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9-14

덕수궁에 펼쳐진 상상의 정원

9인의 작가 X 덕수궁프로젝트2021.
덕수궁은 서울 중구 정동에 있는 조선과 대한제국의 궁궐이다. 한 때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조선이 자주 독립국임을 대외에 밝힌 의지의 장소였으며, 일제강점기에는 대중을 위한 꽃밭이자 일본 화가들이 그림을 진열하는 공간으로 전락하기도 했다.

흥망성쇠를 겪으면서 꿋꿋이 자리를 지켜왔던 덕수궁이 올 가을, 한국 현대미술작가들과 만나 새로운 감성을 발현한다. 국립현대미술관과 덕수궁관리소가 9월 10일부터 11월 28일까지 공동주최하는 <덕수궁 프로젝트2021: 상상의 정원>이다.

 

덕수궁 프로젝트는 올해로 4번째다. 국립현대미술관은 2012년, 2017년, 2019년 세 차례에 걸쳐 덕수궁 내 여러 전각들을 다양하게 활용한 현대미술전시를 선보이며 매번 큰 호응을 이끌어 냈다. 올해는 ‘정원’을 키워드로 찾아왔다. 한국의 현대미술작가 9명이 ‘정원’을 매개로 덕수궁의 역사를 돌아보고 동시대 정원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생각하는 작품 9점을 선보이는 것. 참여작가는 현대미술가(권혜원, 김명범, 윤석남, 이예승, 지니서), 조경가(김아연, 성종상), 애니메이터(이용배), 식물세밀화가(신혜우), 무형문화재(황수로)다.

 

‘정원’은 사전적으로 ‘집안의 뜰이나 꽃밭’을 뜻한다. 하지만 넓은 관점에서 보면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자연’ 혹은 ‘제2의 자연’이다. 정원은 사람과 자연을 연결하는 매개이자 자연과 문화에 대한 동시대 가치관과 시대정신이 총체적으로 구현된 공간이라고 볼 수 있다.

가을을 맞이한 덕수궁의 풍경 ⓒdesignpress

 

이번 프로젝트의 부제인 ‘상상의 정원’은 조선 후기 ‘의원(意園)’ 문화에서 차용했다. 의원은 ‘상상 속 정원’이라는 뜻이다. 18~19세기 조선의 문인들은 글과 그림을 통해 경제적 형편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껏 풍류를 즐길 수 있는 상상 속 정원을 만들어 내고 즐겼다.

이번 덕수궁 프로젝트에 참여한 현대 작가들은 2021년의 기술, 디자인, 시대정신을 반영해 다양한 관점을 지닌 상상 속 정원을 만들어낸다. 작가들이 한국 근대시기에 대한 연구한 끝에 만들어낸 이질적인 성격의 작품들은 각자 하나하나의 정원인 동시에 덕수궁 안에서 조화와 긴장 관계를 이루며 더 큰 정원을 구성한다.

 

 

작품 소개

 

상상 속 정원사들의 대화를 담은 권혜원의 영상 작업 ⓒdesignpress

 

“나무가 된다는 것은 말이죠”.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권혜원의 영상작업에는 나무의 독백이 등장한다. 작가는 몇 백 년 전부터 미래에 이르기까지 덕수궁 터에서 정원을 가꾼 5인의 가상의 정원사를 상상하며 각기 다른 시대를 보낸 정원사들의 대화를 통해 인간과 공존해온 식물들을 낯선 방식으로 보여준다. 또한 작품이 설치된 중화전 행각 기둥의 재료인 금강소나무와 행각 주위의 나무들이 나누는 대화를 통해 인간의 기억과 인식을 뛰어넘는 비인간 존재를 환기시킨다.

 

소수만 접근할 수 있었던 궁궐에서 시간을 누리게 된 근대 여성들을 떠올린 윤석남의 나무 조각 ⓒdesignpress

 

윤석남의 신작은 전근대를 살아온 여성들을 주목한다. 한국의 근대성은 식민주의와 맞물리는 특수성을 지닌다. 궁궐도 비슷한 경험을 겪었다. 작가는 근대기에 여성들이 사적 공간을 벗어나 공적 공간, 특히 소수만 접근 가능했던 궁궐이라는 개방된 공공장소로 나오게 된 것을 중요한 사건으로 본다. 이름 없는 조선 여성들의 얼굴과 몸을 명쾌한 윤곽선과 밝은 색으로 그려, 덕수궁에서 새로운 시대를 마주한 그들의 의지와 기대를 담아낸다. 이 작품은 폐목을 재생시킨 것으로, 석조전 대정원이 완성될 무렵 식재된 고목과의 상상의 대화를 담았다.

 

사라진 중화전이 지닌 역사성을 구리로 표현한 지니서 ⓒdesignpress

 

망국한 직후인 1911년, 일제는 서양의 대형 정원을 모방한 공원을 덕수궁 석조전 앞에 조성했는데 이 과정에서 덕수궁에서 중요한 국가 의식을 거행하거나 조회를 열던 ‘중화전’ 행각이 헐려버렸다. 이 장소가 지닌 역사성에 주목한 지니서는 사라진 중화전 행각의 열주를 상기시키는 기둥에 구리로 만든 열린 구조의 큐브를 설치했다. 자연이 쉼없이 변하는 것처럼 구리 오브제도 바람에 따라 움직이고 햇빛에 부딪혀 시시각각 낯설고 놀라운 풍경을 만들어 낸다.

 

불로장생을 의미하는 사슴 조각과 괴석으로 선계를 연출한 김명범 작가 ⓒdesignpress

 

김명범은 불로장생을 상징하는 십장생 가운데 하나인 사슴을 스테인리스 스틸로 주조해 세 개의 괴석 옆에 두고 선계를 연출한다. 주기적으로 떨어지고 다시 자라나는 숫사슴의 뿔은 움직일 수 없지만 생성과 소멸, 재생하는 나무처럼 삶과 죽음의 순환을 맞이하며 풍요와 변신을 맞이한다. 전통정원의 주요 요소인 괴석 역시 장수를 상징하며 선계(仙界)를 은유한다. 이질적인 동물(몸체)과 식물(뿔)이 신비롭게 합체된 사슴은 낯설고 환상적인 느낌을 배가한다.

 

중요무형문화재 황수로는 조선시대 궁중 공예의 정수를 보여주는 '채화' 작품을 선보였다. 채화는 비단, 모시, 종이 등으로 만든 꽃이다. ⓒdesignpress

 

조선시대 궁궐에서는 지천에 꽃이 피었어도 생화를 꺾어 실내를 장식하는 것을 금했다. 생명을 존중하고 왕의 위엄과 길상, 장수와 영원 불멸을 꿈꾸던 조선 왕조의 염원이 담겨 있는 문화다. 대신 인간이 만든 가화, 다시 말해 생화를 꺾지 않고도 그 색과 향을 오롯이 살려낼 수 있는 화려한 조화를 만들어 궁궐을 장식하고 궁중 의례와 향연에 사용했다. 이를 채화라고 한다.

 

중요 무형문화재 제124호(궁중채화) 황수로는 일제강점에 의해 맥이 끊긴 채화문화를 되살렸다. ‘채화(彩華)’는 조선시대 궁중공예의 정수이자 정원문화의 하나로서, 덕수궁에서 유일하게 단청으로 장식되지 않은 석어당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채화는 비단, 모시, 밀랍, 송화 등으로 만들어졌다.

 
조경가 김아연의 야외 카펫 ⓒdesignpress

 

대한제국 시기는 마치 카펫이 씨실과 날실의 매듭으로 엮이듯 독자적인 근대화를 추진하는 노력과 외세가 이식한 근대가 복잡하게 얽힌 시대였다. 조경가 김아연은 실내에서 사용하는 카펫(정원의 복제물)을 외부로 꺼내 진짜 정원 앞에 놓았다. 고종일가 사진에 등장한 카펫을 고증해 재현한 석조전 접견실 카펫의 문양과 덕수궁 전통 건축물의 단청 문양을 연구하여, 그 색과 디자인을 조화롭게 섞은 것이다. 이 카펫 테두리에는 살아있는 식물이 심겨져 있다. 카펫이 놓여진 장소는 고종이 휴식 장소로 사용했다는 정관헌, 한 때 명성황후의 빈전과 혼전으로 쓰이던 경효전 터에 세워진 덕홍전 사이다. 두 건물이 마주하는 자리에 놓인 이 수평의 정원은 고종과 명성황후를 위한 추모공원이 되기도 한다.

 

이용배와 성종상 작가는 고종의 드라마틱한 삶을 되돌아보며 그가 상상했을 정원을 애니메이션으로 그려냈다.

 

애니메이터 이용배와 조경학자 성종상은 근대적인 대한제국을 꿈꿨으나 외세에 의해 좌절되는 격변의 시대를 살았던 고종의 드라마틱한 삶을 되돌아보면서 자유롭지 못했던 그를 위한 혹은 그가 상상했을 정원(意園)을 애니메이션으로 선보인다.

 

식물학자이자 식물세밀화가 신혜우는 "대한제국 황실 전속 식물학자가 있었다면"이라는 가상에서 출발해 덕수궁 내 모든 식물들을 채집, 관찰해 그 결과물을 전시했다. ⓒdesignpress

 

한국에 서양의 근대식물학이 도입된 것은 개항 전후다. 유학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서구의 근대과학이 차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본격적인 식물학 연구는 일제강점기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추진되었다. 식물학자이자 식물세밀화가인 신혜우는 “대한제국 황실 전속 식물학자기 있었다면”이라는 상상에서 출발한다. 덕수궁에는 오래전 식재된 나무들과 시대에 따라 가꿔지고 제거된 원예종, 그리고 사람들이 들고 나며 옮겨온 외래종이 공존한다. 작가는 2021년 봄부터 덕수궁에서 발견되는 모든 식물을 대상으로 채집과 조사, 관찰, 기록을 수행하고 여기에 담긴 이야기를 표본과 세밀화 등으로 풀어냈다.

 

미디어 아티스트 이예승은 덕수궁 곳곳에 QR 코드를 통해 즐길 수 있는 증강현실 정원을 숨겨놓았다. ⓒdesignpress
작품에 부착된 QR코드를 읽으면 증강현실 그래픽이 등장한다.

 

미디어아티스트 이예승의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인스타그램이 설치된 스마트폰이 필수. 작가는 증강현실 기술을 활용해 혼종적인 덕수궁에 21세기 가상의 정원을 만든다. 관람객이 곳곳에 부착된 QR코드를 스마트기기로 읽으면 덕수궁 정원 혹은 조선후기 의원 문화와 관련된 이미지가 눈앞에 펼쳐져 생생하게 움직인다. 덕홍전에서는 정원에서 만났던 다양한 가상의 이미지를 3D 프린터로 구현한 오브제 및 영상을 다시 한번 만날 수 있다.

 

정원에서 만났던 다양한 가상의 이미지를 3D 프린터로 구현한 오브제 및 영상을 한 자리에 다시 모은 덕홍전 내부 ⓒdesignpress

 

미술작품 뿐일까. 작품을 관람하며 음악도 감상할 수 있다. 이번 덕수궁 프로젝트는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과 협력해 미술과 음악이 만나는 풍요로운 감각의 향연을 온라인을 통해 펼친다. 밴드‘잠비나이’의 심은용, 김보미가 윤석남, 김명범, 김아연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신곡을 제작했고 세 작가의 작품 앞에 놓인 QR코드를 태그하면 감상할 수 있다. 가을의 덕수궁 정원을 거닐며 잠시나마 상상과 휴식의 시간을 선사하는 이번 전시는 11월 28일까지 이어진다. 입장료 무료.(덕수궁 입장료 별도)

 

 
주 최 국립현대미술관,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덕수궁관리소
협 력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

 

 

유제이

장소
덕수궁 (서울시 중구 세종대로 99)
일자
2021.09.09 - 2021.11.27
링크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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