼 보일 수도 있고 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새로운 시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기발하고 유머러스하며 괴기스럽고 공포스럽다.” AES+F의 작업을 대면하는 관람객은 위트와 공포, 양가적인 느낌을 동시에 받는다. 이번 전시에서 총 일곱 점의 조형물로 소개된 <천사-악마(Angels-Demons)>를 보더라도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천사와 악마 도상이 서로 뒤섞여 혼란한 감정을 부르는 것을 알 수 있다.

 

검은색 에나멜로 코팅된 이들 군상 조각에서 아기 천사는 날개와 뿔을 달고, 기저귀를 찬 엉덩이 밖으로 돌기 돋친 꼬리를 내밀고 천진난만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 역시 고딕 건축양식에서 볼 수 있는 괴물 ‘가고일(Gargoyle)’과 르네상스 예술에서 흔히 본 아기 천사의 형상이 합쳐진, 즉 고전을 차용하고 변형하는 AES+F의 문법이 드러난 것이다. 선과 악의 양분은 물론, 모든 이분법적 구분과 위계적 질서, 절대적 믿음을 부정하려는 작품의 의도는 때로 전통과 종교적 관습에 도전하면서 인간의 실존을 질문하고 현대 사회에 유의미한 가치적 질문을 던지는 계기로 작동된다.

 

 

신성한 우화

현실과 가상의 세계가 혼합된 사진 작품 시리즈.
다양한 문명과 종교, 인종이 국제공항이라는 알레고리적 장치 안에 풍자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쾌락, 고문 등의 개념은 뒤집히고 혼란스러운 상황으로 연출된다.
 
AES+F, 신성한 우화, 쌍둥이, 2012, 종이에 라이트젯 프린트, 디아섹, 160 x 224cm, Courtesy of the Artists, AES+F
AES+F, 신성한 우화, 춤, 2012, 종이에 라이트젯 프린트, 디아섹, 160x224cm, Courtesy of the Artists, AES+F


“우리는 현실이 자기 스스로 변모하는 공간으로 공항을 떠올린다.”

 

전시 공간에서는 AES+F의 <신성한 우화> 시리즈가 베네치아 화파의 창시자로 알려진 르네상스 화가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 1430~1516)의 <신성한 우화(Allegoria Sacra)> (1490-1500)로부터 차용됐음을 관람객에게 쉽게 전달하기 위해 원작의 도판과 알레고리에 대한 설명이 인쇄된 패널을 제작해 보여주고 있다.

 

성 세바스찬, 사도 바울, 성모 마리아, 성 캐서린 등 신화적 인물과 무슬림과 나귀, 켄타우로스 같은 고대 신화의 도상이 하나의 화면 안에 그려진 원작이 담은 다층적이고 불가해한 특징은 서로 다른 인종과 국가, 문화권의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한데 모이는 국제공항을 배경으로 AES+F에 의해 전유되어 표현된다. 공항은 여러 층위의 경계가 동시간에 섞이고 현대 시점의 새로운 우화가 생성되는 특별한 장소로 해석된다. 이념과 정치적 충돌이 난무하는 시대의 모습을 풍자적으로 묘사하는 AES+F의 작업에는 상이한 인종과 출신, 연령이 다른 배우가 등장하는 것도 특색이다.

 

 

투란도트

자코모 푸치니Giacomo Puccini의 오페라 투란도트를 재해석한 영상작품
2070년 상상적 베이징을 배경으로, 서방국가의 관점에서 본 중국에 대한 우려, 여성의 복수와 권위주의, 과거와 현실이 뒤섞인 질문을 던진다.

 

AES+F, 투란도트2070 스틸컷, 2019, 8채널 프로젝션 스크린, Courtesy of the Artists, AES+F

 

AES+F가 오페라, NFT 아트로도 구현한 바 있는 <투란도트 2070>는 이번 전시에서 8채널 대형 스크린으로 소개되며 감각을 자극한다. 작품의 모티프가 된 원작 투란도트는 자코모 푸치니(1858~1924)가 작곡한 3막의 오페라로, 푸치니가 사망하면서 미완성으로 남은 바 있다. 푸치니가 설정한 투란도트의 배경은 고대 중국의 북경이지만 AES+F는 2070년 미래의 북경을 배경으로 내용을 각색해 초현실성을 배가시켰다.

 

투란토트 공주가 낸 수수께끼를 풀지 못한 구혼자가 외계 생명체 같은 것에 참수되는 장면 등 생물과 인간의 경계는 물론이고, 생명과 죽음의 경계마저 혼탁해지는 이미지는 AES+F의 이전 작업과 마찬가지로 기성의 가치 기준을 뒤섞으면서, 디스토피아적 감각을 경유해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과 문명의 미래를 예고하는 것이다. AES+F는 의도적으로 사회의 노선 방향과 시간의 계측을 망가뜨리고, 혼돈을 통해 우리가 지금을 예민하게 감각하고 성찰하기를 바라며 미술은 물론, 대중문화 전반에 그들만의 철학을 퍼뜨리기를 지속하고 있다.

 

 

소개된 전시가 더 궁금하다면 전남도립미술관 방문을 추천한다. 11월 7일까지 열리는 <한국서예의 거장 소전 손재형>,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고귀한 시간, 위대한 선물>을 함께 관람할 수 있다. 전남 광주에서 열리는 <광주디자인비엔날레>(9.1~10.31), 목포와 진도의 <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9.1~10.31)전시장을 경유해 가보는 것도 좋겠다.

 

오정은

자료 협조 전남도립미술관

장소
전남도립미술관 (전라남도 광양시 광양읍 순광로 660)
일자
2021.09.03 - 2021.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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